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 2024년 5월호

책에 진심인 편

패션·뷰티 브랜드의 책 사랑이 깊어지고 있다. 손으로 직접 보고 만지는 아날로그 방식은 고객들에게 다각적인 경험을 제공하고, 브랜드 스토리텔링을 효과적으로 구축한다.

EDITOR 박이현

CHANEL, LIBRAIRIE 7L

“무언가를 안다는 건 큰 호사입니다. 책은 가장 좋은 친구이자 가장 매혹적인 즐거움을 주는 친구죠. 그래서 텍스트와 시각적 아름다움이 끝없이 펼쳐진 공간에서 아직 발견되지 않았거나 잊힌 부분만 골라 읽습니다.” 칼 라거펠트의 유산에 샤넬의 브랜드 정체성만 있는 건 아니다. ‘독서’라는 모범 사례도 남겼다. 그는 독서광으로 잘 알려져 있다. 집에 보유하던 책만 30만 권에 이르렀을 정도. 지적 욕구를 많은 사람과 나누고 싶었던 것일까. 그는 1999년 파리 7구에 직접 서점을 세워 운영했다. ‘리브레리 7L’은 건축·디자인·사진·패션 분야의 책 3만3000권을 소장한 시각예술 전문 서점이다.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디자이너와 패션 하우스가 영감을 어디서 얻었는지, 서로 아이디어를 어떻게 공유했는지 금세 알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입장료와 구독료가 있다는 것. 책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과 대화하며 지적 유희를 누리고 싶다면, 파리에서의 투 두 리스트To do list에 이곳 방문을 꼭 적어놔야 한다.



AĒSOP, LIBRARY


이솝 창립자 데니스 파피티스가 간결하면서 효과적인 메시지 전달을 위해 이솝 우화를 떠올린 일화는 유명하다. 그동안 이솝은 여러 국가에서 다양한 라이브러리 캠페인을 진행해왔다. 작년 봄 서울에서 선보인 ‘이솝 우먼스 라이브러리’가 대표적. 당시 제품을 구매하지 않더라도 한국 여성 작가의 책을 선물한 덕분에 ‘지적 교류를 통한 균형 잡힌 삶’이란 브랜딩을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사회적 소수자를 위한 활동도 눈길을 끈다. 바로 ‘퀴어 라이브러리’다. 올해는 호주 퀴어 축제 기간에 맞춰 개관했는데, 문학을 통해 경계에 도전하고 긍정적 변화를 바라는 작은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는 평가가 잇따르고 있다.



ERD, ANTI PUBLIC LIBRARY


앙팡 리쉬 디프리메Enfants Riches Déprimés(ERD)는 1970년대 프렌치 펑크 스트리트 웨어와 1980년대 일본 아방가르드 패션에 영향을 받은 브랜드다. ERD는 모든 제품을 극소량으로 제작하는 것이 특징인데, 브랜드 정체성처럼 그들의 서점 역시 희소성 있는 서적과 바이닐로 채워져 있다. 파리 마레 지구에 있는 ‘안티 퍼블릭 라이브러리’의 매력은 책과 음악을 즐기면서 내추럴 와인, 사케 등을 마실 수 있다는 것. 마치 18~19세기 문학과 예술을 이야기하며 사교 활동을 했던 살롱을 연상케 한다. 앤티크풍의 인테리어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앙리 레비와 작가 디디에 파우스티노의 협업 작품으로, 시간 여행을 하는 듯한 독특한 분위기를 선사한다.



YSL, SAINT LAURENT BABYLONE


2023년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영화 <Strange Way of Life>로 패션 하우스 최초의 영화 제작사 설립을 알린 생 로랑이 도서 시장에 진출했다. 지난 2월 파리 7구에 문을 연 ‘생 로랑 바빌론’이 그 주인공. 때마침 2024 F/W 파리 패션위크가 열린 덕분에 생 로랑 바빌론은 오픈하자마자 전 세계 패션 피플의 필수 코스로 단번에 자리 잡았다. 기존 생 로랑 매장을 서점으로 탈바꿈한 이곳의 이름은 이브 생 로랑과 그의 파트너 피에르 베르제가 세브르 바빌론Sévres-Babylone 지역과 맺은 역사적 인연에서 유래했다. 모든 아이템은 생 로랑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활동 중인 안토니 바카렐로가 큐레이팅했다. 클래식과 모던함을 세련되게 공존시키는 디자이너답게 바빌론은 희귀 도서와 프로토타입 같은 실험적인 출판물, 절판된 음반 등으로 가득하다. 더불어 디제잉 세션과 작가 낭독회도 경험할 수 있다. 전통적 서점을 넘어선, 복합 문화 공간인 셈. 앞으로 생 로랑의 패션 DNA가 아날로그 플랫폼에서 어떤 예술적 확장을 보여줄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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