<럭셔리> 2026년 3월호

보이지 않는 앞단에서

눈에 보이는 결과 이전에, 브랜드가 서야 할 자리와 말해야 할 언어를 먼저 정리해온 김아린.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그가 반복해온 일은 언제나 ‘방향을 묻는 일’이었다.

EDITOR 김민지 PHOTOGRAPHER 김형상

10 CREATORS: THE ART OF MAK

디자인하우스가 걸어온 반세기의 철학 위에서 창간 25주년을 맞은 <럭셔리>는 한국 문화에 내재한 ‘막MAK’의 정신을 하나의 미학이자 태도의 언어로 정리하고자 한다. 이에 유연한 막 정신을 삶과 작업 속에 체화하고 있는 창작자 10인의 생생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미술가·음악가·배우 백현진부터 드라마와 연극, 영화를 아우르는 공민정, 무대와 런웨이를 오가는 기무간, 다양한 표정을 지닌 배우 옹성우, 음악의 진동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그레이코 드와 지인, 이제는 하나의 장르가 된 윤산하, 캔버스에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캐스퍼 보스만스, 다채로운 능력과 독보적 존재감의 대명사 수리, 가구와 공간을 잇는 문승지, 장르를 넘나들며 브랜드 컨설팅을 하는 김아린까지. 이들의 기록은 우리 시대의 독보적인 아카이브가 될 것이다.



김 아 린



“비마이게스트는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 회사냐”는 질문을 많이 받으실 것 같아요. 예전에는 정말 많이 받았어요. “뭘 납품하느냐”는 질문도 많았죠.(웃음) 그런데 요즘은 그 질문이 조금 달라졌어요. 브랜드가 왜 존재해야 하는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가 중요하다는 걸 다들 이해하는 시대가 됐거든요. 저는 스스로를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이라기보다 브랜드가 가야 할 방향과 이야기를 정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전략과 철학을 확립하는 일에 가깝죠. 식음료부터 코스메틱, 골프장, 부동산, 호스피탤러티 등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어요.


대표님이 말하는 ‘이야기’라는 건 꽤 복합적인 개념처럼 들려요. 그 이야기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을 포함하나요? 브랜드마다 정말 달라요. 어떤 경우에는 우리가 왜 탄생했는지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고 또 어떤 경우에는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가 해야 하는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죠. 또 고객에게 “우리는 이런 중요한 것들을 당신에게 전달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는 과정일 수도 있고요. 소비자는 그런 사소한 이야기에 감동하곤 하거든요. 요즘 제가 특히 중요하다고 느끼는 건 이 이야기가 ‘밖’으로만 들리는 게 아니라 ‘안’에서도 정리돼 있어야 한다는 점이에요. 내부적으로 철학이 정리돼 있으면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하는 일도 의미를 갖게 되거든요. 프로젝트 하나하나를 해내는 경험이 더 단단해지고요. 저는 그 안팎을 동시에 묶는 게 브랜딩의 스토리라고 생각해요.



“ ‘ 막’ 이라는 게 엉망이라는 뜻이 아니라 ‘ 그냥 지금 딱 좋지 않아?’ 같은 상태잖아요. 일부러 완벽하게 만들지 않았는데 그게 오히려 눈에 밟히는 상태요. 그 안에 생동감이 있는거죠.”



김아린 브랜드 컨설팅 스튜디오 비마이게스트Be My Guest 대표로 활동하며, 패션·푸드·뷰티·공간 영역을 넘나드는 다양한 브랜딩 프로젝트를 진행해왔다. 대표작으로는 설화수의 집, SSG푸드마켓 청담, 성심당 케익부띠끄, 백미당, 카펠라 레지던스, 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 방’, 백세주 리브랜딩 프로젝트가 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추상적인데 구체적인 결과물이 없어서 불안했던 적은 없었나요? 특히 초반에는 ‘이렇게 해도 되나?’라는 생각을 정말 많이 했어요. 남들은 다 명확한 직함과 결과물을 이야기하는데, 저는 계속 그 ‘앞단’ 이야기만 하고 있으니까요.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너무 보이지 않는 건 아닐까, 이게 정말 맞나 싶은 순간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게 제 방식이라는 걸 받아들이게 됐고, 오히려 그 지점이 저를 여기까지 데려왔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선택을 가능하게한 태도는 대표님의 성장 환경과도 연관이 있을 것 같아요. 1세대 여성 시인이셨던 외할머니와 설치미술가인 어머니, 프랑스 문학자이자 번역가인 아버지의 영향이요. 그 영향이 정말 컸다고 생각해요. 할머니도 글를 쓰셨고, 어머니와 아버지도 각자의 방식으로 느낀 것을 표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게 직업이든 아니든 감정을 안에만 두지 않고 밖으로 꺼내는 게 자연스러운 환경이었죠. 저는 그런 모습을 보며 자랐고요. 아마 그래서 표현하는 일 자체를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 같아요.


동시에 그런 환경이 부담으로 작용한 순간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어릴 때는 부담이 컸어요. 부모님과 할머니는 아주 어린 나이부터 자기 길이 또렷했고, 좋아하는 일을 끝까지 밀어붙인 사람들이잖아요.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길이 안 보이지, 나는 왜 이렇게 복잡하지, 그런 생각을 정말 많이 했어요. 한동안은 그게 자신에 대한 결핍처럼 느껴졌고요.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 그 복잡함 자체가 저였던 것 같아요.



