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1월호

최초이자 최고, 김수철

음악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 사나이, 모든 것을 최고 수준으로 한 사나이, 모든 것에 대부분 최초로 도전했던 사나이. 김수철이라는 사나이.

GUEST EDITOR 이기원 PHOTOGRAPHER 김제원

티셔츠와 데님 팬츠, 롱 코트, 가죽 부츠 모두 로에베. 안경은 메종 마르지엘라×젠틀몬스터.


1980년대 김수철은 록 스타이자 영화배우였다. 한때 조용필을 능가하는 국민적 인기를 누리며 ‘가수왕’까지 차지했던 그는 갑자기 주류 음악을 등지고 국악으로 투신해 앨범을 내더니, 또 어느 순간 올림픽 같은 대형 공연을 위한 국악 기반의 거대한 음악을 만드는 작곡가가 되었다. 그를 두고 ‘작은 거인’이라는 레테르를 붙이는 건 어색한 일이 아니다. 그가 지난 10월 11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첫 번째 단독 공연을 열었다. 첫 번째 공연? 맞다. 그는 수많은 히트곡을 가진 45년 차 뮤지션이지만, 이제야 처음으로 단독 콘서트를 열었다. 평상시 즐겨 입던 발목이 드러나는 팬츠와 그 위로 입은 드레시한 턱시도의 언밸런스가 어쩐지 그의 캐릭터를 설명해주는 것 같았다. 그 뒤로 도열한 건 대북과 대금 같은 전통악기들, 기타와 키보드가 갖춰진 밴드 그리고 오케스트라. 무대를 꽉 채운 엄청난 규모였다. 한평생 국악 대중화를 위해 발표해온 주요 곡들을 공연에서 선보이기 위해서는 100인조 이상의 오케스트라가 필요했다고. 이날 공연에서 그는 88 서울올림픽 주제곡 ‘도약’, 영화 <서편제> 주제가 ‘천년학’, 2002년 한일 월드컵 주제곡 ‘소통’ 등 자작곡들을 선보였다. 무대에서 공연한 건 처음이었다. 그는 100인조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고, 그의 히트곡을 부르고, 직접 기타를 잡고 김덕수의 장구와 함께 멋진 연주까지 뽐냈다. 그를 만난 건 공연이 끝난 이틀 뒤였다.



트위드 재킷과 스트라이프 팬츠 모두 블랙공.


공연이 끝났습니다. 기분이 어떠십니까.

아직도 공연하는 기분이에요. 바빠요. 이번 공연을 위해서 타악기 20대를 주문 제작했는데, 그걸 빨리 공연장에서 옮겨줘야 하거든요. 방송 인터뷰도 계속하는 중이고. 여유로운 느낌이 아니에요.


45년 경력의 아티스트가 이름을 걸고 한 첫 공연이었습니다.

한창 인기가 많았을 때는 낮에는 방송하고 저녁에는 국악 공부하느라 공연을 못했어요. 데뷔 30주년 공연을 하려고 했었는데 그때도 바빠서 못했고요. 타이밍을 놓치다 이제야 공연을 하게 됐네요.


공연 준비가 보통이 아니었겠습니다. 100인조 오케스트라를 움직이셔야 했으니.

15년 전부터 이 공연을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공연의 규모가 크다 보니 기업 후원이 꼭 필요했는데 계속 거절당해서 결국 자비로 일을 벌였어요. 제 나이도 있고, 더 늦으면 안 되겠다 싶었어요.


생각보다 후원 규모가 작았습니까?

그럼요. 기업들이 다들 말로는 우리 문화예술을 돕고 싶다고 해요. 하지만 막상 후원하려니 별로 득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거죠. 엄청난 돈이 들어가는 것도 아닌데, 다들 말로만 우리 문화예술을 외쳐요.


자비를 들여서까지 해야 했습니까?

한국인이라고 국악만 들어야 한다는 건 아니에요. 국악도 함께 들어야 한다는 거지. 문화예술은 곧 민족의 긍지잖아요. 우리가 안 하면 누가 해요. 어차피 젊은 시절부터 돈이나 인기 좇는 건 체질에 안 맞았어요. 그때도 돈 벌면 악기 사고 음악 공부 했으니까.


직접 기업 임원들을 만나 후원 요청을 하신 걸로 압니다. 그게 좀 놀라웠어요. 아티스트들은 보통 품위에 신경 쓰고, 돈 얘기 같은 건 잘 안 꺼내지 않습니까.

그런 얘기를 오히려 직접 해야죠. 누가 나보다 더 잘 설득할 수 있겠어. 큰일을 하기 위해서 이 정도는 아무렇지 않아요. 앞에서는 다 후원에 긍정적이었는데 정작 실행은 안 돼서 아쉬울 뿐이죠.


