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종 설립자 엔리코 그라시 다미아니가 화려하고 혁신적인 벨 에포크 시대의 영화 예술에 감동받아 제작한 ‘벨 에포크’ 네크리스는 다미아니.
자연이 흐르던 시대

플래티넘과 다이아몬드로 이뤄진 ‘부쉐론 다이아몬드’ 초커, 1910, ©Albion Art Jewellery Institute
“우리 20년대로 돌아가지 말아요. 그냥 여기에서 살아요.” 우디 앨런Woody Allen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여주인공 아드리아나가 주인공 길에게 속삭이며 한 말이다. 1920년대 파리를 동경하던 길과 함께 마차를 타고 1890년대로 넘어온 그녀는 드가Degas와 고갱Gauguin, 로트레크Lautrec를 만나자마자 두 눈을 반짝인다. 두 사람이 도착한 그 레스토랑은 지금도 파리 한복판에서 영업 중이다. 도대체 1890년대 파리는 뭐가 그리 대단했던 걸까?

(왼쪽부) ‘Bow’ 브로치, 1905, ©Albion Art Jewellery Institute. (오른쪽) ‘Lavalliere’ 네크리스, 1910, ©Albion Art Jewellery Institute.
막심 레스토랑, 다이아몬드의 전쟁터
‘막심’ 레스토랑. 19세기 말 비스트로로 문을 열어 세기가 바뀔 무렵 사교의 중심지로 탈바꿈한 곳이다. 훗날 레노베이션할 때 의자와 쿠션 사이에서 주얼리와 동전이 엄청나게 쏟아져 나왔다고 하니 호사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간다. 이 도시에서 주얼리는 무기였다. 화류계 귀족으로 통하던 그랑드 오리종탈Grandes Horizontales에서 라 벨 오테로La Belle Otero와 리안 드 푸지Liane de Pougy 두 여인의 라이벌전은 유명했다. 어느 날 밤, 오테로가 막심에 입장했다. 티아라, 목걸이, 볼레로, 심지어 앵클릿까지 온몸이 다이아몬드로 빛나는 모습에 레스토랑 안이 일순간 조용해졌고 승자는 정해진 듯 보였다. 그때 리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심플한 흰색 드레스에 목걸이 하나뿐이었다. 사람들이 웅성거렸고 오테로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려던 찰나, 시선이 리안의 뒤로 쏠렸다. 따라오는 하녀의 벨벳 쿠션 위로 리안의 주얼리가 산더미처럼 쌓여 반짝이고 있었다.
벨 에포크를 수놓은 쌍두마차, 플래티넘과 진주
이 시대 주얼리를 특별하게 만든 건 플래티넘이었다. 녹는점 1772°C. 금보다 약 700°C나 높아서 오랫동안 주얼러들에게는 다루기 어려운 금속이었다. 고온 토치와 세공 기술이 발전하면서 플래티넘은 셔츠 단추 같은 작은 장식에서 시작해 점차 귀고리와 넥타이핀으로 영역을 넓혀갔다. 게다가 은처럼 변색되지 않으면서도 강도가 높아 가늘고 섬세한 금속 선으로 보석을 지탱할 수 있었다. 이전까지 다이아몬드는 금이나 은 위에 올려야 했고 금속이 보석 옆면을 두껍게 감싸는 세팅이 흔했다. 하지만 플래티넘이 이 공식을 바꿔놓았다. 가는 금속 선만으로도 다이아몬드를 충분히 지탱할 수 있게 되자 빛이 투과하는 면이 넓어졌다. 주얼리는 나날이 가벼워졌고 다이아몬드의 광채는 어느 때보다 찬란해졌다. 20세기 초 더욱 강력한 토치가 등장하면서 플래티넘은 마침내 하이 주얼리의 무대 한가운데로 올라섰다. 마침 전기 조명이 보급되던 시기였다. 희미한 가스등 아래에서 보던 다이아몬드와 백열등 아래에서 빛나는 다이아몬드는 전혀 다른 존재였다. 장인들은 이 새로운 빛을 극대화하기 위해 더욱 섬세한 연마와 세팅에 몰두했다. 두껍고 무거운 실버가 주얼리의 갑옷이었다면 플래티넘은 그 위를 수놓는 정교한 자수였다. 이 시대를 빛낸 보석은 무엇보다 진주였다. 천연진주가 다이아몬드와 동등한, 어쩌면 더 귀한 대접을 받던 시절이다. 양식 진주가 아직 상용화되기 전이라 바다와 민물에서 건져 올린 천연진주만이 유일한 선택지였고, 상질의 동그란 진주는 같은 중량의 다이아몬드보다 네 배나 비쌌다. 1917년 까르띠에가 뉴욕 5번가 건물을 살 때 사실상 대금으로 치른 것도 천연진주 목걸이 두 줄이었다. 진주와 다이아몬드는 ‘화이트 온 화이트’라 불리는 조합을 이뤘다. 플래티넘 위에 다이아몬드가 촘촘히 박히고 그 사이로 진주가 우아하게 자리 잡는 식이다. 브로치 중앙에 커다란 진주가 빛나거나 목걸이 사이사이에 진주 드롭이 리듬감 있게 배치되기도 했다. 이 조합은 흰색이나 연한 파스텔 톤 새틴 드레스와 더없이 잘 어울렸고, 전기 조명 아래에서 여인들을 한층 더 눈부시게 만들어주었다.

