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 2024년 3월호

SHINE, WHILE YOU LIVE

최근 2집 앨범을 발표한 소프라노 박혜상은 이번에도 충실히 자신만의 ‘음악적 자화상’을 써내려가기로 한 듯 보인다. 이번 앨범은 한 인간으로서 감당해야만 하는 실존의 고통을 진지하게 성찰한다.

EDITOR 이연우 GUEST EDITOR 박지혜 PHOTOGRAPHER 양중산

박혜상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를 졸업하고 줄리아드 음악원 석사과정과 전문 연주자 과정Artist Diploma in Opera Studies을 마쳤다. 2015년 몬트리올 국제 음악 콩쿠르와 오페랄리아 콩쿠르 여성 부문에서 모두 2위를 차지했다. 2020년에는 아시아 소프라노 최초로 도이체 그라모폰과 전속 계약을 체결, 를 발매했으며 2023년에는 카네기홀 데뷔 리사이틀 및 라틴아메리카 리사이틀 투어를 마쳤다. 2024년에는 함부르크 국립 오페라극장에서 선보일 <돈 조반니>의 무대를 비롯해, 세계적인 악단과 협연을 앞두고 있다.


헤라 혜상 박Hera Hyesang Park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소프라노 박혜상은 지금 세계적인 오페라 무대를 누비며 활동하는 한국인 아티스트다. 2020년, 동양인 소프라노로서는 최초로 도이체 그라모폰과 전속 계약을 체결했고, 이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마술피리>의 첫 주역을 맡았으며, 이어 <사랑의 묘약>의 ‘아디나’ 역으로 베를린 국립 오페라극장 무대에도 데뷔했다. “데뷔 앨범을 만드는 것은 자기 발견의 과정이었다”라고 말한 2020년 첫 앨범에 이어, 4년의 간격을 두고 발매한 이번 앨범 <숨 Breath>은 좀 더 내밀하게 ‘사유의 여정’을 펼쳐내 보인다. 그 핵심은 이번 앨범의 첫 번째 수록곡인 ‘While You Live’의 가사에서 찾을 수 있다. ‘사는 동안 빛나라. 슬퍼하지 말라. 삶은 짧으니, 더 이상의 슬픔 없이, 여기 사는 동안, 슬퍼하지 말라While you live, Shine. Have no grief at all. Life is short, no more grief, while you live here, Have no grief.’ 로시니와 베르디의 오텔로, 마스네의 명상곡부터 현대 작곡가 우효원의 한국적 레퀴엠, 루크 하워드와 세실리아 리빙스턴의 곡까지, 이번 앨범에는 ‘죽음’ 혹은 ‘슬픔’으로부터 ‘희망’과 ‘안도’를 이야기하는 곡들이 박혜상의 필터로 선별되었다. 그 위로가 강력하게 힘을 발할 수 있는 것은 역시나 박혜상이 지닌 악기 ‘목소리’ 덕택이다. ‘리릭 소프라노’의 범주로 분류되곤 하는 박혜상의 음역대는 꾀꼬리처럼 높고 현란하진 않지만, 중심이 단단한 와중에 울림이 깊어 사색적이다. 반쯤은 철학자를 닮은 성악가, 그가 풀어놓는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사유의 흔적이 읽히는 단어들 속에 그가 지나왔을 치열한 4년이 머리를 스친다. 무엇보다 가슴으로 곧장 직진하는 노래의 강렬한 힘을 다시금 느끼고 싶다면 지금 박혜상의 깊은 ‘숨’에 귀를 기울여도 좋다.


화이트 셔츠, 재킷, 팬츠는 모두 돌체앤가바나.


4년 만에 두 번째 앨범이 나왔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을 텐데, 개인적으로 꼽는 최고의 성취를 꼽는다면?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된 것이다. 이번 앨범도 사실 각종 부정적인 마음, 고난, 자기 비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팬데믹으로 인해 느낀 삶에 대한 회의감 같은 것에서 시작됐다. 지난 4년은 이런 마음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 삶이란 무엇인가 같은 물음에 나만의 답을 찾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이제는 나 자신에 대해 잘 알게 되었고, 여러 일들에 좀 더 선택을 잘 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물론 카네기홀에서의 리사이틀이라든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의 주역 데뷔 같은 좋은 일도 있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그 일 자체가 나를 대단히 행복하게 만드는 것 같진 않더라. 그저 매일의 일상이 편안하고 좋아졌다.