예상만큼 후원이 되었다면, 생각한 그림이 있습니까?

우선 전국 공연이 가능했을 거예요. 서울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공연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내년쯤 세계 무대로 나갈 건데, 세계 무대를 위한 시간도 훨씬 단축됐겠죠.


세계 진출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해주신다면요?

영화와 스포츠, 음악까지 많은 대중문화 분야에서 한국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어요. 하지만 순수 예술 분야에서는 아직 큰 성과가 없죠. 대중문화는 유행을 타기 때문에 우리의 정신이 깃든 순수 예술이 중심을 잡아줘야 해요. 저는 이미 순수 예술로서의 음악을 만들어뒀고, 이제 제대로 보여주기만 하면 돼요. 100인조 오케스트라를 3팀 정도 만들어서 미국과 유럽, 아시아 투어를 하고 싶었어요. 이를 위해 기업의 후원이 필요한 거고.


대중 가수로 정점을 찍고 있을 때 돌연 국악 앨범을 발매했습니다. 인기를 조금 더 누릴 수도 있었을 텐데, 국악으로의 전환이 다소 이른 건 아니었을까요?

그럴 수도 있어요. 하지만 인기가 절정이었을 때 좀 지쳐 있었어요. 스케줄이 너무 많으니까 육체와 정신이 계속 소모되고 있었죠. 그때 가수왕까지 되면서 사람들이 너무 알아보니 어딜 갈 수도 없을 지경이었어요. 저는 음악을 더 공부하고 싶은데 시간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그냥 ‘에라 모르겠다’ 하고 뉴욕으로 갔어요. 공부할 타이밍을 놓치면 안 되겠다 싶었어요. 인기고 돈이고 다 필요 없고, 나는 내 길 가겠다는 생각이었죠.


누군가는 미련하다고 했을 법도 합니다. 누구는 한 곡 히트하기도 힘든데, 가수왕 타이틀까지 버린 것 아닙니까.

‘또라이’ 소리 많이 들었죠. 메뚜기도 한철인데 돈 벌어서 빌딩도 사고 해야지 뭐 하는 거냐고. 하지만 그거 알아요? 사람이 너무 풍요롭고 배부르면 정신이 빈곤해져요. 그때 제가 인기에 묻어갔으면 지금쯤 큰 부자였을 거예요. 하지만 그건 내 길이 아니었어요. 물질적 부자보다는 정신적 부자가 되기를 원했어요.


20대의 김수철에게 세속적 욕구는 없었나요.

돈 안 되는 국악 음반만 25장을 냈어요. 굳이 따지면 100억 원이 넘는 금액을 그냥 버린 거예요. 난 그냥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궁금한 것, 내가 하고 싶은 것에만 집중해왔어요.


최근에 <풍류대장> 같은 국악 베이스의 오디션 프로그램이 많이 생겼습니다. 심사위원으로 섭외가 들어왔을 법한데요.

당연히 연락이 왔고, 자문을 해줬죠. 그런데 심사위원으로 출연하고 싶진 않았어요. 내가 대학가요제에 두 번이나 떨어지면서 좌절감이 심했어요. 오디션이라는 건 필연적으로 누군가를 떨어트려야 하는데, 그럼 내가 그 지원자들에게 평생 비슷한 아픔을 줄 거 아니겠어요? 저는 국악 하는 젊은 친구들을 비판하고 싶지 않아요. 격려만 해요. 왜냐하면 국악은 판이 너무 좁고, 나와도 갈 만한 곳이 별로 없으니까. 말하는 건 딱 한 가지예요. ‘공부 열심히 해라. 순간의 아이디어에만 기대지 마라. 그래야 롱런할 수 있다.’ 요즘 음악 외의 여러 분야에서 기본적인 공부를 무시하고 얄팍한 아이디어에만 기대는 경우를 많이 봐요. 그건 오래 못 가요.


요즘 일상은 어떠세요.

음악 만들고, 연주하지요. 기타를 50년 넘게 쳤는데 지금도 아플 때 빼고는 거르지 않아요. 누가 뭐래도 하루에 2시간씩은 기타 연습을 해요. 발전보다는 유지를 위한 거예요. 언제든 내 연주를 들려줄 수 있어야 하니까.


다음 앨범 계획도 있나요?

20년 동안 녹음해온 게 있어요. 공연 때문에 잠깐 중지했는데 이 작업을 마무리 지으려고요. 더 묻지 말아요. 나는 미리 얘기하는 걸 싫어해. 김빠지잖아요. 결과물로 보여주면 되지, 미리 말만 잔뜩 늘어놓는 게 싫어요.



STYLIST  이경원  HAIR & MAKEUP  김원숙

COOPERATION  블랙공(542-2508), 로에베(772-3256), 시지엔 이(6097-0212), 젠틀몬스터(070-4128-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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