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 2024년 3월호

THE ULTIMATE ARCHITECTURE

비록 가상의 건축물로 남았으나 건축가의 우주가 응축되어 그 자체로 건축적 사유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작품 6점을 소개한다.

EDITOR 정송

HELSINKI GUGGENHEIM 마크 포스터 게이지


2014년 핀란드 헬싱키 구겐하임 미술관 공모전을 통해 공개한 작품은 그야말로 실험적인 제안 그 자체였다. 미술관과 박물관 건립 프로젝트는 그간 건축가들에게 중요하고 진보적인 건축 혁신의 현장이 되어왔다. 마크 포스터 게이지는 이를 십분 활용했다. 그는 도시 해안가에 약 1만2000m² 부지를 활용한 건축물을 선보였는데, 이는 온라인에서 무작위로 다운로드한 사물을 3D로 모델링한 일명 ‘재활용 디지털 자료’로만 구성한 연구 프로젝트의 일환이기도 하다. 게이지는 ‘키트 배싱kit-bashing’이라고 하는 고해상도 이미지 재조합 방식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건축 미학을 창출할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게이지는 프로젝트에 대해 ‘무엇이든 가장 좋아 보이는 것’을 만들었고 이를 위해 ‘어떠한 시스템 없이 직관적인 무작위’로 작업했다고 밝힌 바 있다. ‘스타일의 과잉’ 혹은 ‘조각적 우화’이자 ‘조각’ 그 자체로도 읽을 수 있는 그의 작품은 디자인의 순수성을 강조한다. 그는 건축가들이 행위에 이유를 제시하는 데 너무나 익숙해져 있다는 점에 안타까움을 표했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게이지는 건축물이 클라이언트와 대지, 프로그램 특성 등 주어진 건축 외적 요인에 많은 영향을 받는 현실을 우아하게 지적했다. 그리고 마치 예술 작가가 작업하듯이 건축가의 창의성이 오롯이 발현됐을 때 어떠한 건축물이 만들어질 수 있는지 증명해 보였다. 게이지가 제시한 헬싱키 구겐하임 미술관은 단순히 가상에만 남을 건축물이 아니다. 그는 현재 가상의 건축을 3D 프린팅 모델이나 로봇 석재 조각을 통해 실제로 구현하는 방법에 대한 연구도 지속하고 있다. 다시 말해 순수 디자인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를 실현하고자 하는 건축가로서의 열망을 가감 없이 뿜어내고 있다는 뜻이다.



TOUR SANS FINS 장 누벨


장 누벨이 맥락과 개념에 관심이 많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라데팡스La Dfense 지구 초기 계획의 일환으로 1989년부터 1992년까지 작업한 ‘투르 상 팡’에서 그는 어느 때보다 이 2가지가 중요하게 작용했음을 강조했다. 투르 상 팡은 수직성이 특징인 건축물이다. 높이 약 425m의 원통으로 이뤄진 타워는 아랫부분이 어둡고 위로 올라갈수록 투명해진다. 누벨은 ‘끝없다’는 말의 뜻에 대해 고심했다. 그 해답을 ‘한계를 읽을 수 없음’에서 찾은 그는 ‘아래로는 지구의 중심에서 시작해 위로는 하늘에 맞닿아 끝이 보이지 않는 건축물’이라는 콘셉트를 통해 실현 가능성을 모색했다. 장 누벨은 이 프로젝트를 통해 순수해 보이는 형태가 실은 가장 밀도가 높고 가장 복잡하다는 모순에 대해 논했다. 형태를 단순하게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또한 건축물의 형태와 지어지는 방식뿐만 아니라 그것이 주변 환경과 어떻게 조우하고 또 공명하는지도 중요한 문제였다. 장 누벨은 파리 지도를 펼쳐놓고 투르 상 팡이 어느 위치에서 보이는지, 기후와 날씨에 따라 어떠한 형태로 보이는지 등의 시뮬레이션을 거쳤으며, 건축물 내부 공간 엔지니어링의 위험 요소까지 자체적으로 수학적 계산을 마쳤다. 하지만 만반의 준비에도 경제적·기술적 이유 등으로 프로젝트 자체가 무산되며 아쉬움을 남겼다. 장 누벨의 투르 상 팡은 어딘지 모르게 <성경>에 등장하는 ‘바벨탑’을 연상하게 한다. 하늘 높이 닿아 땅끝을 내려다보며 살고자 하는 마음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이 프로젝트 이후 누벨은 다양한 고층 건물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아직 투르 상 팡에 미치지 못하지만, 그는 여전히 하늘 높이 닿고자 하는 욕망을 조금씩 채우는 중이 아닐까.



