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 2024년 4월호

따로 그러나 함께

하나의 매체에 집중한 결과물이 전시를 위한 필요조건은 아니다. 효과적인 메시지 전달을 위해 다양한 예술 형식을 융합하는 건 이제 일상다반사다.

EDITOR 박이현




아니 에르노의 글쓰기와 사진, MEP, 파리, 2.28~5.26


“나는 사진가의 눈을 통해 현실을 묘사하고, 내가 마주친 삶의 신비와 불투명성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했다.” 202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아니 에르노Annie Ernaux가 자신의 글쓰기에 관해 설명한 문장이다. 현재 프랑스 파리의 유럽사진미술관Maison Européenne de la Photographie(MEP)에선 아니 에르노의 글과 사진이 만난 전시 <Exteriors - Annie Ernaux and Photography>가 열리고 있다. 큐레이터 루 스토파드Lou Stoppard가 에르노의 저서 <바깥 일기Journal du Dehors>(1993)와 비슷한 결의 이미지들을 미술관 수장고에서 끄집어냈다. 1985~1992년 슈퍼마켓 쇼핑 카트에 담긴 물건들, 지하철역에서 승객들이 주고받는 말 등을 관찰하며 자신과 사회를 고찰한 책 서두에는 “다시 보지 못할 장면, 이름 모를 사람들의 몸짓, 곧 지워질 그라피티들을 그대로 기록하고 싶었다. 이렇게든 저렇게든 내 마음속에 어떤 감정, 동요 혹은 반발을 촉발하던 그 모든 것을”이라고 적혀 있다. 그래서일까. 전시장을 수놓은 사진들은 일상의 편린을 보는 것 같다. 흥미로운 점은 모리야마 다이도Moriyama Daido, 돌로레스 마라Dolorès Marat, 해리 캘러핸Harry Callahan 등 사진가 29명이 촬영한 사진 150점이 1940년부터 2010년 사이에 촬영됐다는 것. <바깥 일기>를 읽었다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사진들인데, 이 대목에서 예술이란 매체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영원히 연결되는 것인지 다시금 질문하게 된다.




소외된 모두 한보 앞으로, 모리 미술관, 도쿄, 4.24~9.1


건축, 공연, 도자, 패션 등을 융합한 작업으로 소외된 흑인 문화를 이야기하는 시어스터 게이츠Theaster Gates의 일본 첫 개인전. 우리에게는 영국 런던 서펀타인 파빌리언Serpentine Pavilion 프로젝트의 2022년 작품인 ‘블랙 채플Black Chapel’ 작가로 알려져 있다. 아프리카 건축물과 디아스포라 문화, 신성한 종교의식 등을 녹여낸 블랙 채플은 자기 성찰과 공동체 의식의 회복을 지향해 눈길을 끌었던 원통형 구조물. 주지하다시피 최근 미술계의 화두는 단연 흑인 예술이다. 다양성을 추구하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인종차별과 식민주의에서 기인한 그들의 생채기가 매력적인 예술로 승화됐기 때문. 이러한 흐름이 드디어 일본에 상륙한다. 모리 미술관Mori Art Museum에서 열리는 <Theaster Gates: Afro-Mingei>의 목표는 시어스터 게이츠의 작품 전반을 조망하고, 인종적·정치적·문화적 혼종성 등 현대미술에서 자주 다루는 개념을 일본 미술 신에 전달하는 것. 하지만 일본인들은 아직 흑인 문화를 낯설어하기에 작가는 ‘아프로-민예Afro-Mingei’를 고안했다. 실용적인 물건에서 아기자기함을 찾는 일본 공예 철학과 아프리카 미학을 결합한 아프로-민예는 오랜 시간 주변부에 머물렀던 두 지역의 문화를 존중하고 연대하는 데 의의가 있다. 어쩌면 검은 것은 아름답다며 백인 중심 사상에 반기를 든 개성 넘치는 흑인 문화와, 기존 관념과는 다른 미美를 품은 예술로 여겨지는 일본 민예의 만남은 필연일지도 모르겠다.




