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 2024년 3월호

역설逆說과 역설力說 그리고 결국 예술

프랑스 현대미술 작가 에티엔 샴보가 에스더쉬퍼 서울을 찾았다. 1층부터 3층까지 고루 펼쳐진 전시장을 통해 그가 얼마나 전방위적인 예술가인지 엿볼 수 있다. 전시는 3월 9일까지.

EDITOR 정송 PHOTOGRAPHER 이우경

에티엔 샴보  1980년 프랑스 뮐루즈에서 태어난 작가는 스위스 로잔 예술대학과 프랑스 니스 빌라 아르송, 리옹 에콜 데 보자르에서 예술을 공부한 파리 고등사범학교, 파리 에콜 데 보자르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파리를 거점으로 작업을 펼치고 있다. 그는 하나의 매체와 주제에 천착하지 않고 우리의 경험, 물건, 규율 등에 부여하는 의미와 범주를 탐구하며 작품 세계를 넓혀나간다. 프랑스와 스위스, 독일, 영국, 이탈리아, 스페인, 오스트리아, 미국 등 세계 유수 기관에서 다수의 개인전과 그룹전을 열었다.


에티엔 샴보에 대해 들어본 적 없더라도 괜찮다. 이번 전시가 그의 넓고 깊은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기 때문. 에스더쉬퍼와 함께하는 세 번째 전시 <프리즘 프리즌Prism Prison>을 통해 샴보는 자신의 작품 세계를 집약적으로 소개한다. 먼저 에티엔 샴보는 1층부터 3층까지 마련된 전시장을 고루 사용한다. 층마다 다른 매체를 활용하고, 시공을 넘나드는 듯한 기분을 선사하지만 결국 이를 통해 선보인 작품들은 그가 장난하듯 내뱉은 ‘프리즘의 감옥’처럼 다방면에서 우리를 옭아맨다. 작가의 작업 전반에서는 예술과 작품을 재정의하고자 하는 그의 의지가 뿜어 나온다. 샴보는 작품과 전시, 그리고 이를 관람하는 관람객의 일반적인 경험 사이에 발생하는 일종의 ‘모순’을 표현하고자 한다고 말하는데, 이 모순은 작품 하나하나에 드러나는 ‘역설’적인 면모에서부터 시작된다. 원래 ‘그러한 것’을 전복하고, 자신만의 미적 감각을 더해 본질을 드러내면서도 새로운 것을 관람객에게 제안하면 사람들 역시 그에 화답하거나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응답하는데, 이 모든 게 모순적인 관계에 속하는 것. 에티엔 샴보는 작품과 그것이 놓인 전시 공간 모두를 하나의 큰 제스처로 바라본다. 어떻게 보면 개념으로 무장한 작업들이지만 그렇다고 아름다움을 놓치지도 않는다. 동물의 오줌으로 작업한 ‘Nameless’ 연작, 양말을 마치 뭉쳐놓은 것처럼 만든 ‘Topos’ 연작, 오리와 거위, 백조 등 다양한 새의 ‘목’ 부위를 재현해 수학적인 매듭으로 표현한 청동 조각 시리즈 ‘Necknot’ 등 주위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일상적 사물과 동물 그리고 인간 사이의 연결 고리를 아름다운 방식으로 전복한 메시지를 전달하며 예술가로서의 역할에 충실히 따른다. 이처럼 어느 매체 하나에 머무르지 않고 다양한 아이디어를 실험하며 이콘화부터 네온사인 작업까지 모두 아우르는 샴보. ‘나는 무엇을 하는 작가다’라고 규정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그는 자신이 열 수 있는 모든 문을 활짝 열어보이며 다음 작업의 스텝을 준비한다.




이번 전시의 제목 <프리즘 프리즌>이 매우 인상적이다. 전시를 보고 나니 제목이 매우 역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단어의 소리가 매우 비슷하게 들리지 않는가. 말장난하듯이 생각한 제목이다. 실제 공간이 없다는 의미를 지닌 ‘지우기 심벌’과 이를 환히 밝히는 매체인 네온 작품을 통해 공간이 있음을 역설하는 작품 ‘Erasure’(1층)와 어둠 속에 존재하지만, 플래시를 통해 밝은 전시 공간에 있는 것보다 섬세한 부분을 더 잘 볼 수 있는 ‘Untamed’(2층) 시리즈를 생각해보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분절됐지만 여전히 연결되어 있는 말을 통해 모양은 각기 다양해도 결국 하나라는 본질을 가리키는 ‘Zebroid’(3층) 시리즈까지 모두 이어서 보면 ‘역설적인 무엇’에 대해 힘주어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층마다 만나는 작품의 형태와 매체가 달라 당신의 넓디넓은 작업 스펙트럼을 엿볼 수 있다. 공간이 작업에서 차지하는 역할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정의하면 ‘프레임보다는 더, 작품보다는 덜 중요한 역할을 지닌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공간은 하나의 건축물이지만 이 건축물은 전시와 연결되고, 그 전시는 또 작품과 이어지기 때문에 유기적으로 얽힌 관계성을 갖고 있다. 그래서 전시 자체가 공간이나 건축물과 어떻게 어우러지는지 역시 작가인 내게 중요한 부분이다. 하나의 전시가 완성되기까지 수많은 아이디어가 얽힌다. 마치 프리즘 같지 않은가. 작가와 공간, 작가와 큐레이터가 호흡하듯 이 세 부분도 한꺼번에 골고루 엮여야 한다.




