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렉터 박시연의 수집 알고리즘

자신의 심연을 직관적으로 꺼내 보여주는 듯한 작품을 좇아온 컬렉터 박시연. 본능에서 출발한 취향 위로 수많은 경험과 선택이 겹겹이 쌓였고, 그는 그렇게 형성된 컬렉션을 ‘나의 알고리즘’이라 부른다.

EDITOR 박이현 PHOTOGRAPHER 이우경


정수정의 ‘Swooping’(2025) 앞에서 권오상의 ‘Buddah & Bird’(2013~2022)를 들고 서 있는 컬렉터 박시연.


박시연PARK SEAN IT 기업을 14년 동안 다니고 있는 부지런한 직장인. 퇴근 후에는 평범함을 넘어 개성 넘치는 것들을 좇는 컬렉터로 변신한다. 아름답고 검증된 작품보다는 나의 또 다른 내면을 끌어내주는 도전적인 작품에 매료되는 편이다.


‘조사하고, 찾아내고, 공부하는’ 젊은 컬렉터의 표본이라는 소문이 자자하더라고요. 이유를 아시나요? 미술 작품을 비롯해 무엇이든 모으는 데 흥미와 희열을 느낍니다. 음반, 신발, 잡지, 책 속의 문장 등 취향에 따라 하나둘 수집하다 보니 저축의 즐거움은 알지 못했지만, 대신 대상을 파고드는 습관을 얻었고, 마침내 미술 컬렉팅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제 SNS 피드는 미술 관련 콘텐츠로만 채워져 있어요. 갤러리에서 보내오는 전시 오프닝 안내와 구독 중인 뉴스레터, 아트페어 업데이트까지 한꺼번에 들어오니 과부하 상태이기도 하고요. 그렇다고 유명세나 경매 최고가, 거장의 이름만 무작정 좇지는 않습니다. 제 취향 안에서 자꾸 눈에 밟히는 한 점이 생기면 관심 목록에 올려두고 본격적으로 탐색하죠. 작가의 인스타그램과 작품 이미지, 전시 이력은 물론 인터뷰도 빠짐없이 살펴봅니다. 결과물만큼 창작자의 태도와 신념, 관점도 세심하게 들여다보고요. 저에게 컬렉팅의 90%는 작품 한 점을 알아가는 시간입니다. 쏟아지는 정보 속에서도 유독 시선을 붙드는 작가와 작품이 있고, 그런 대상은 어느새 소유 욕구를 자극해요. 이렇게 헤매는 동안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끊임없이 질문하며 왜 이 한 점이어야 하는지 답을 찾기도 합니다.


“책 속의 문장을 모은다”라는 표현이 인상적입니다. 지금도 자주 되뇌는 구절이 있나요?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깊이에의 강요>에 나오는 “그 젊은 여류 화가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고, 그녀의 작품들은 첫눈에 많은 호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그것들은 애석하게도 깊이가 없다”와,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 중 “나는 그림을 그려야만 하오. 그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소. 물에 빠진 사람에게 수영을 잘하고 못하고는 중요하지 않소. 우선 빠져나오는 게 먼저지. 그렇지 않으면 빠져 죽을 뿐이오”라는 대목을 좋아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쓸데없는 것에 집착하며, 남이 정해 놓은 잣대에 나를 맞추려 애쓰는지, 그리고 온전히 내 것을 해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에요. 잘하든 못하든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해나가는 것, 제가 지켜나가고 싶은 태도입니다.


