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니스 자르디니 공원
중앙의 전시 공간 ‘스파치오
에세드라’에 자리한
‘불가리 파빌리온’.
사진: T-Space

불가리 파빌리온에서 개인전을 진행 중인 로터스 강. 사진: 불가리
로마에서부터 이어온 오래된 약속
불가리와 예술의 관계를 최근의 비엔날레나 아트페어만으로 설명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 관계의 오랜 궤적에서 로마의 문화유산 복원은 중요한 축을 이룬다. 창립 130주년을 맞은 2014년 불가리는 150만 유로를 기부해 스페인 계단 복원에 나섰다. 이곳은 창립자 소티리오 불가리Sotirio Bulgari가 1884년 첫 매장을 열었던 비아 시스티나와 현재 불가리 스토어가 자리한 비아 콘도티 사이에 놓인 장소라는 점에서 특별한 선택이었다. 이듬해에는 카라칼라 목욕장Terme di Caracalla 서쪽 입구에 자리한 고대 체육관 팔레스트라Palestra의 다채색 모자이크를 되살리는 데 힘을 보탰고, 2017년에는 토를로니아 재단Fondazione Torlonia과 장기 파트너십을 맺어 고대 그리스·로마 조각으로 이뤄진 토를로니아 컬렉션의 복원과 전시를 뒷받침했다. 또 2019년에는 평화의 제단Ara Pacis의 조명을 새로 밝히는 프로젝트를 후원했다.
이러한 불가리의 행보는 2024년 ‘불가리 재단Fondazione Bvlgari’이 출범하기 훨씬 전부터 시작됐다. 오늘날 불가리 재단은 메종의 문화 후원을 체계화하는 한편, 역사적 유산의 보존을 넘어 동시대 미술과 교육, 장인 기술의 전승까지 활동 반경을 넓혀가고 있다. 얼핏 오래된 건축이나 조각을 지키는 일과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결과물의 탄생을 돕는 것은 평행선을 달리는 듯하다. 그러나 이미 남겨진 것을 다음 세대로 건네고, 앞으로 남을 무언가가 태어날 환경을 조성한다는 점에서 두 방향은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다.

불가리 재단 설립 후
첫 전시가 국립 마르차나
도서관에서 진행 중이다.

국립 마르차나
도서관에서 모니아 벤
하무다가 작품을
제작하는 모습.
사진: 불가리 재단
베니스, 세계 미술 중심에 서다
2026년 불가리의 아트 활동에서 베니스가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메종은 올해부터 2030년까지 세 차례 열리는 베니스비엔날레 국제미술전의 독점 파트너로 장기 협력에 들어갔다. 특정 국가관이나 단일 프로젝트에 한정한 후원과는 거리를 둔 선택이다.
5월 9일부터 11월 22일까지 베니스에서 선보이는 두 프로젝트는 성격이 상이하지만, 모두 장소가 지닌 조건에서 출발한다. 먼저 자르디니 공원 내 ‘스파치오 에세드라Spazio Esedra’의 ‘불가리 파빌리온’에서는 한국계 캐나다 작가 로터스 강Lotus L. Kang의 개인전 〈The Face of Desire is Loss〉
파빌리온에서 시간이 작품의 표면을 실제로 바꿔놓는다면, 국립 마르차나 도서관에서는 오랫동안 축적된 지식과 기록이 작업의 출발점이 된다. 이곳에서는 불가리 재단 설립 후 첫 전시가 열리고 있다. 모니아 벤 하무다Monia Ben Hamouda는 읽을 수 없는 글자를 연상시키는 네온 기호로 언어와 지식의 관계를 묻는다. 여러 도서관에서 기증받은 책과 자신의 아카이브 이미지를 엮어 거대한 서가를 세운 라라 파바레토Lara Favaretto는 지식이 생산되고 전달되는 경로를 되짚는다. 이들의 핵심은 지식을 고정된 체계가 아닌 끊임없이 해석되고 변화하는 것으로 바라본다는 것. 불가리가 진행하는 두 개의 프로젝트는 맡은 역할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로터스 강의 전시에서는 신작 제작을 지원했고, 마르차나 도서관에서는 재단 이름을 내세운 첫 기획전을 마련했다.
올해 한국과의 접점은 제16회 광주비엔날레다. 이번 광주비엔날레는 ‘너는 네 삶을 바꿔야 한다’를 주제로 9월 5일부터 11월 15일까지 열린다. 베니스에서는 신작 커미션과 자체 전시를, 광주에서는 국제 미술전 후원을 택했다. 같은 해 유럽과 한국의 주요 비엔날레에 이름을 올리면서 각기 다른 역할을 맡은 것이다.

