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렉터 이상열의 가와이이 수장고

대구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컬렉터 이상열은 아시아 작품을 중심으로, 국적과 세대를 넘나드는 자신만의 컬렉션을 쌓아왔다. 그의 기준은 단순하다. 아직 익숙하지 않은 이름과 작업을 보물찾기하듯 찾아 나서는 것.

EDITOR 박이현 PHOTOGRAPHER 이창화

(왼쪽부터 시계 반대 방향) 미스터의 ‘Pinkish Gold’(2016)와 ‘Conflicted Adolescence’(2019), OB의 ‘Small Castle’(2021) 앞에 선 컬렉터 이상열.


이상열LEE SANGYUL 대구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미술품 컬렉터. 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해온 그는 현대미술 작가 미스터의 작품을 소장하며 본격적인 아트 컬렉팅의 길에 들어섰다. 현재 주식회사 LSY.Ltd의 대표로서 감각적인 안목과 시선을 바탕으로 현대미술 컬렉팅 생태계에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해나가고 있다.


‘대구 도심 속 수장고’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공간이네요.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공간은 국적과 세대, 매체가 다른 작품들이 각자의 개성을 유지하면서도 조화를 이루도록 구성한 개인 수장고 중 하나예요. 그중에서도 아시아 작가들의 ‘가와이이可愛い(귀엽다)’ 작품을 모아놓은 구역을 가장 아낍니다. 작품 속 인물의 맑고 그윽한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어느새 화면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해요. 이곳 전체에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분위기가 흐르지만, 단순히 가볍지만은 않아요. ‘귀여운 것은 무적’이라는 말처럼 귀여움에는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고 다양한 감정을 포용하게 하는 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옥승철과 토미아 라댕Thomias Radin의 작품도 눈에 띕니다. 모두 국내에 알려지기 전부터 눈여겨보고 소장했습니다. 특히 토미아 라댕은 해외 미술관 전시에 출품된 작품에 매료돼 곧바로 작품을 소장한 독일 에스더 쉬퍼 갤러리에 연락했을 정도였죠. 다행히 구매에 성공해 갤러리에서 한국으로 작품을 보내주었고, 그해 국내 첫 개인전까지 열려 추가로 작은 작품도 들일 수 있었습니다. 옥승철과 김민희의 작품은 대구미술관 등의 여러 전시를 직접 찾아다니며 만났는데요. 특히 뚜렷한 개성과 강렬한 화면을 보여준 김민희 작가의 앞으로의 행보가 기대됩니다.



장파, ‘Talking Heads #3’, 2025


오늘 대구에서 뵙기 전, 미술계 관계자들로부터 국내외 현장을 누비며 정보를 모으는 컬렉터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과장이 아닌 것 같아요. 최근 호기심을 자극하는 갤러리와 작가를 귀띔해 주실 수 있나요? 데이비드 즈위너 갤러리의 리사 유스캐비지Lisa Yuskavage와 사샤 고든Sasha Gordon이요. 두 작가 모두 회화적 언어가 뚜렷하고, 갤러리의 전시 기획과 지원 방식 또한 뛰어나 기회가 닿는다면 꼭 소장하고 싶습니다. 다만 작품을 배정받기까지 대기 시간이 길고 접근이 쉽지 않아 수년째 갤러리와 소통하며 적절한 때를 기다리고 있어요. 가고시안 갤러리의 메리 웨더퍼드Mary Weatherford도 지켜보고 있습니다. 글로벌 미술 시장이 활황이던 시기에는 수요가 크게 치솟던 작가인데요. 미술 시장이 다소 차분해진 지금은 컬렉팅을 보다 현실적으로 검토해볼 수 있는 시기라고 봅니다. 상하이에서 실물을 처음 본 순간 신선한 충격을 받은 리하이디Li Hei Di의 작품도 있습니다. 화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와 밀도가 인상적이었거든요.