TRÈS GRANDE BIBLIOTHÈQUE OMA


1975년 네덜란드 로테르담에 ‘대도시 건축을 위한 사무소Office for Metropolitan Architecture’라는 뜻을 지닌 건축사무소 OMA를 설립한 렘 콜하스. 대량 소비 시대의 대중이 가진 욕망을 건축에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건축의 가능성을 극한으로 끌어낸 인물이다. 그는 아름다움을 모색하는 것이 자신의 일차적 관심사가 아님을 분명히 밝히며 현대 대도시와 건축을 진단하는 실험적 행보를 이어왔다. ‘트레 그랑드 비블리오테크(이하 TGB)’는 OMA가 1989년 프랑스 파리 도서관 공모전에 참여하며 선보인 작품이다. 도서관이 그 자체로 하나의 데이터베이스가 되도록 만드는 것이 미션이었다. 이를 위해 렘 콜하스는 ‘보이드 전략Strategy of Void’이라는 새로운 설계 방식을 도입했다. 그는 먼저 건축 전체를 도서 아카이브로 가득 들어찬 박스 형태의 ‘솔리드’ 찰흙 덩어리라고 상정하고, 여기에서 로비, 열람실, 강연장 등의 필요 공간을 파내 ‘보이드’를 형성하는 식의 설계 방법을 개발한 것. 근대건축까지의 역사는 무거운 것을 최대한 가볍게 만들기 위한 노력의 응집이라고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로마네스크, 고딕을 거쳐 르 코르뷔지에의 필로티 구조에 이른 것처럼 말이다. 다시 말해 건축의 역사는 솔리드 자체를 만드는 일에 중점을 두었다. 콜하스는 이를 전복시켜, 솔리드가 아닌 우리에게 필요한 내부 공간, 즉 보이드를 건축함으로써 새로운 시대의 건축이 지향할 바를 역설했다. 오랫동안 이어진 사유의 전환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렘 콜하스는 이를 멋지게 해냈으며, 오늘날의 건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까지 했으니, 세계적인 건축가들의 소위 ‘언빌트 프로젝트’ 가운데서도 TGB가 항상 회자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테다.



TOMIGAYA BUILDING 자하 하디드


여성 건축가 최초로 ‘프리츠커 건축상Pritzker Architecture Prize’을 수상하며 역사에 이름을 올린 자하 하디드. 유려한 곡선과 자유롭게 꺾이는 선을 활용해 일반적인 형태에서 벗어난 해체주의적 건축을 선보인 그는 지금까지 주변 환경과 동시다발적으로 상호작용하는 작업을 펼쳐왔다. 자하 하디드는 1980년 ‘자하 하디드 아키텍처’를 설립했지만, 첫 건축물을 올리기까지 무려 14년이 걸렸다. 그사이 굉장히 많은 기회가 있었지만 아쉽게도 공사로 이어지지 못하고 많은 설계가 도면으로만 남았다. 자하 하디드는 1986년 일본의 도쿄를 배경으로 한 ‘도미가야 빌딩’ 프로젝트를 통해 건축물과 외부 거리 관계를 ‘비정상적’으로 엮으며 혼잡한 도시의 환경에서 일종의 해방감을 제공하는 시도를 했다. 이를 위해 하디드는 압축된 유리 파빌리언을 부지에서 공중으로 띄워, 정지해 있으면서도 역동적인 작은 보이드 도시 공간을 창출했다. 건축물의 주요 부분은 지면 아래에 위치하며, 높은 유리 벽을 사용해 아래쪽으로도 빛이 스며들 수 있는 구조로 설계했다. 건물은 상승과 하강의 동선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지상에서 중간의 외부 플랫폼을 거쳐 유리 파빌리언까지 율동감 있게 이어지며, 지상에서 지하로 이어지는 외부 계단은 폭이 넓어져 지하로 침잠한 외부 플랫폼으로 기능한다. 이로써 지상에 떠 있는 유리 파빌리언의 하부를 올려다볼 수 있게 설계되었다. 또한 지하층부터 높이 올라간 파빌리언까지 다양한 생활양식에 맞춰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뒀다. 도미가야 빌딩은 비록 짓지 못한 프로젝트로 남았으나, 이는 곧 하디드의 중요한 실내 프로젝트이자 첫 번째 프로젝트로 이름을 올린 ‘몬순 레스토랑’(1989)으로 이어지는 발판이 됐다.