전위예술의 선구자, 테이트 모던, 런던, 2.15~9.1


존 레넌의 아내로 더 익숙한 일본 음악가이자 평화운동가, 플럭서스를 대표하는 예술가 오노 요코Ono Yoko. 그의 작업은 급진적이면서 시적이고, 심오하면서 유머러스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런 작가의 70년을 집대성한 <Music of the Mind>가 영국 런던 테이트 모던Tate Modern에서 진행 중이다. 전시는 오노의 1971년 앨범 의 마지막 트랙인 ‘Telephone Piece’ 속 “여보세요! 요코입니다(Hello! This is Yoko)”라는 인사로 시작한다. 일견 관객을 반갑게 맞이하는 것 같지만, 반전은 늘 있는 법. 이내 기침과 울음소리, 비명이 들려온다. 참으로 플럭서스Fluxus(1960~1970년대 기존 예술과 문화를 거부했던 국제적 전위예술 운동)다운 환영 인사다.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 200여 점의 사진·악보·영화·음악 작품 속에서 온갖 상상력을 동원하고 체득해야 작가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그중 핵심은 1966년부터 5년 동안 런던에 머물면서 제작한 결과물들. 흐르는 시간 속에서 존재는 과연 무상한 것인지를 고민하게 하는 ‘Apple’(1966), 경쟁(전쟁)이 아닌 협력(평화)을 강조하려 모든 체스 말을 흰색으로 만든 ‘White Chess Set’(1966), 반으로 자른 가정용품을 통해 물질적인 것의 무의미함을 표현한 ‘Half-A-Room’(1967)이 대표적이다. 이 외에도 는 차별과 혐오에 반대하는 작품들로 구성되는데, 이는 사회의 평화를 위해 개인의 평안을 바라는 오노 요코의 마음을 반영한 듯하다.




너와 나 그리고 우리, 함부르거 반호프, 베를린, 4.25~10.6


스위스 하이엔드 워치 브랜드 오데마 피게와 협업하는 행위 예술가로 유명한 알렉산드라 피리치Alexandra Pirici. 우리나라에선 울산시립미술관 개관전 <포스트네이처: 친애하는 자연에게>(2022) 당시 인간과 생태가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의 세계를 그려낸 퍼포먼스 ‘테라폼Terraform’으로 관객의 적극적 참여를 끌어낸 바 있다. 제59회 ‘베네치아 비엔날레’(2022)에선 기술과 인간, 바위와 파도, 동물과 식물 같은 추상적 관계, 개인 간 공생 혹은 기생적 관계에서 영감을 얻은 퍼포먼스 ‘관계의 백과사전Encyclopedia of Relations’으로 인간의 상호 연결성을 강조하고, 지식이란 늘 변화하고 진화하는 존재임을 피력해 전 세계 미술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동시대 공연 예술을 논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알렉산드라 피리치가 올 봄과 여름 독일 베를린 국립미술관 함부르거 반호프Hamburger Bahnhof에서 새로운 작업을 공개한다. 장소 특정적 퍼포먼스 ‘조율Attune’은 미술관 중앙 홀을 공연자와 관객이 물리적·화학적 반응, 소리, 움직임 속에서 복잡한 구조를 만드는 활기찬 공간으로 탈바꿈할 예정. 이번 공연 역시 서로 다른 이해가 실현되는 이종성異種性을 주제로 내세운다. 몸짓과 언어, 음악, 조각을 아우르는 작가답게 작품은 물리적·수학적·사회적 자기 조직화 과정(자기 스스로 학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시화해 관객으로 하여금 생물과 무생물 사이의 관계를 성찰하게 할 계획이다.




아방가르드 미술의 전설, MoMA, 뉴욕, 3.17~7.6


미국 아방가르드 미술의 전설이라 불리는 조앤 조너스Joan Jonas. 그는 20세기 중반 클라스 올든버그Claes Oldenburg, 로버트 라우센버그Robert Rauschenberg, 시모네 포르티Simone Forti, 이본 레이너Yvonne Rainer, 존 케이지John Cage 등과 교류하면서 다양한 매체를 실험해온 작가다. 그의 작업 특징은 상징과 은유로 가득하다는 것. 그래서 작가의 의도를 이해하려면 고뇌와 고민을 거듭해야 한다. 현재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Museum of Modern Art(MoMA)에선 미디어와 퍼포먼스를 결합한 작품으로 현대미술사에 신선한 충격을 안긴 조앤 조너스의 회고전 <Good Night Good Morning>이 개최되고 있다. 시와 조각, 영화, 춤의 차이를 잘 느끼지 못했다는 작가의 말처럼, 전시는 지난 50여 년간 드로잉과 비디오, 설치, 퍼포먼스를 넘나들며 고찰한 공간과 시간, 신체, 자연의 연결 고리를 살펴보는 데 방점을 찍는다. 그중 눈여겨봐야 할 작품은 16mm 필름을 이용해 강풍에 맞선 사람들을 기록한 1968년 영상물. 카메라 앞에서의 퍼포먼스, 공간을 조작하고 파편화하기 위한 거울 사용 등 조앤 조너스 작업에서 왕왕 발견되는 요소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작가의 초기 영상물이 조앤 조너스 아방가르드 미술의 시발점이자 총체라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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