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시 종로구 신문로, 말굽 형태의 건물이 안마당을 품듯 서 있는 주한 스위스대사관 앞에서 잠시 발길을 멈추게 된다. 전통 한옥의 처마 선에서 영감을 받은 지붕의 곡선, 그 아래 자연 소재와 개방적 구조로 구성된 내부 공간. 2019년 개관한 이 건물은 단순한 외교 공관을 넘어 양국의 관계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2025년 이곳에 나딘 올리비에리 로자노Nadine Olivieri Lozano 주한 스위스 대사가 새로 부임했다.
그의 외교 여정은 스위스라는 나라가 국제 무대에서 걸어온 길과 매우 닮아 있다. 스위스 연방외교부 대변인으로 외교의 최전선에서 대중과 직접 소통했고, 스위스 최초의 여성 안보정책국장으로서 전통적 군사 안보를 넘어 사이버 위협과 디지털 상호 의존성이라는 새로운 지형을 개척했다. 그리고 주이란 스위스 대사로 재임하는 동안에는 스위스가 이란 내 미국 이해대표국 역할까지 수행하는 복잡한 지정학적 환경 속에서, 대화를 지속하는 것이 외교의 본질임을 몸소 증명했다. 이란은 그에게 외교적 경험의 장이었을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깊은 인상을 남긴 나라다. “역경 속에서도 보여준 사람들의 회복력, 인간관계에서의 따뜻함과 관대함은 지금도 강한 인상으로 남아 있습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서울에 부임한 그가 마주한 한국은 기대 이상이었다. 스스로를 ‘K-컬처 중독자’라 표현할 만큼 빠른 추진력과 전통에 대한 깊은 존중이 공존하는 한국의 역동성에 매료된 것. 그리고 그 매력은 단순한 문화적 호기심을 넘어 한국과 스위스가 왜 이토록 자연스러운 파트너인지를 설명해주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세계지식재산기구(WIPO) 글로벌 혁신 지수 15년 연속 1위 국가 스위스와 세계적인 혁신 강국으로 인정받는 한국. 양국의 협력은 수소 모빌리티 생태계에서의 협력, 제약·바이오 분야의 공동 연구, 그리고 다가오는 ‘스위스-한국 이노베이션 위크 2026’까지, 정서적 공감을 넘어 산업구조의 차원에서도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나딘 올리비에리 로자노를 가장 잘 나타내는 키워드는 ‘정밀함’이다. 스위스를 수식하는 그 단어가 그와의 대화 속에서 단순한 기술적 완벽함이 아닌 훨씬 넓은 개념으로 확장됐다. 장인 정신, 신뢰, 지속 가능성, 그리고 설명하지 않아도 드러나는 품질. 그것이 그가 생각하는 스위스 라이프스타일의 본질이자 그 자신이 외교관으로서 일관되게 추구해온 방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옥 건축과 스위스 건축 원칙에서 영감을 받아 디자인한 주한 스위스대사관 건물. ⓒ 주한 스위스대사관
스위스와 한국은 지리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거리가 먼 나라처럼 보입니다. 그런데도 두 나라 사이에는 생각보다 깊은 연결이 있지요. 스위스와 한국은 제약과 바이오테크, 첨단 제조업 같은 분야에서 강력한 역량을 보유하고 있으며 혁신에 대한 높은 의지를 공유한다는 점에서 매우 자연스러운 협력 기반을 갖추고 있습니다. 스위스는 세계지식재산기구 글로벌 혁신 지수에서 15년 연속 1위를 기록하고 있고, 한국 역시 세계적인 혁신 강국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죠. 이 공통의 강점이 양국 협력의 자연스러운 출발점이라 생각합니다.
한국과의 산업 협력은 실제로 어떻게 이뤄지고 있나요? 대표적인 사례가 수소 분야입니다. 현대자동차는 스위스 파트너들과 협력해 수소 모빌리티 생태계를 구축해왔으며, 현대의 수소 트럭은 현재까지 스위스에서 2천만km 이상을 주행했습니다. 제약·바이오 분야에서도 한국보건산업진흥원과 스위스국립과학재단 간에 의향서가 체결되었고,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과 이노스위스Innosuisse의 공동 R&D 프로그램도 추진 중이에요. 앞으로는 친환경 기술과 인공지능, 사이버 보안, 나아가 양자·우주 기술 분야에서 협력이 더욱 확대될 것이라 기대합니다. 다가오는 ‘스위스-한국 이노베이션 위크 2026’이 그 구체적인 플랫폼이 될 예정이고요.
스위스의 ‘중립성’은 어떻게 기능하나요? 무관심 혹은 소극성으로 오해받는 경우도 있을 것 같습니다. 중립성은 결코 무관심이나 소극성이 아닙니다. 오히려 국제사회에서 일관되고 신뢰할 수 있는 방식으로 참여하도록 이끄는 기반이 되지요. 스위스는 특정 군사 블록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정직한 중재자’로 인식됩니다. 외교 관계가 단절된 국가 사이의 채널을 지원하고, 협상 장소를 제공하며, 인도주의 원칙을 지정학적 이해관계 없이 일관되게 지지할 수 있죠. 한국과의 관계에서도 스위스는 오랫동안 중립국감독위원회(NNSC) 일원으로서 정전협정을 감시해왔으며, 이는 중립성이 실제적이고 지속적인 역할로 이어진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궁극적으로 스위스의 중립성은 고정된 개념이 아니에요.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끊임없이 적응해나가고 있습니다. 지정학적 긴장과 분열이 심화되는 오늘날 그 가치는 오히려 더욱 커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학, 시계 산업, 디자인까지 스위스를 관통하는 ‘정밀함’이라는 가치가 삶의 방식으로는 어떻게 나타난다고 생각하시나요? 스위스에서 정밀함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삶의 태도에 가깝습니다. 장인 정신과 서비스, 심지어 일상적인 인간관계에 이르기까지 품질과 신뢰, 세심함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고방식을 지향하죠. 교통 시스템의 정확성은 효율의 문제가 아니라 타인의 시간을 존중하는 태도이고, 스위스 디자인이 과도한 장식 대신 명확성과 절제된 우아함을 선택하는 것도 같은 철학에서 비롯됩니다. 여기에 지속 가능성이 더해지고요. 일시적인 유행보다 오래 사용할 수 있는 것을 만드는 것, 그것이 제가 생각하는 스위스 라이프스타일의 본질입니다.