한국 작가 중에서는요? 국제갤러리와 리만머핀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활동 중인 김윤신 작가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제가 주로 수집해온 팝아트 계열과는 결이 다르지만, 작품 자체가 지닌 힘이 상당히 압도적이더라고요. 지인들에게 적극 추천했을 정도로요. 아직 저와는 인연이 닿지 않았는데, 어서 제 마음을 붙드는 작품을 만났으면 해요.


이토록 즐거운 세계에 입문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가족과 함께 피렌체를 여행한 경험이 출발점이었습니다. 수준 높은 미술관과 전시를 접하면서 미술에 대한 관심이 깊어졌어요. 피렌체를 대표하는 거장들과 그들을 후원한 메디치 가문, 그리고 그 후원이 르네상스라는 거대한 문화적 부흥을 낳았다는 사실이 큰 감동을 안겨주었고요. 피렌체에서는 현대미술 전시도 꾸준히 열리는데, 이를 보고 나면 단순한 감상을 넘어 작품을 곁에 두고 싶다는 열망이 생기곤 했습니다. 컬렉션의 가치와 의미를 알아가던 무렵, 제 삶의 기반인 대구에 훌륭한 컬렉터가 많다는 점도 든든한 동력이 됐어요. 선배 컬렉터들을 가까이에서 보고 배우며 한 점씩 소장하기 시작했고, 덕분에 저만의 색깔이 드러나는 컬렉션을 차근차근 만들 수 있었습니다. 각각의 작품에는 제가 지나온 시간과 기억, 그 시절의 행복한 경험이 겹겹이 배어 있어 그 가치를 다른 무엇과 비교하기는 어려운 것 같아요.


이곳 전체에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분위기가 흐르지만, 단순히 가볍지만은 않아요. ‘귀여운 것은 무적’이라는 말처럼 귀여움에는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고 다양한 감정을 포용하게 하는 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상열


김승현의 ‘Composition’(2022), 매드사키의 ‘Brillo Box’, 테드 핌Ted Pim의 ‘Loot’(2018) 등의 작품으로 가득한 수장고의 방.


와인과 시계도 열렬히 모으시잖아요? 사실 저는 무언가에 빠지면 집요하게 모아들이는 수집광 기질이 있어요. 미술 작품 외에도 시계와 와인을 오랫동안 수집해왔죠. 특정 와인은 빈티지별로, 시계는 한 모델을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모으고 있습니다. 하나의 분야를 탐구하며 지식과 세계를 넓혀가는 일은 일상에 활력소가 됩니다.


갤러리와의 커뮤니케이션, 작가에 관한 정보를 얻는 방법,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 등을 <럭셔리> 독자들에게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저는 가격이나 명성만으로 작가를 평가하지 않아요. 핵심은 ‘이 작가가 시간이 흘러 자신의 언어를 지속적으로 확장할 수 있는가’, ‘내 취향과 얼마나 맞닿아 있는가’입니다. 이에 부합하는 작업을 찾아가는 과정을 즐기기에 매년 국내외 아트페어를 꾸준히 방문하고, 보물찾기를 하듯 새로운 젊은 작가를 발견하는 데 힘을 쏟습니다.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이름보다 아직 충분히 조명받지 못한 작가를 일찍 알아보는 일은 보람 그 자체예요. 기본적으로는 갤러리나 미술관에서 작품이 전하는 울림에 공명하면 관심을 두고, 이후 자료를 찾아보며 판단을 구체화합니다. 갤러리와의 소통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처음 접하는 작가의 작업은 첫인상만으로 충분히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잦아요. 이때 갤러리스트나 큐레이터의 설명을 들으면 작품의 배경과 맥락을 더욱 입체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또 해외 컬렉터들과 수시로 정보를 교환해요. 젊은 해외 작가가 한국에 알려지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데, 현지 컬렉터들과 교류하면 국내에서는 좀처럼 접하기 어려운 작가와 전시 소식을 한발 앞서 알 수 있어요.


로터스 강의 ‘Mesoderm(Ecotone)’(2025).