제14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사전 프로그램 <포란> 전시 전경. 사진: 아인아

<유영국: 산은 내 안에 있다> 전시 전경. 사진: 김상태
Frieze Seoul, 그다음 작업을 위해
프리즈 서울에서 불가리의 후원은 작가의 신작 제작에 초점을 맞춘다. 불가리는 2023년부터 프리즈 서울 아티스트 어워드Frieze Seoul Artist Award를 4년 연속 후원하고 있다. 한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작가가 새로운 커미션을 구현해 국제 미술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페어 현장에서 발표할 수 있도록 돕는 프로그램으로, 김태리와 전인으로 구성된 시각예술 컬렉티브 야광Yagwang이 제4회 수상자로 선정됐다. 야광은 9월 2일부터 5일까지 코엑스에서 ‘Facade Zone’(2026)을 처음 공개한다. 페어 부스의 가벽을 해체해 목재 골조로 다시 세우고, 한국 불화의 도상에서 가져온 의복과 장식 요소를 라텍스와 금속 조각으로 풀어낸 장소 특정적 설치 작업이다. 지난해 프리즈 라이브에서 퍼포먼스를 펼친 야광은 올해 공간 전체를 사용하는 형식으로 활동의 폭을 넓혔다.
프리즈 서울 아티스트 어워드는 이미 완성된 작품을 평가해 상을 건네는 방식과는 결이 다르다. 작가 선정 뒤 아이디어가 신작으로 완성돼 페어에 공개되기까지의 전 과정을 포함하기 때문. 불가리는 제1회 프리즈 서울 아티스트 어워드부터 이 과정을 후원해왔다. 지원 시점을 놓고 보면 앞서 살펴본 문화유산 복원과는 정반대다. 문화유산 복원이 이미 존재하는 것을 지키는 일이라면, 프리즈 서울의 지원은 작품이 구상 단계에 있을 때부터 작가와 손을 맞잡는 것이다. 작가의 아이디어가 시작됐을 때부터 실제 공간과 재료를 만나 작품으로 구현되는 순간까지 뒷받침한다는 의미다.
SeMA, 하나의 전시보다 긴 관계
서울시립미술관(SeMA)과의 협력은 하나의 전시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불가리는 2025년 제13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강령: 영혼의 기술>(2025년 8월 26일~11월 23일)을 후원한 뒤, 2026년 제14회 사전 프로그램 <포란>(5월 20일~7월 5일)에도 참여했다. 본 비엔날레가 막을 내린 뒤에도 사전 프로그램으로 협력의 범위를 넓힌 것이다.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에서 열린 <포란>은 2027년 제14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를 앞두고 지난 30여 년간 쌓인 주제와 미디어 실천을 돌아보는 자리였다. 포란이란 새가 알을 품는 행위를 말하는 단어로 지나온 시간을 되짚으면서 아직 열리지 않은 다음 회차를 준비한다는 뜻을 품고 있다. 회화와 조각, 설치, 영상 등 14점의 작품과 낭독 공연을 한데 구성한 전시에선 차기 비엔날레가 펼쳐낼 가능성을 미리 가늠할 수 있었다.
비슷한 시기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는 반대 방향의 시간을 바라보는 전시가 열렸다.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유영국 탄생 110주년 기념 회고전 <유영국: 산은 내 안에 있다>(5월 19일~10월 25일)로, 불가리가 후원사로 함께했다. 전시는 작가의 중요한 예술적 전환점인 1964년에서 시작해 초기 아방가르드 실험기로 거슬러 올라갔다가 1960~1970년대 추상 시기와 만년의 작업에 이른다. 1930년대 작부터 1999년 절필작까지 60여 년의 여정을 아우르며, 미공개작 등과 아카이브 170여 점을 한자리에 모았다.
남서울미술관에서는 다가올 비엔날레를 예고하고, 서소문본관에서는 작가의 60여 년을 돌아봤다. 시간의 방향이 엇갈리는 전시들을 매개로 불가리와 서울시립미술관의 협력은 2025년 본 비엔날레에서 2026년 사전 프로그램과 유영국 회고전으로 자연스럽게 뻗어나갔다. 연이은 후원을 통해 불가리는 동시대적 실험과 한국 추상미술을 조명하는 자리까지 접점을 넓혔다.

