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WER OF COLOR

예술 작품에서의 색은 표현을 위한 수단이자 매개체다. 작품을 위해 작가는 색을 탐구하고 때로는 직접 자신만의 색을 개발하기도 한다. 아니시 카푸어, 이브 클랭, 마크 로스코 등 시각 예술사의 한 획을 그은 작가가 제각기 탐구한 색을 살펴보며 그들의 이야기를 조명해본다.

EDITOR 이호준



ANISH KAPOOR

최근 국제갤러리에서의 개인전으로 찾아온 조각계의 거장이자 영국계 인도인 아티스트 아니시 카푸어. 그에게는 ‘자신만이 사용할 수 있는 색을 소유한 작가’라는 논란 섞인 수식어가 뒤따른다. 세상에서 가장 어두운 블랙이라 평가받는 ‘반타 블랙Vanta Black’의 독점 사용권을 쥐고 있기 때문. 반타 블랙이라 불리는 안료는 머리카락 굵기 1만 분의 1 정도인 탄소 구조체가 빛을 99.96% 흡수한다는 특징을 지녔다. 인공위성의 위장용 도료로 사용되는가 하면 천체망원경의 내부 도색용으로도 활용도가 높다. 아니시 카푸어는 반타 블랙을 개발한 나노 기술 회사 서리 나노시스템즈로부터 군사, 우주항공 분야를 제외한 타 분야, 특히 예술 분야에서의 독점 사용권을 구입했으며 해당 색을 활용한 작품을 꾸준히 선보이고 있다. 이 같은 이유로 반타 블랙을 ‘카푸어 블랙’이라 지칭하기도 한다. 색을 독점한다는 비판 어린 시선 또한 분명 있지만, 그가 조각 작품에 반타 블랙을 사용함으로써 조각이 지닌 특유의 입체성을 허물었다는 점은 쉬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일례로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이자 연작인 ‘논 오브젝트 블랙Non-Object Black’이나 디스크 형태의 ‘블랙’(2023)은 보는 시선에 따라 때로는 입체적이고 때로는 완전한 평면을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나아가 끝없는 깊이감을 선사한다.





YVES KLEIN

1960년대 현실의 일상적 요소들을 활용해 대중문화를 작품에 반영하는 시도를 거듭하며 현대 예술의 범위를 확장한 예술 사조인 누보 레알리즘Nouveau Realism의 흐름을 이끈 이브 클랭. 현실주의와 추상주의를 작품 안에 함께 녹여내고자 한 그는 1955년 파리로 이주한 뒤 모노크롬 회화를 비롯해 조각, 행위 예술 등 분야를 막론하고 실험적인 작품을 선보이며 예술가로서의 삶을 꽃피웠다. 붓을 이용한 회화 작업 대신 페인트를 칠한 여성의 나체를 커다란 캔버스에 굴려 그림을 그리는가 하면, 화염방사기를 이용하는 등 실험적인 시도를 감행하기도 했다. 그에게 떼려야 뗄 수 없는 색은 일명 ‘IKB’라 불리는 ‘인터내셔널 클랭 블루International Klein Blue’. 여러 시도를 거쳐 발명한 강렬한 울트라머린 블루는 이브 클랭 자신의 이름을 직접 붙일 만큼 그가 애정하는 시그너처이기도 하다. 클랭에게 이 블루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 색이다. 어떠한 감정과 생각도 이입될 수 없는 가장 순수하고 무한한 색이라 보았기 때문. IKB로 완성한 단색조 회화 시리즈는 붓이 아닌 페인트용 롤러를 사용해 제작한 것으로도 유명하며 그로 인해 거칠게 표현된 표면은 이브 클랭의 작품에서 쉬이 발견할 수 있는 특징이다. 작가는 1960년 IKB에 대한 특허를 신청하며 그에게 가장 순수했던 푸른색을 자신의 소유로 만들었다.