THE MAX REINHARDT HAUS 피터 아이젠먼


체계적이면서 형식적이고 개념적인 건축 작업을 전개하는 피터 아이젠먼이 1992년 공개한 ‘막스 라인하르트 하우스’는 상징적이면서도 오락적인 특징을 지닌 건축 프로젝트다. 여기에 깃든 가장 큰 상징성을 꼽자면 ‘미래지향성’이다. 이를 통해 아이젠먼은 베를린과 독일의 미래를 그려보고자 했다. 피터 아이젠먼은 미래지향적 형태에 도시 맥락에 의해 다변하는 프로그램을 유연하게 수용할 수 있는 건축물을 설계하고자 했다. 건축물은 그 자체로 접히고 맞닿으면서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다면체적인 면모를 유지하는 독특한 형태로 탄생했다. 아이젠먼은 외관과 내부 공간 구성에 각각 플레이트형과 큐브형이 유닛이 되는 다이어그램을 사용했다. 뫼비우스 띠를 만든 후 이 띠의 중심축을 따라 플레이트와 큐브를 회전 배치했고, 이를 삼차원으로 연결해 형태를 만들었다. 이때 플레이트로 형성된 삼차원은 건물의 외피가 되고, 큐브로 만들어진 삼차원은 건물의 내부 공간이 됐다. 이는 ‘커튼월’ 건물의 형식이 전위적으로 변형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데, 외피는 커튼월 건물의 유리 파사드로, 내부는 커튼월 건물의 내부 공간으로 대치해서 이해할 수 있다. 기술이 발전한 지금에야 컴퓨터와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으로 작업하는 것이 건축가에게 익숙한 시대지만, 아이젠먼이 막스 라인하르트 하우스를 공개한 1990년대 이는 새로운 시도였다. 그는 매우 발 빠르게 삼차원 모델링 프로그램을 활용해 새로운 형태적 실험을 시도한 현대건축가 중 하나였던 셈. 막스 라인하르트 하우스는 그가 지금까지 선보인 프로젝트 가운데서도 이론가이면서 디지털 시대에 빠르게 대응한 진보적 건축가인 그의 진면목을 가장 잘 드러내는 프로젝트가 아니었을까.



PIG CITY MVRDV


때는 2000년, 건축 스튜디오 MVRDV는 혁신적인 가상 건축 프로젝트 ‘피그 시티’를 공개했다. 일명 ‘렘 콜하스 키즈’로 불리는 비니 마스Winy Maas, 야코프 판레이스Jacob van Rijs, 나탈리 더프리스Nathalie de Vries가 1991년 조직한 MVRDV 스튜디오는 한 가지 망상에서부터 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당시 전 세계적으로 돼지고기는 연간 800억kg가량 소비되는 육류였는데, 사육 환경을 비롯한 먹거리 문제가 대두되었고 어떻게 하면 이를 더 인도적이며 효율적으로 생산할 수 있을지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했다. 이들의 가정은 네덜란드에서 출발했다. 당시 네덜란드에는 공식적으로 1520만 마리의 돼지와 1550만 명의 인간이 거주했는데, 돼지 한 마리를 식품으로 가공하기 위해서는 664m²의 면적이 필요했다. 네덜란드의 75%가 돼지 사육 환경 조성에 활용되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전망이었다. 이에 MVRDV는 돼지와 농부 모두 쾌적하게 일하고 여생을 보낼 수 있는 자급자족 아파트형 농장을 제안했다. 인도적인 방식을 통해 고기의 품질을 향상하고, 환경오염이나 불필요한 운송·유통의 필요성도 없애는 등 비용 절감까지 이룰 수 있음을 강조했다. 사실 이 프로젝트는 네덜란드같이 작은 나라가 향후 지속적인 인구 증가에 따른 공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에 대한 연구의 일환이었다. MVRDV는 도시 주의가 지속 가능한 미래를 막는 도구라고 믿는다. 토지가 무분별하게 소비되는 것, 즉 도시가 우후죽순으로 확산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선 ‘밀도’가 무엇보다 중요할 수밖에 없다. 피그 시티는 말 그대로 이런 도시화에 대한 MVRDV의 사유를 전혀 무겁지 않게 재치 있는 방식으로 풀어놓은 가상 건축의 표본인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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