2025년 제3회
프리즈 서울 아티스트
어워드 수상 작가 임영주와
진행한 아티스트 토크.
사진: 불가리 코리아

지난 4월 송은에서 개최된
‘송은×스테델릭: 비디오
클럽’ 프레스 스크리닝 모습.
사진: 불가리 코리아
송은 × 스테델릭 뮤지엄, 전시가 끝난 뒤에도 남는 지원
비영리 문화 공간 송은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스테델릭 뮤지엄Stedelijk Museum이 협업한 프로젝트 ‘송은×스테델릭: 비디오 클럽SONGEUN×STEDELIJK: Video Club’에선 비디오아트가 두 도시를 오간다. 2023년부터 2024년까지 네 차례 진행된 뒤, 2026년 불가리 코리아의 후원으로 재개했다. 올해는 스테델릭 소장 비디오아트를 네 차례에 걸쳐 서울 관객에게 소개한다. 한국 작가의 미디어 작품이 암스테르담을 향하는 반대 방향의 이동도 있다. 송은문화재단 전시 프로그램에서 작품을 선보인 미디어 작가 4명을 선정, 작품을 한 점씩 매입해 총 네 점을 스테델릭 뮤지엄에 기증하는 것. 스테델릭의 컬렉션이 서울에서 상영되는 동안 한국 작가의 작품은 암스테르담의 소장품 목록에 새로 이름을 올린다. 이로써 ‘국제 교류’라는 말은 작품의 실제 매입과 기증이라는 구체적인 결실을 맺는다.
한 번의 스크리닝은 일정이 끝나면 막을 내리지만, 매입된 작품은 미술관의 소장품으로 남는다. 그 결과 작가에게는 해외 기관의 소장 이력이 생기고, 미술관의 컬렉션에는 한국 동시대 미술 네 점이 새로 더해진다. 이를 위해 불가리 코리아는 프로그램 후원뿐 아니라 소장품 선정 과정에도 함께했다.
예술 곁에 오래 머무는 법
불가리의 아트 파트너십을 한데 놓고 보면, 무엇을 지원하느냐 못지않게 어느 단계에서 역할을 맡느냐가 눈에 띈다. 문화유산처럼 이미 존재하는 것을 보존하는 일부터 아직 형태가 잡히지 않은 신작, 다음 비엔날레를 예고하는 프로그램, 전시 이후 미술관 소장품으로 편입되는 단계까지 그 시기는 제각각이다. 2024년 출범한 불가리 재단은 오랜 시간 축적해온 문화 예술 후원을 지속적으로 운영하는 기반이 됐다. 문화유산은 미래 세대에게 건너가고, 신작은 처음 모습을 드러내며, 비엔날레는 다가올 회차를 준비하고, 작품은 컬렉션 안에서 새로운 시간을 얻는다. 이처럼 불가리는 그 전환의 순간마다 필요한 몫을 맡아왔다. 한 번의 후원으로 이름을 남기기보다, 작품과 기관이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과정에 머물며 예술과의 시간을 길게 쌓아온 것이다.
COOPERATION 불가리(6105-2120)
Related articl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