PHILIP GUSTON

핑크는 통상적으로 행복, 사랑을 상징하는 색이다. 하지만 필립 거스턴의 회화 속에서는 두려움이나 불안함을 상징하는 듯하다. 러시아계 유대인이던 거스턴이 미국에 머무를 당시 그곳은 흑인과 유대인을 상대로 한 인종차별과 박해가 만연했다. 약자들을 대상으로 폭력이나 강간 등의 테러를 자행했던 KKK단이 기승을 부리던 시기였다. 추상회화 작가였던 거스턴은 구상 회화로 장르의 전환을 시도하며 당시 시대의 모습과 이로 인한 무기력함을 비판적으로 그려내기 시작했다. 그는 작품에 만화 같은 화풍과 추상회화적 붓 터치를 가미해 사회 비판적인 성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대신 우화적으로 표현한다. 그렇지만, ‘그리기, 담배 피우기, 먹기’나 ‘더 스튜디오’ 등과 같은 거스턴의 작품 속에 자주 등장하는 요소 중 하나인 눈만 껌뻑이며 담배를 피워대는 얼굴, 주먹, 흰 복면을 뒤집어쓴 존재 등을 알아보는 순간 작가의 메시지는 보다 명확히 다가온다. 핑크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핑크는 레드와 화이트를 섞어 만드는 색으로 결국 색의 기원은 레드다. 빨강이라는 색을 사용해 피와 차별, 폭력을 드러내되 유머러스한 화풍과 함께 이를 한 단계 우회할 수 있도록 화이트 컬러를 섞어 탄생시킨 것이 필립 거스턴만의 핑크다. 그의 작품을 ‘핑크 오브 블러드’라는 수식어로 표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JOSEF ALBERS

조셉 앨버스는 색에 대한 원론적인 탐구와 그 심리적 효과에 대해 골몰했던 작가다. 실제로 그가 집필한 저서 <색채 구성Interaction of Color>은 순수 미술계는 물론 디자인계에도 엄청난 영향을 끼쳤을 정도다. 이를테면 특정 색상이 어떻게 다른 색을 중화하거나 바꾸는지 그리고 빛이 색상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등 색채와 공간이 지닌 심리적인 효과와 컬러가 상호작용하는 방식 등에 대해 최초로 이론적인 물음을 던졌기 때문이다. 1950년부터 1976년까지 무려 27년간 작업한 추상회화 연작인 ‘정사각형에 바치는 경의’는 조셉 앨버스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캔버스 안에 하나의 기하학적 형태를 반복적으로 사용하면서 제한해둔 범위의 공간 구성 내에 다양한 색상을 병치해 색을 바라보는 인간의 지각 현상을 연구한 결과물이다. 자연히 여러 색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거친 그는 특히 초록색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초록은 간단한 색상이 아니다. 큰 감정을 지닌 색도 아니고 주목을 끄는 색도 아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초록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더욱 깊이 생각하게 만든다.” 이와 함께 그는 노랑과 파랑을 배합해 만드는 초록색은 배합 비율에 따라 노란빛을 더 많이 띠기도 하고 파랗게 변할 수도 있어 섬세한 뉘앙스를 내포하는 색이라고도 언급했다.





MARY CORSE

메리 코스는 60여 년의 시간 동안 기하학적인 시각언어를 활용해 추상에 대한 탐구와 물질에 대한 원론적인 인식법을 자신의 회화 작품 속에 담아왔다. 그의 작품 대다수는 ‘빛’을 주제로 삼는데, 단순히 빛이 만들어내는 일련의 형태를 회화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빛이라는 물질 그 자체를 회화에 담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심했다. 메리 코스는 빛이 지닌 고유의 성질인 굴절과 반사에 주목했다. 빛은 관람자가 작품을 감상하는 위치와 시선에 긴밀하게 반응해 제각기 다른 시각적인 인상을 준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 것. “예술은 벽에 걸려 있는 작품이 아니라, 관람자의 인식”이라는 작가의 말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빛을 표현하고자 하는 일념으로 메리 코스는 캔버스, 라이트 박스, 유리, 마이크로스피어, 아크릴 조각 등 다양한 재료를 활용한 실험을 거듭했다. 특히 2021년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에서 전시한 10m² 길이의 작품 ‘무제(내면의 흰색 띠들)’처럼 마이크로스피어를 활용한 회화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다. 마이크로스피어는 미세한 구형 미립자로 도로 표지판이나 고속도로 구분선에 사용되는 일종의 안료다. 이를 도포한 회화는 얼핏 그저 하얀 물감을 칠한 것처럼 보이나, 관람객이 서 있는 방향이나 시선이 달라지면 빛이 반사되면서 작품이 반짝반짝 빛나는 듯한 시각적 효과를 선사한다.