이번 앨범은 ‘죽음과 실존’에 대한 고민과 해답을 담은 콘셉트 앨범이라고 들었다. ‘숨’이라는 제목은 어떻게 정해졌나?

어느 날 정말 생생한 꿈을 꿨다. 내가 하얀 실크 드레스를 입고 있는데, 뭔가 미스터리한 형상이 다가와서 그걸 만지니 뭔지 모를 에너지가 내 몸으로 쑥 들어오더라. 그러고는 내가 <라 트라비아타>의 아리아를 부르면서 물속에 다다랐는데, 그때 갑자기 꿈이 형형색색의 컬러로 변했고, 주변에서 나를 지켜보던 사람들이 축제를 열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숨 쉬기가 힘들어야 하는 물속에서 내가 너무나 편안하게 그 장면을 웃으며 지켜봤다. 꿈에서 깬 뒤 도이체 그라모폰에 전화해 앨범 제목은 ‘숨’으로 할 거고, 내가 물속에 있는 앨범 재킷 사진을 촬영하겠다고 말했다. 이 꿈이 영감이 되어 곧장 프리 다이빙을 배웠고, 프리 다이빙 자격증을 딴 다음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가서 뮤직비디오를 촬영했다. 꿈 내용이 거의 그대로 뮤직비디오에 담긴 것이다. 도이체 그라모폰에서 이런 나를 이해하고 함께해주어 감사하게 생각한다.


타이틀곡 ‘While You Live’는 ‘세이킬로스의 비문’ 속 메시지를 그대로 담았다고 들었다.

처음에는 사실 죽음을 받아들이는 7가지 단계를 생각하며 프로그램을 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거부rejection’, ‘분노anger’, ‘우울depression’, ‘협상bargaining’, ‘수용acceptance’ 같은 죽음을 대하는 여러 가지 단계를 생각하고 있노라니, 정신적으로 너무 피폐해지고 힘이 들더라. 그래서 다시 고민에 빠져 있다가 우연히 구글에서 ‘세이킬로스의 비문’을 발견하게 됐다. 1~2세기경에 살았던 세이킬로스라는 사람이 아내를 잃고 만든 묘비인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악보라고 들었다. 그 묘비에는 이렇게 써 있다. “살아 있는 동안 빛나라. 그대여, 슬퍼하지 말라.” 이 말이 내게 너무 크게 와 닿았고, 이 경구와 비슷한 결을 가지고 있는 레퍼토리를 짜게 됐다. 이 앨범이 지금까지도 나에게 계속 같은 메시지를 주고 있고, 세이킬로스의 마음으로 2년 넘게 살고 있는 것 같다. ‘매일 살아 있는 동안 빛나자, 이 시간을 충분히 누리자, 현재를 즐겁게 살자.’ 앨범 작업 당시 혼자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이런 마음을 다시 한번 뜨겁게 느꼈다.


밝은 모습의 이면에 굉장히 사색과 성찰이 많은 사람 같다. 극적인 오페라 아리아를 부르고, 늘 가사가 있는 노래를 곱씹다 보니 그런 감수성이 생기는 건가?

물론 가사를 곱씹는다. 요즘 들어 점점 더 확신하게 되는 건, ‘내가 괜찮은 공연을 했다’ 싶은 경우는 무대에서 내려와서 내가 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을 때라는 것이다. 캐릭터에 대해 공부하고 제대로 이해한 다음, 그 캐릭터가 나의 몸을 통해 그대로 전달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더 비어 있는 상태가 되려고 노력한다. 나를 통해 캐릭터의 이야기를 다 쏟아내고, 스스로는 그저 붕어처럼 노래하는 것 같은 느낌일 때가 가장 만족스럽다.


언밸런스 톱은 코스. 샤 스커트는 쟈니헤잇재즈.


