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TANAWADEE HEMNITI WINTHER
태국에서 나고 자라 미국과 캐나다를 거쳐 덴마크에 정착한 라타나와디 헴니티 빈터는 서로 다른 문화와 가치가 공존하는 삶을 살아온 인물이다. 지금은 주한 덴마크 대사인 남편 미카엘 헴니티 빈터를 따라 다섯 번째 부임지인 한국에서 새로운 일상을 이어가고 있다. 그의 이력은 한두 줄로 요약되지 않는다. 태국을 처음 벗어난 건 10대 시절,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면서였다. 이후 캐나다로 이민해 토론토 교육청에서 일했고, 주태국 호주대사관 국제교육센터와 덴마크 도로청 국제부, 덴마크 외교부 국제개발청, 이외 여러 컨설팅 기업을 차례로 거쳤다. 그 과정에서 그는 새로운 환경에 자신을 맡기는 일에 점점 익숙해졌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자연스럽게 길러진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한 직장에서 쌓은 경험은 늘 다음 자리를 여는 발판이 됐고, 그렇게 관심의 영역도 교육에서 국제 개발로, 다시 도로 안전으로 넓어져갔다. 그 관심이 가장 뚜렷한 결실을 맺은 곳은 태국. 남편이 주태국 덴마크 대사로 재직하던 시절, 교통사고로 인한 인명 피해를 줄이는 국제 비영리단체인 태국 AIP 재단 대표를 맡아 ‘7% 프로젝트’를 이끌었다. 태국 어린이들의 오토바이 헬멧 착용률이 단 7%에 그친다는 조사 결과에서 출발한 캠페인이었다. 헬멧을 공연 의상으로 즐겨 쓰던 한국 걸그룹 크레용팝과 협업했고, 태국 아티스트들이 그린 헬멧을 경매에 부쳐 그 수익을 사고 예방 사업에 보태고 연구를 진행했다.
그의 이야기를 관통하는 단어를 하나만 고른다면 ‘포용’일 것이다. 그는 문화와 국경이 달라도 사람들의 본질은 다르지 않다고 믿는다. 커리어 역시 모두가 존엄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사회를 향해 있었다. 그가 말하는 포용은 사람 사이의 관계에만 머물지 않는다. 기후변화와 에너지 전환처럼 국경을 넘어 함께 해결해야 할 문제 앞에서도 협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기후변화는 국경을 가리지 않습니다. 모두가 힘을 합쳐 더 친환경적이고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야 모든 사람에게 더 나은 삶의 질과 지속 가능한 미래를 보장할 수 있어요.” 덴마크와 한국이 해상 풍력과 에너지 효율성 등 녹색 에너지 분야에서 협력을 이어가고 있다는 점 역시 그가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해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이다.

라타나와디 헴니티 빈터 캐나다 사이먼 프레이저 대학교에서 교육학 석 사를 취득했다. 덴마크 도로청과 외교부 국제개발청, 컨설팅 기업 등을 거 치며 교육·국제 개발·도로 안전 분야에서 활동했다. 현재는 덴마크 AIP 재 단 대표이사 겸 이사장, 태국 AIP 재단 대표이사를 겸임하고 있다.
오랫동안 ‘안전한 환경’을 만드는 일에 헌신해오셨습니다. 그 여정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인가요? 저는 커리어 전반에 걸쳐 소외 계층을 위해 일해왔습니다. 주류 사회에 적응해야 하는 이민자와 교통사고 위험이 높은 저소득층을 위해 일했죠. 그 모든 과정에서 깨달은 것은 우리 모두가 더 공정하고 더 따뜻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속 가능하고 건강한 사회를 위해 가장 중요한 조건은 무엇일까요? 소외된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국민을 돌보는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높은 사회적 신뢰도 역시 중요한 조건이에요. 덴마크 사회 특유의 신뢰 문화는 사람과 사람 그리고 제도와 정부에 대한 신뢰로 이어집니다. 이는 일상의 마찰을 줄이고 사회 구성원의 삶의 질을 높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죠.
다양한 문화권에서 살아오면서 사람과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살아오며 오히려 사람들의 공통점을 더 많이 발견했습니다. 생김새와 언어는 달라도 누구나 행복하고 존엄한 삶을 바란다는 점에서 인간의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아요.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가치는 문화를 넘어 이어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덴마크 디자인의 본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미니멀하고 클래식하며 유행을 타지 않는 시대 초월적인 아름다움, 그리고 기능성을 우선하는 인간 중심적 디자인을 꼽고 싶습니다. 덴마크 의자들이 보기에만 좋은 게 아니라 실제로 앉았을 때 편안한 것도 그 덕분이죠. 여기에 더해 오랜 장인 정신의 전통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100년 전 디자인한 제품이라도 오늘날까지 훌륭히 기능하는 경우가 많죠. 그래서 덴마크에서는 가구나 식기류를 대대로 물려 쓰는 일이 흔합니다.
특별히 애정하는 덴마크 디자이너나 브랜드가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루이스 폴센Louis Poulsen의 조명을 정말 좋아합니다. 특히 대사관저 계단에 걸린 ‘PH 아티초크’ 펜던트 조명이요. 덴마크와 아무 인연도 없던 시절 캐나다에서 이 램프를 처음 봤을 때 숨이 멎을 만큼 감탄했던 기억이 있어요. 계단 아래 작은 식탁 코너에는 제가 좋아하는 조명 브랜드 중 하나인 르 클린트Le Klint의 플로어 조명이 놓여 있습니다. 로얄코펜하겐Royal Copenhagen 식기류는 관저에서의 식사와 공식 행사에 우아한 분위기를 더해주고요. 집 밖에서는 칼한센앤선과 레고, 노르디스크와 템퍼, 볼라 등과 같은 덴마크 브랜드들이 한국에서도 사랑받는 것을 보며 반가웠습니다. 덴마크 집에는 뱅앤올룹슨, 프리츠 한센 등과 협업해온 디자이너 세실리에 만즈Cecilie Manz의 제품도 많이 소장하고 있습니다.