스위스 문화 콘텐츠에 대한 한국의 반응은 어떻게 느끼시나요? 매우 따뜻한 반응을 얻고 있습니다. 특히 스위스 디자인은 ‘Less but better’라는 철학이 한국 사회의 미적 감각, 세심한 장인 정신에 대한 가치관과 일맥상통해 강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올해 광주비엔날레에서 스위스 예술위원회 프로 헬베티아 Pro Helvetia가 위촉한 스위스 파빌리온이 베니스 비엔날레 외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선보이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의미 있는 사례입니다. 스위스 미식과 와인 역시 한국의 파인다이닝 문화 속에서 점점 더 주목받고 있어요. 무엇보다 이러한 교류가 일방향적인 소개에 그치지 않고 서로 간의 대화와 협업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 고무적입니다.
대사관 건물은 한국과 스위스의 건축 언어가 공존하는 공간으로도 잘 알려져 있죠. 한옥 건축과 스위스 건축 원칙에서 영감을 받아, 단순한 병치가 아닌 두 문화 간의 ‘대화’를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그 중심에는 ‘존중’이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한국의 건축 유산에 대한 존중, 그리고 외교란 말이 아니라 공간과 존재감을 통해서도 전달된다는 생각이 담겨 있죠. 건물 안에는 대사관 본부 외에도 스위스무역투자청과 과학기술협력실, 스위스관광청이 함께 들어서 있으며, 태양광 패널과 지열 냉난방, 빗물 재활용 시스템 등 지속 가능한 설계도 구현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생활하며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은 점이 있다면요? 저는 스스로를 진정한 K-컬처 애호가, 어쩌면 약간의 ‘K-컬처 중독자’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영화와 드라마, 음악은 물론 디자인, 패션, 뷰티, 음식에 이르기까지 한국 문화가 보여주는 창의성과 글로벌 영향력에 계속해서 감탄하고 있습니다. 특히 빠른 추진력과 전통에 대한 깊은 존중이 공존한다는 점이 매우 인상적이에요. ‘빨리빨리 정신’이라고 표현하는 그 역동성 속에서도, 서로를 세심하게 배려하는 따뜻한 문화가 존재합니다. 한국에서의 삶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부분이지요.
대사님이 생각하시는 ‘진정한 럭셔리’란 무엇인가요? 매우 조용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거의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러운 것이죠. 모든 것이 딱 맞아떨어지는 공간에 들어섰을 때 느껴지는 감각이랄까요. 빛과 비율, 소재까지 모든 것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상태 말입니다. 저는 스위스 특유의 정밀함을 중시하는 환경 속에서 자라며 ‘오래 지속되는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도록 배웠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럭셔리는 ‘시간’과도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누군가가 무언가를 훌륭하게 만들기 위해 투자한 시간 그리고 그것이 다시 우리에게 돌려주는 시간. 저는 소재와 목적, 그리고 스토리가 자연스럽게 일치하는 정직한 것들에 끌립니다.
THE AMBASSADOR’S COLLECTION
주한 스위스대사관에서 발견한 나딘 올리비에리 로자노의 취향 가득 소장품.

플롱크 & 르플롱크Plonk & Replonk의 난쟁이 오브제
스위스 현대미술계에서 가장 독특한 예술가 집단 중 하나로
스위스 사회의 고정관념과 국가적 신화를 유머로 해체한다.

(위) 르네 레비Renée Levi의 추상회화 스위스를 대표하는 현대미술가 중 한 명으로, 회화와 설치미술의 경계를 허무는 작업으로 유명하다. 강렬한 색채와 대형 붓질 등의 신체적 제스처를 강조한다
(아래) 코스로 하산자데Khosrow Hassanzadeh, ‘Ready to Order’ 시리즈 이란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으로, 팝아트의 시각언어를 통해 전쟁, 종교, 계급, 여성, 정체성 등 이란 사회의 민감한 문제를 다룬다.

(왼쪽)
(오른쪽) 엘리엇 어윗Elliott Erwitt의 스누피 사진
20세기의 대표적 다큐멘터리 포토그래퍼.
유머와 인간미가 담긴
흑백사진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스위스 카우벨Swiss Cowbell 오브제 알프스 목축 문화의 상징이자 스위스의 역사와 정체성을 대표하는 문화 아이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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