성악가가 다른 음악가들과 다른 특별한 점은 뭐라고 생각하나?

‘게워낸다’는 거다. 최근에 연습실에서 우효원 선생님이 쓴 곡 ‘가시리’를 연습하는데 정말 뭔가가 게워지더라. ‘와, 내가 이 지경이 됐구나, 내가 스스로 부른 노래를 이렇게 좋아하다니.’(웃음) 이런 생각을 했다. 악기가 스스로 스토리를 만드는 상상의 영역이라면, 노래에는 그 자체로 스토리가 존재한다. 예를 들어, 이번 앨범 수록곡 중 구레츠키의 교향곡 3번 ‘슬픔의 노래’ 중에 이런 가사가 나온다. “엄마 엄마, 마리아가 날 지켜주실 거예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18세의 폴란드 소녀가 엄마에게 쓴 편지를 옮긴 것이다. “마몽 마몽” 하고 노래를 부르는데 정말 내 속이 텅 비는 느낌이 들더라. 그 소녀가 마치 내 몸속에 들어왔다 나간 것처럼. 그 노래를 부르며 그날 정말 많이 울었다. 이렇게 노래 가사에는 힘이 있는 것 같고, 또 그걸 부르는 사람에게도 그 이야기를 잘 전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생기는 것 같다.


한국 가곡을 좋아한다고 여러 번 언급했다. 이번 앨범에도 우효원 작곡가의 ‘어이가리’가 실렸다. 곡이 탄생한 배경과 한국 가곡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궁금하다.

앨범에 좋은 한국 가곡들을 넣고 싶었는데 찾기가 무척 어려웠다. 사실 한국 가곡의 스타일이 전통적이기보단 편한 멜로디가 많은 편인데, 그런 곡을 넣고 싶진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작곡가 우효원 선생님을 만났고, 앨범 녹음은 끝났지만 선생님 곡을 넣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죽음에 관련된 곡이어야 하고, 가능하면 죽음 이면의 더 위대한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고 했다. 심플하게 악기 하나만 정하기로 했는데 ‘아쟁’이 떠올랐고, 아쟁으로 녹음된 음원을 한국에서 받은 뒤 베를린에서 내 목소리를 얹었다. ‘가시리’나 ‘어이가리’ 같은 곡을 부를 때는 성악 테크닉을 다 빼고 최대한 창唱 느낌에 가깝게 부르려고 한다. 한국 공연에서도 소리꾼 고영열 씨와 함께 ‘가시리’, ‘새야새야 파랑새야’ 같은 곡을 선보일 예정이다.



레더 재킷과 셔츠 모두 토즈.


‘성악곡’이나 ‘오페라’에 접근하기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에게 전하고픈 말이 있다면?

음악을 들었을 때 ‘귀에 남는 것’과 ‘가슴에 남는 것’이 있다. 귀에 멋지게 들린 것은 금방 잊지만, 가슴으로 들은 것은 오래 남는다. 성악이나 오페라 역시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렇게 마음을 쏟아붓는 사람이 있으니 편하게 와서 가슴으로 느끼고 가셨으면 좋겠다.


2024년에 계획되어 있는 공연이나 오페라 작품에 대한 소개를 부탁한다.

앨범 발매와 맞물려 한국에서 리사이틀을 하고, 영국 3개 도시에서 투어 공연을 한 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리사이틀을 할 예정이다. 4월에는 새로 부임하는 음악감독 구스타브 두다멜과 함께하는 뉴욕 필하모닉 협연도 예정되어 있다. 오페라로는 파리, 함부르크, 뉴욕 등에서 <코지 판 투테>, <마술피리> 등을 할 거고, 여름에는 에든버러 페스티벌에도 참가할 계획이다.


언밸런스 톱은 코스, 샤 스커트는 쟈니헤잇재즈, 슈즈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STYLIST  문승희  HAIR  안미연  MAKEUP 김부성 

COOPERATION 유니버설 뮤직 코리아(universalmusic.co.kr), A&R Collective, 돌체앤가바나(02-3442-6888), 막스마라(02-3479-1792),

니해잇재즈(02-545-1260), 토즈(02-3438-6008), 코스(1800-2765)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