프라마와 함께 작업한 여러 디퓨저 가운데 흙과 숯으로 만든 볼을 소나무 박스에 넣은 제품.


지금의 대표님은 그 ‘복잡함’을 어떻게 바라보고 계세요? 지금은 오히려 그게 제 자산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하나의 재능이나 하나의 방향만 가진 사람이 아니라 여러 레이어의 관심과 감각을 가진 사람이이었던 거죠. 그걸 다 담아낼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오래 고민했는데,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바로 그 결과인 것 같습니다. 그때는 길을 못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여러 갈래의 길을 동시에 쌓고 있었던 셈이죠.


오랫동안 다양한 브랜딩을 보고 직접 경험해오셨잖아요. 대표님이 생각하는 ‘잘된 브랜딩’의 기준은 무엇이라고 보세요? 사실 첫눈에 예쁜 브랜드나 디자인은 정말 많아요. 처음 본 순간에는 감동하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다시 보고 싶고, 또 찾게 되는 브랜드는 많지 않거든요. 저는 그런 지속성이 생길 때, 그게 정말 잘된 브랜딩이라고 느낍니다. 특히 저한테 감동을 주는 건, 이미 우리 삶에 너무 익숙했던 카테고리를 다시 보게 만드는 브랜딩이에요. 예를 들어 늘 쓰던 토스터를 발뮤다라는 새로운 기준으로 다시 보게 만든다든지, 너무 흔했던 쌀을 아코메야Akomeya라는 하나의 세계관으로 새롭게 풀어낸 경우처럼요.


2024년 진행한 국순당 백세주 리브랜딩 프로젝트. ‘백세주, 백 년을 잇는 향기’라는 컨셉을 담았다. ‘코리아 디자인 어워드 2024’에서 커뮤니케이션 부문을 수상했다.


최근 작업 중에서 대표님 스스로 ‘이건 좀 재미있었다’고 기억에 남은 프로젝트가 있다면요? 덴마크 브랜드 프라마Frama와 함께했던 ‘추석’ 프로젝트가 기억에 많이 남아요. 한국 짚풀 공예 장인이 엮은 케이스 안에 고창 황토 볼을 넣은 디퓨저를 만들었습니다. 나중에 지푸라기는 썩고, 흙은 다시 땅으로 돌아가는 구조로 굉장히 한국적인 물성이었죠. 한국에서는 좀 투박하고 낯설게 보일 수 있는데, 코펜하겐에서는 이것이 오히려 자연의 일부처럼 받아들여지는 게 흥미로웠어요.


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 방’ 프로젝트로 많은 주목을 받으셨죠. 사유의 방은 제게도 굉장히 부담이 컸던 작업이에요. 국립중앙박물관이라는 공간 자체가 이미 너무 많은 역사와 상징을 품고 있으니까요. 가장 큰 흐름은 부러 설명하려 들지 않는 거였어요. 너무 학술적으로 가면 감동이 사라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이 공간에 오는 분들이 반가사유상을 ‘이해’하기보다, 잠시 멈추고 자기 생각에 잠기다 가셨으면 했습니다. 그래서 ‘반가사유상실’이 아니라 ‘사유의 방’이라는 이름이 필요했고요.




그런 프로젝트들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한국적인 것’에 대한 고민도 더 깊어질 것 같아요. 맞아요. 한국적인 이슈가 있는 프로젝트는 웬만하면 꼭 하려고해요. 저는 한국적인 게 꼭 전통적인 형식으로만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지금의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묻어 나오는 한국적인 감각이 더 중요하다고 느낍니다. 백세주나 광주요 같은 프로젝트도 그런 맥락에서 더 애정이 가고요. 굉장히 한국적이지만, 동시에 오늘의 눈으로 봤을 때도 달콤하게 다가가야 하는 작업이죠.


이번 특집 키워드인 ‘막’이라는 단어도 그런 감각과 닿아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질문을 받았을 때 그 단어가 정말 마음에 들었어요. ‘막’이라는 게 엉망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냥 지금 딱 좋지 않아?’ 같은 상태잖아요. 일부러 완벽하게 만들지 않았는데 그게 오히려 눈에 밟히는 상태요. 그 안에 생동감이 있는 거죠. 반가사유상도 자세히 보면 막 앉은 건지, 막 일어서려는 건지 애매하거든요. 저는 그 중간 상태이자 그 에너지가 ‘막’의 개념 같아요. 제가 좋아하는 감각이기도 하고요.


지금 시점에서 대표님이 생각하는 진정한 럭셔리는 무엇인가요? 예전처럼 번쩍번쩍한 걸 럭셔리라고 부르던 시대는 이미 지나간 것 같고요. 요즘은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느냐가 중요해졌다고 느껴요. 시간으로부터, 공간으로부터 자유롭고, 비용이나 누군가의 허락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 그런 삶 자체가 럭셔리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잘 안 됐을 때도 “다시 해볼 수 있어”라고 말할 수 있는 마음이 남아 있는 상태요. 그런 여지가 있는 태도, 저는 그게 지금 시대의 럭셔리고, 어쩌면 그것도 ‘막’의 상태가 아닐까 생각해요. ‘비 프리Be Free’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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