프리츠 한센의 세븐 체어를
배치한 덴마크대사관저
다이닝 룸의 모습.
덴마크 디자인 철학은 사람들의 일상과 삶의 방식에 어떻게 스며들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덴마크 사람들은 집이라는 공간을 아끼고 그곳에서 시간 보내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공간을 따뜻하고 아늑한 ‘휘게hygge’의 장소로 만드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죠. 국제 개발과 도로 안전과 관련한 저의 시각에서는 특히 공공 공간의 디자인이 인상적입니다. 공원에 어린이들이 교통안전을 배우고 자전거 연습을 할 수 있는 미니어처 도로가 마련돼 있는 식이죠. 좋은 디자인은 소수의 특권이 아니라 모두가 누려야 한다는 사상이 깔려 있는 덴마크의 평등한 사회구조와 민주적 가치가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이 ‘휘게’를 행복의 방식으로 이야기합니다. 대사 부인께서 생각하는 휘게의 본질은 무엇인가요? 휘게의 본질은 아늑함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보내는 편안한 시간을 즐기고 그 순간에 몰입해 만끽하는 것이죠. 제게는 코펜하겐이라는 도시 자체도 아주 ‘휘겔리hyggelig’합니다. 차갑고 익명적인 콘크리트 정글이 아니라 사람의 눈높이에 맞춰 지은 듯한 아담하고 유기적인 건물들로 이루어져 있거든요. 도시 자체가 사람을 환영하는 듯 따뜻하며 아늑하죠. 추운 겨울이 되면 어두워진 코펜하겐 거리 속 건물과 가로등 사이로 스며 나오는 노란 불빛을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한국에서의 시간은 대사 부인께 어떤 의미로 다가오나요? 항상 와보고 싶었기 때문에 남편이 한국에 부임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정말 기뻤습니다. 한국은 덴마크를 비롯해 그간 제가 살았던 나라들과는 정말 다릅니다. 친절함, 상냥함, 이 두 단어가 제가 지금까지 경험하고 있는 한국입니다. 제가 대사 부인인 걸 모르는 사람에게서도 느낄 수 있어요.
최근 특별히 영감받은 책이나 공간, 여행지가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최근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소설이지만 한국 사회와 문화를 들여다보는 또 다른 창구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 머무른 9개월 동안 인천과 신안, 경주, 안동, 강원도를 다니며 아름다움과 역사, 문화에 깊이 감동받았습니다. 앞으로 더 탐험할 생각에 벌써 설렙니다. 올해 광주비엔날레와 경기 도자기비엔날레에 덴마크가 참가하고 건축가 비야르케 잉엘스의 개인전도 열릴 예정이라 무척 기대하고 있습니다.
대사 부인께서 생각하는 ‘진정한 럭셔리’란 무엇인가요? 초연결된 디지털 시대 속에서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더 많은 시간을 혼자, 기기와 함께 보내고 있죠. 그래서 제게 진정한 럭셔리란 사람들과 진심 어린 관계를 맺고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혼을 풍요롭게 하고 관계를 공고히 하며 삶에 충만함을 가져다준다고 믿습니다. 사람들과 아늑한 시간을 즐기는 휘게가 바로 그 좋은 예입니다. 본질에 집중하고 사람을 중심에 두는 덴마크 디자인 철학과도 맞닿아 있는 지점이죠.
A LEGACY OF DANISH DESIGN
주한 덴마크대사관저에서 마주한 덴마크 디자인의 유산.

(왼쪽) 카이 보예센의 원숭이 오브제 클래식 덴마크 디자인의 대명사가 된 카이 보예센의 인형. 창의적이고 유쾌한 디자인이 특징이다.
(오른쪽) 카이 보예센Kay
Bojesen의 병정 오브제
60여 년 전, 덴마크 대사가
부모님께 선물받은 목제
인형. ‘좋은 디자인은
누구나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철학을 바탕으로
제작한 제품이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예른 웃손Jørn Utzon의 오페라 펜던트 조명 예른 웃손이 오렌지 껍질의
구조에서 영감받아 디자인한 조명. 덴마크를 대표하는 건축가로,
호주의 상징적 건축물인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의 설계자이기도 하다.
헤닝 코펠Henning Koppel의 ‘HK’ 피처
덴마크 조각가 헤닝 코펠이
리빙 디자인 브랜드 조지 젠슨과 함께
선보인 피처. 덴마크 디자인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다.
예르겐 묄레르Jørgen Møller의 엘리펀트 오프너
코끼리의 코 부분을 이용해 병뚜껑을 따는 오프너로 조지 젠슨과 함께
선보인 것. 위트 있는 스칸디나비아 디자인 오브제로 손꼽힌다.

(왼쪽) 크리스티안 베델Kristian Vedel의 버드BIRD 시리즈 1959년 건축가 크리스티안이 디자인한 오브제. 원하는 방향으로 머리를 배치해 행복, 슬픔, 호기심 등 다양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
(오른쪽) 크리스티나 스트란Christina Strand이 디자인한 의자 2002년 덴마크 가구산업협회가 주최한 ‘왕세자를 위한 의자’ 디자인 공모전의 우승작.

로얄코펜하겐 테이블 세팅 1775년에 설립한 덴마크 수공예 도자기 브랜드 로얄코펜하겐으로 꾸민 덴마크대사관저 테이블 세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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