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 M> 2024년 3월호

디지털 시대, 이미지의 무한 변주

쏟아지는 이미지의 파도 위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항해하며 새로움을 길어 올리는 안태원 작가의 흥미진진한 세계. 그리고 그 물결이 넘실대는 생동감 넘치는 작업실을 찾아서.

EDITOR 이연우 PHOTOGRAPHER 유한솔


오늘날 수없이 생성되고, 갱신되고, 변주되고 또 사라지는 디지털 이미지들. 일상 속에서 다양하게 마주하는 이 디지털 이미지들을 우리는 어떻게 경험하고 소비하고 있을까? 디지털 ‘밈 meme’을 적극 활용해 자신만의 독특한 작업 세계를 선보이고 있는 안태원(뿌리ppuri) 작가는 동시대 미술을 이해하는 데 반드시 주목해야 할 창작자 중 한 명이다. 그는 이른바 ‘밈’이라 불리는 디지털 이미지를 재구성해 생산·공유한다. 디지털 감수성을 바탕으로 가상공간의 시각적 경험을 현실에서 변형·왜곡해 새롭게 선보이는 것. 그의 대표작 ‘Hiro is Everywhere’ 시리즈를 비롯해 가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감각의 물질들이 회화, 조각, 설치 작업 등 다채로운 형태로 탄생하고 있다.

경계를 가르지 않는 그의 작품들은 그 작품을 꼭 닮은 자유로운 분위기의 신도림동 작업실에서 태어난다. 합리적인 비용은 물론 동네의 독특한 분위기에 매료돼 공장과 작업실이 즐비한 이곳에 자리를 잡은 것이 약 3년 전. 조각을 하는 동료 작가들까지 모두 5명이 작업실을 공유하고 있다. “이 근처에 공장이 많아서 다양한 재료를 구하기에 좋아요. 작업실을 같이 쓰는 친구들은 모두 같은 학교 출신인데 각기 다른 색깔의 작업을 하고 있어요. 닮은 듯 다른 듯, 서로의 작업을 보며 좋은 영향을 주고받게 돼요. 원래 저는 회화 전공인데 이 친구들과 함께하면서 자연스럽게 고양이 ‘히로’의 1호 조각을 만들게 됐어요. 작업의 영역을 확장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죠.”

각종 재료와 작업물로 발 디딜 틈 없이 빼곡한 작업실은 안태원 작가를 비롯한 동료 창작자들의 형형색색 아이디어로 가득하다. 특별한 일정이 있지 않는 한 거의 종일을 이곳에 머물며 다양한 상상의 향연을 펼친다. 떠오르는 대로 여러 작업을 동시에 진행하기도 하지만 작업 기간은 그리 길지 않다. 일상생활에서는 웬만해선 쉽게 발동되지 않는 집중력이 이곳 작업실에서 작업 도구를 잡는 그 순간부터는 무섭게 작동한다. “작업실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더럽힌 곳’이죠. 처음에는 작업 과정에 따라 공간을 구획해 사용할까 계획하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내키는 대로 자유분방하게 쓰고 있어요. 에어브러시로 잉크를 분사해 그림을 그리다 보니 먼지도 계속해서 쌓이고요. 다양한 물감 분진이 몇 년간 쌓이면서 원래의 색을 알 수 없는 지금의 모습이 되었어요. 벽과 바닥의 구분이 없어질 만큼요. 이곳의 색이 퇴색되고 집기가 스러지는 만큼 저의 세계는 넓어지고 있단 생각을 해요. 앞으로 이곳을 더욱 두텁고 빽빽하게 채워야죠.”


히로 그리고 동료들의 모습을 옮겨 만든 조각.


삶에서 자신이 가장 즐겁고 좋아하는 일을 찾고 싶었다는 안태원 작가는 거창한 의미를 좇기보다는 순간의 생각과 감상에 충실한 작품을 만든다. 어엿한 ‘밈 스타meme star’가 된 히로 역시 귀엽고 사랑스러운, 한편으로는 낯설고도 장난스러운 매력이 넘친다. 가상과 현실, 그 간극에서 발생하는 정서적 경험이 또 다른 영감을 자극하는 것. 그의 작품은 그래서 감상, 그 후가 더욱 중요하다. 안태원의 히로가 나의 히로로, 나아가 누군가의 특별한 히로로 계속해서 생을 이어가는 것이다. 그는 지난 2월, 런던에서 열린 아트페어 에 참여해 관객들을 만나고 왔다. 적극적으로 작품을 감상하고 또 작가를 만나 다채로운 질문을 쏟아내는 관객들을 통해 일상과 괴리되지 않는 생활 속 예술의 중요성을 깊게 실감했다. 향후 나아가야 할 작업 방향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고민해보는 기회가 되었다. “생성된 이미지가 사람들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자리하고 또 재생산될지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어요. 가공되고 변형된 뒤 남은 이미지들의 생명에 대해서도요. 앞으로 더 많은 고민이 덧입히겠지만 현재로서는 히로 외에도 다른 생명체나 일상 속 다양한 요소를 주인공으로 한 작업도 계획하고 있어요.” 오래도록 ‘즐기는 작업’을 이어가고 싶은 안태원 작가의 목표는 ‘뻔하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단순히 새로움을 추구한다거나 시류에 몸을 맡긴다는 뜻이 아니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안태원’이라는 인장이 명확하게 새겨지는 것, 시간이 흘러도 자신만의 또렷함을 유지하는 것, 멈추지 않고 분명한 색깔을 내는 것이 그가 바라는 내일의 모습이다.


다양한 형태로 작업한 캔버스 위에 에어브러시로 잉크를 분사해 독특한 느낌의 작업을 완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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