전다화, ‘나 같은 여자A Woman like Me’, 2024


마음에 둔 작품을 소장하기까지 어떤 단계를 거치나요? 관심을 두고 있던 작가가 아시아에서 전시를 열거나 아트페어를 통해 한국에 온다는 소식을 접하면 갤러리에 이메일을 보냅니다. 오랫동안 지켜봤다는 점을 알리는 한편, 작가에 관한 자세한 설명이나 공식적으로 공개되지 않은 이야기를 전해줄 담당자와 교류의 물꼬를 트는 것이죠. 또 프리즈 서울을 위해 방문한 갤러리스트와 며칠 동안 인사를 나누며 정보를 공유하고, 기회가 닿으면 디너나 파티에서 라포를 형성해요. 그러나 페어 기간에는 결론을 내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서로를 알아가며 신뢰를 다지는 시간이 어떤 작품과 인연을 맺게 될지를 좌우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공을 들여도 구매가 성사되는 건 어려운 일이에요. 적당한 사이즈의 작품이 나와야 하고, 쟁쟁한 컬렉터들 사이에서 제가 선택되어야 하며, 가격도 감당 가능한 수준이어야 하거든요. 그 시점에 다른 작품보다 이 한 점을 우선시해야 할 이유도 스스로 납득해야 하고요. 여러 조건이 동시에 맞아야 하는 복잡한 선택입니다. 구매를 결심했더라도 경쟁이 치열하거나 갤러리와 처음 인연을 맺는 상황일 수 있기에, 신뢰할 만한 갤러리와는 평소에도 꾸준히 교류합니다.


가장 처음 소장한 작품과 최근 구매한 작품은 무엇인가요? 첫 작품은 무라카미 다카시의 판화 연작 ‘Flower Ball’ 중 하나였고요. 두아르트 스퀘이라 서울에서 개인전을 연 양유연 작가의 ‘고질병’(2025)을 얼마 전 품에 안았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만난 작품도 궁금합니다. 근래 저를 애태운 작품은 포피 존스Poppy Jones의 ‘Modern Love’(2025)입니다. 수년 전부터 포피 존스의 작품을 바라왔지만, 워낙 인기가 높아 감히 넘보지 못했어요. 그러다 전속 갤러리가 프리즈 서울에 참가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욕심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페어가 시작되기 전부터 갤러리와 연락을 이어가며 제가 얼마나 진심인지 잔뜩 티를 내둔 상태였죠. 그런데 현장에서 보니 저 말고도 그의 작품을 원하는 한국 컬렉터가 많더라고요. 부스에서 디렉터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여러 유명 컬렉터가 구매 가능 여부를 물었고, 그런 광경을 볼 때마다 점점 초조해졌습니다. 결국 그 한 점은 저보다 훨씬 멋지고 열정 넘치는 컬렉터에게 떠나갔고, 저는 입맛만 다셨어요. 이후 해외 아트페어에 새로운 작품이 출품될 때마다 연락이 오긴 했지만, 크기나 이미지가 제가 찾던 것과는 결이 맞지 않았습니다. 마음에 드는 작품이 등장했을 때는 운송비가 만만치 않았고요. 사실 여러 차례 제안을 받고도 확답하지 않으면 더는 연락이 오지 않을 수 있어요. 갤러리 입장에서는 간만 보고 번거롭게 하는 손님으로 인식할 테니까요. 그래서 1년 뒤 다시 열린 프리즈 서울에서는 기대를 접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직 관심 있어? 너에게 꼭 맞는 작품이 이번에 서울에 갈 거야”라는 왓츠앱 메시지가 날아왔죠. 오랫동안 연락을 이어온 점과 좋은 작품을 기다려온 태도에 대한 고마움도 함께요. 여러 제안을 지나친 끝에 마침내 만난 작품이 ‘Modern Love’입니다. 역시 진심은 통하는 법인가 봐요.


톰 하우스Tom Howse의 ‘Two Nosey Pigeons Looking through the Window’(2022).


2023년 ‘평범한 직장인 컬렉터’로 소개된 인터뷰를 봤어요. 당시 “대중적이지 않더라도 제가 만족할 수 있는 작품을 골라요”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동안 변화가 생겼나요? 예전에는 소장할 만한 작품을 먼저 봤다면, 이제는 소장할 수 없을 것 같은 작품에도 다가가려 합니다. 예로 2.5m가 넘는 대형 회화나 캔버스가 아닌 장지에 채색한 작업, 패브릭과 입체 작품 등으로 시야를 넓히고 있어요.