료코 구마쿠라Ryoko Kumakura의 ‘A Mermaid’(2022).


가장 첫 번째로 컬렉팅한 작품과 최근에 컬렉팅한 작품은 무엇인가요? 회화 작품을 본격적으로 소장하기 전에는 아트 상품과 작은 오브제부터 모았습니다. 제 컬렉션의 출발점은 미스터 Mr.의 작품입니다. 카이카이 키키 갤러리 소속이자 무라카미 다카시의 제자인 그의 작품은 당시 저에게는 상당히 큰 금액이었어요. 주변에서는 지나치게 귀여운 이미지에 치우친 작품이 아니냐며 만류하기도 했고요. 하지만 ‘내가 진심으로 좋아하는 작품이 나에게는 좋은 작품’이라는 믿음으로 구매를 결정했습니다. 이후 작가가 자신의 작업 세계를 발전시키고 작품성을 인정받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제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이 생겼어요. 앞으로도 계속 소장하고 싶은데, 작품의 가치가 높아져 한편으로는 행복한 고민도 생겼습니다. 최근에는 올봄 국제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개최한 로터스 강Lotus L. Kang의 작품을 품에 안았습니다. 사진과 조각, 미디어가 유기적으로 결합된 형식이 독창적이었어요. 젊은 작가임에도 묵직한 분위기와 뚜렷한 존재감이 돋보였고요. 작품 리스트를 받은 뒤 구매를 확정하기까지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작품을 설치해보니 공간과 기대 이상으로 잘 어우러져 만족스러웠습니다. 2026 베니스비엔날레 기간 불가리 파빌리온의 첫 위촉 작가로 신작을 선보였는데, 아직 현장을 보지 못해 아쉬움이 남습니다.


잊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는 작품도 있나요? 매드사키MADSAKI의 작품이 떠오르네요. 국내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시기에 비교적 좋은 조건으로 여러 점을 소장했는데요. 얼마 뒤 카이카이 키키에 합류하며 빠르게 성장하는 작가를 보니 짜릿한 성취감이 밀려왔습니다. 제가 먼저 알아본 작가의 가능성이 시장에서 인정받았으니까요. 또 하나는 우연인지 필연인지 뜻하지 않게 저에게 온 로버트 나바Robert Nava의 작품입니다. 해외 옥션의 서면 응찰 방식인 앱센티 비드Absentee Bid를 이용해 낮은 추정가를 바탕으로 응찰가를 입력한 사실을 까맣게 잊고 지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낙찰 소식을 받았거든요. 예상보다 훨씬 낮은 금액에 작품을 얻어 기뻤지만, 계획에 없던 대금과 수수료를 처리해야 했고, 작품 크기도 커서 운송에 우여곡절을 겪었습니다.


로버트 나바의 ‘Katana Angel’(2018).


처음과 비교해 컬렉팅 취향에도 변화가 생겼나요? ‘가와이이’한 감성의 일본 팝아트는 여전히 좋아해요. 다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전과 다른 결의 작품에도 마음이 향하고 있습니다. 주변 컬렉터들을 보아도 취향이 평생 한결같이 유지되는 경우는 드문 것 같아요. 세월에 따라 내면이 달라지고 미적 취향이 진화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니까요. 컬렉션이 나 자신과 함께 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는 일도 컬렉팅의 묘미예요.


마지막으로 컬렉팅을 시작하려는 사람들에게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전시를 많이 보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여러 전시를 접하다 보면 반복해서 눈길이 가는 이미지와 색감, 장르가 점차 선명해집니다. 그다음에는 크기나 가격에 부담을 갖기보다 예산 안에서 마음에 드는 작은 작품 한 점을 소장해 보세요. 작품을 곁에 두고 생활하는 경험이 쌓여야 비로소 자신만의 기준도 생깁니다. 무엇보다 서두르지 않고 그 과정 자체를 누리는 태도가 중요해요. 즐거움에서 출발한 수집은 삶을 한층 풍요롭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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