MARK ROTHKO

러시아 출신 미국 작가이자 추상표현주의 선구자인 마크 로스코는 거대한 캔버스에 의미를 좀체 헤아리기 힘든, 선과 면의 경계가 모호한 깊은 색 덩어리를 표현하는 독특한 추상 색면 회화에 집중해왔다. 여러 색과 면이 교차한다는 의미로 다층 형상이라는 뜻의 ‘멀티폼Multiform’이라 불리기도 한 그의 작품은 색채의 권위자인 앙리 마티스와 그의 제자 막스 웨버Weber Max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마크 로스코는 ‘작품을 만든다’는 것이 곧 인간 본연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가 특정한 이미지를 구현하는 대신 감정을 함축해 단순한 색과 간결한 표현으로 오묘한 느낌을 만들어내는 색면 회화에 천착하는 이유다. 그는 또한 종종 빨강을 두고 심장박동, 열정, 용암, 죽은 야수파 화가들이라 비유했다. “내가 삶에서 걱정하는 것은 단 하나다. 검정이 빨강을 집어삼키는 것”이라는 말을 남겼을 만큼 빨강은 마크 로스코의 그림에서 가장 원형의 색이자, 나아가 그의 생애와 열망과 결부할 수 있는 색으로 읽힌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그의 유명한 해프닝 중 하나인 시그램 빌딩 벽화 사건이 발생할 즈음부터 우울증으로 신체적, 정신적 슬럼프를 겪던 생애 후반에 선보인 그의 작품에는 검은색이 분신처럼 사용됐다. 하지만 1970년 작업실에서 자신의 손목을 긋는 극단적 선택을 했던 때, 마크 로스코의 옆에 자리하던 것은 붉은 피와 한 방울의 검은색도 섞이지 않은 빨강으로 완성한 작품 ‘레드 온 레드’(1970)였다.





JE YEORAN

‘예술은 생명을 지지하고 기쁨을 조직하는 일이다’라는 굳은 철학을 기반으로 30년 이상 추상회화에 몰두해온 한국 작가 제여란. 그는 생동하는 자연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마치 행위예술처럼 온몸을 사용해 캔버스를 물감으로 뒤덮으며 거대한 스케일과 다채로운 색의 작품을 선보여왔다. 1990년대에는 어두운 색조를 주로 다루며 질감이 두드러진 회화를 선보이다 2000년대에 이르러는 푸른색과 붉은색이 지닌 운동성을 강조한 회화로 자신의 작품 세계를 확장했다. 그리고 제여란 작가는 작년 10월부터 올해 1월까지 스페이스K 서울에서 열린 개인전 <로드 투 퍼플Road to Purple>을 통해 다시 한번 색에 대한 탐구를 거듭한 결과물을 내놓았다. 가로 9.5m, 세로 3m라는 큰 규모의 보라색 회화 작품이 그 주인공. 2000년대 중·후반부터 꾸준히 그려온 연작 시리즈이자 라틴어로 ‘어디든, 어디도 아닌’이라는 뜻을 지닌 ‘Usquam Nusquam’의 신작이다. 제여란 작가는 “빨강과 파랑이 결합해 보라색이라는 독특한 색이 만들어지지만, 보라색은 그 자체로 분리 불가능한 단독의 색이며, 다른 색과는 결을 달리하는 까다롭고도 고귀한 자태를 지닌다”라고 설명하며 그간 보라색을 향한 탐구의 시간을 짐작할 수 있는 설명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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