2층 전시 공간은 컴컴한 곳에서 마치 탐험하듯 작품을 볼 수 있게 마련됐다. 이러한 감상 방식 덕분에 오히려 작품 하나하나 더 시간을 들여 보게 되는 듯하다. 당신이 의도한 바는 무엇인가?

정확히 맞혔다. 앞서 역설적인 것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나. 이 공간에 선보인 작품은 모두 ‘정교orthodox’와 관련된 종교화, 즉 이콘화다. 이전에 사람만 남기고 모두 지운 ‘Uncreature’라는 시리즈 작품을 선보인 적 있는데, 이곳에서 소개하는 작품은 ‘Untamed’로, 이콘화에서 인물과 배경을 모두 지우고 동물만 남긴 작업이다. 종교화의 배경은 주로 황금색으로 칠해졌다. 나는 이러한 배경을 연장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여전히 인물이나 다른 배경의 디테일한 부분들이 실루엣처럼 남았다. 어둠 속에서 플래시로 이를 비춰보면 좀 더 가까이에서 작품을 들여다보게 되니까 존재하지 않으나 존재하는 것들을 눈치챌 수 있다. 이에 더해 이콘화에서는 원래 중요치 않은 대상을 부각하고, 이들에게 자유를 주고 싶었다. 작가적 상상력이 동원된 전시 방식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사람과 빛이 드나들지 않는 곳에서 이 동물들이 편안히 자유를 누렸으면 하는 마음을 투영하기도 한 셈이다.


이렇게 되면 관람객마다 다른 감상 경험도 할 수 있지 않나?

플래시로 작품을 비추면서 걸어 다니며 보면 당연히 보는 방향에 따라 느낌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밝은 공간에선 45도 각도에서 보나, 정면에서 바라보나 똑같은 작품을 본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직접 라이트를 비춰 보게 되면 작품의 어떤 부분은 도드라지고, 어떤 부분은 상대적으로 어둠 속에 남는다. 그래서 100명의 사람이 작품을 봤을 때 모두 다른 부분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당연히 관람객마다 자신이 본 작품을 다르게 기억할 수밖에 없는 관람 방식이다.


작업의 영감은 어디서 얻는지 궁금하다.

나는 내가 가진 ‘작가적 직관’을 믿고 있다. 예를 들면 ‘Zebroid’에서 초현실주의적이거나 큐비즘적인 부분을 읽을 수 있지만, 그 문법을 완전히 따르고 있다고 말하긴 어렵다. 어디에서나 언제나 작업은 시작될 수 있다. 생각을 환기할 때 무엇을 하느냐는 개인적 질문도 받곤 하는데, 강도는 다를 수 있지만 온전하게 작품 생각을 멈출 수는 없는 것 같기 때문에 이에 대해 명확히 답변할 수 없다. 결국 우리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서 자극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것들이 전체적으로, 또 유기적으로 작업에 영향을 준다.


결국 이렇게 방대한 작품은 어떻게 하나로 엮이는가? 만약 나중에 회고전을 열게 된다면 어울릴 만한 제목이 있을까?

아직 나아갈 길이 많기 때문에 딱 잘라 말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현재 나의 작업을 빗대어 답을 대신해보자면 ‘분리separation’가 아닐까 싶다. 이는 거리distance를 말할 수도 있고 말 그대로 분절된 걸 가리키는 것으로도 해석 가능한데, 따지고 보면 결국은 작품과 전시가 남기는 일종의 ‘제스처’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1층에 설치한 ‘Erasure’를 보면 ‘지우기 심벌’을 통해 공간을 부정하는 제스처이지 않나. 그런데 좀 더 깊이 들어가보면 이는 그 지운 단어, 혹은 공간을 원래 존재하던 곳에서 분리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분절된 말 조각도 마찬가지다. 조각조각 난 작품 그 자체보다는 그것이 분리된다는 아이디어를 통해 종국에 남기는 메시지가 중요한 것처럼 말이다. 그것이 작가인 내가 세상을 보는 방법이고, 이를 자꾸 뒤틀다 보니 역설적인 작품들을 만들 수밖에 없는 것 같다.




COOPERATION  에스더쉬퍼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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