현실적인 조건을 넘어서는 작품으로 시야를 넓힌 계기는 무엇인가요? 지금도 계속 떠오르는 한 점이 있다면요? 그런 작품은 현실과 타협하지 않은 것들이에요. 과격한 이미지, 압도적인 규모, 도전과 실험이 응축된 재료처럼 말이죠. 그런데 어느 날 문득 타협하는 쪽은 오히려 나였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적당한’ 사이즈, ‘인기 있는’ 도상, ‘소장하기 쉬운’ 재료만 골라온 내 모습이 스쳐 가면서 갑자기 부끄러워졌습니다. 그때부터 선입견을 내려놓고 전시장에 들어서고 있어요. 지금은 안지산 작가의 250×260cm 작품 ‘폭풍이 온다’가 늘 마음속에 있습니다. 크기부터 벅찬데, 제가 그 폭풍 속으로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는지, 끝내 이겨낼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르겠네요.


갤러리스트와 며칠 동안 인사를 나누며 정보를 공유하고, 기회가 닿으면 디너나 파티에서 라포를 형성해요. 서로를 알아가며 신뢰를 다지는 시간이 어떤 작품과 인연을 맺게 될지를 좌우한다고 생각합니다. 박시연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 제니퍼 커발로Jennifer Carvalho, 정수정, 안지산, 옥승철, 최지원, 라이몬트 렘스트라Raymond Lemstra, 고니시 도시유키Konishi Toshiyuki의 작품.


컬렉팅할 때 염두에 두는 요소는 무엇인가요? 작가의 태도, 갤러리의 신념, 그리고 나 자신의 의지.


이렇게 구성한 컬렉션의 바탕에는 어떤 주제가 깔려 있나요? 취향에 따라 자연스럽게 컬렉션을 꾸렸다고 믿어왔지만, 돌이켜보면 수많은 경험이 포개진 결과물인 듯해요. 하나의 알고리즘인 셈이죠. 외면과 내면의 충돌, 일부가 전체를 암시하는 구조, 불편함이 주는 안락, 죽음이 환기하는 생명처럼 서로 맞부딪치는 감각에 끌립니다. 그런 긴장을 통해 제 안의 깊은 곳을 건드리는 작품에 끌려요. 그래서 아름다운 풍경이나 평화로운 장면보다는, 투쟁적이고 슬프며 과격하고 불편한 이미지를 더 자주 선택합니다.


지금 주목하는 갤러리와 작가는 누구인가요? 키앙 말링게Kiang Malingue 갤러리의 쩡젠잉Tseng Chien-Ying, 이리 아츠Yiri Arts의 스융쥔Shih Yung-Chun, 두아르트 스퀘이라의 양유연 작가입니다. 더불어 안지산, 우한나, 정수정 작가도 눈여겨보고 있어요.


꿈의 컬렉션 목록에는 어떤 작가가 있나요? 미카엘 보레만스Michaël Borremans와 이시다 데쓰야Ishida Tetsuya의 회화, 류인과 폴커르트 더용Folkert de Jong의 조각 작품입니다.


최윤희의 ‘주머니로 들어가기 #15’(2025).


앞으로 컬렉션을 어떤 방향으로 확장할 계획인가요? 애초에 컬렉팅으로 욕망을 채우거나 부를 이루려는 목적은 없었습니다. 이토록 설레고 아름다운 세계가 오래 지속되도록 제 몫을 다할 뿐이에요. 갤러리는 전시를 열고, 작가는 창작에 몰두하며, 저는 작품을 곁에 두는 것이지요. 이러한 순환의 한 축을 담당한다고 할까요? 한 걸음 더 나아가자면, 저는 지난 14년 동안 IT 업계의 서비스 기획과 전략 분야에서 일했습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미술 신에 보탬이 되는 서비스를 개발해 선보이는 것이 다음 목표입니다. F&B 시장이 큰 산업으로 성장한 데에는 콘텐츠의 힘이 컸습니다. 같은 원리가 미술계에도 통할 것으로 믿어요.


갓 컬렉팅에 발걸음을 내디딘 사람들을 위한 조언이 있을까요? 작품 정보는 최대한 부지런히 찾아보되, 눈과 귀를 닫으세요. 다만 차단해야 할 것은 정보 자체가 아니라 타인의 권유와 유행입니다. 자신의 취향과 감각에 충실하세요. 컬렉팅은 주식 종목을 고르는 일이 아닙니다. 가격이 내려간 경우보다, 남의 말만 믿고 구매한 작품이 더 오래 후회로 남습니다. 그리고 소장했다면 충분히 즐기고 아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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