(왼쪽) ‘막심’ 레스토랑에 방문한 오드리 헵번. 1959, @maxims.de.paris (오른쪽) 라 벨 오테로, 1890
갈런드의 여인들
벨 에포크 주얼리를 정의하는 단어가 있다면 ‘갈런드garland’, 즉 화환이다. 18세기 프랑스 궁정 예술에서 영감을 받은 양식으로 리본 매듭, 꽃다발, 월계수 가지가 레이스처럼 얽힌 형태로 다이아몬드 주얼리 위에 새겨졌다. 나폴레옹 3세의 황후 외제니Eugénie가 마리 앙투아네트 시대 주얼리를 열렬히 동경했던 덕분에 100여 년 전의 모티프가 화려하게 부활할 수 있었고 까르띠에, 부쉐론, 쇼메 같은 파리의 메종들이 이 양식을 완성했다. 그중에서도 리본 매듭이 특히 사랑받았다. 섬세하게 접힌 리본, 양끝이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매듭, 중앙에 자리한 다이아몬드는 실크 리본이 금속으로 변한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정교했다. 여기에 밀그레인 기법이 더해졌다. 플래티넘 테두리를 따라 미세한 알갱이를 촘촘히 새기면 금속 가장자리가 레이스처럼 섬세해졌다. ‘아름다운 시대’라는 이름 그대로 유례없이 긴 평화와 번영의 시기. 화가, 음악가, 문인들은 예술을 꽃피웠고 상류층은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매일 밤 파티가 열렸고 여인들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다이아몬드와 진주로 빛났다. 하지만 그 빛이 영원할 수는 없었다. 막심을 시끌벅적하게 만들던 여인들 가
운데 적지 않은 이들이 쓸쓸한 말년을 맞이했다. 부유한 애인에게 버림받은 여인도 있었고 라 벨 오테
로처럼 도박과 사치로 전 재산을 탕진한 여인도 있었다. 주얼리는 하나둘 경매장으로 흘러갔고 그녀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도 점점 사라졌다. 찬란하고 허무했던 시대와 함께.

장미에 대한 이브 피아제의 열정과 하우스의 금세공 기술이 만나 영원히 지지 않는 꽃의 미학을 완성한 ‘로즈’ 펜던트와 ‘로즈’ 링 모두 피아제.

플래티넘에 다이아몬드를 수놓은 잎사귀를 옐로 골드 줄기로 엮어 식물의 생동감을 재현한
‘쟌 슐럼버제 바이 티파니, 리브스’ 네크리스와 골드·플래티넘에 다이아몬드를 세팅한 ‘쟌 슐럼버제 바이 티파니,
쓰리 리브스’ 이어 클립 모두 티파니. 나폴레옹 3세와 외제니 황후의 유산을 계승하며,
69마리의 벌 셰이프로 방돔 광장의 기둥을 재현한 비Bee 보틀의 ‘체리 블로썸 밀레짐’ 향수는 겔랑.

조세핀 황후의 상징인 깃털 장식을 재해석해
화이트 골드와 아코야 진주로 우아한 실루엣을 완성한
‘조세핀 아그레뜨’ 링과 이어링, 네크리스 모두 쇼메.
에드가르 드가, ‘공연의 끝, 무용수 인사하다’, 67×38cm, 1876

대기와 빛이 충돌하며 빚어낸 신비로운 오로라를 화이트 골드 곡선과
남양진주의 영롱한 광채로 형상화한 ‘오로라’ 네크리스와 이어링 모두 타사키.

시인 단테Dante의 연인이자 뮤즈인 베아트리체Beatrice처럼 문학 작품 속 사랑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은 ‘로만자 지네브라’ 링은 부첼라티. 툴루즈 로트레크, ‘물랭 루주에서, 춤’, 115.6×149.9cm, 1890
WRITER 윤성원 주얼리 히스토리언이자 한양대 공학대학원 보석학과 겸임 교수. <젬스톤 매혹의 컬러>, <세계를 매혹한 돌> 등을 집필했으며 주얼리의 역사, 보석학적 정보 등 모든 분야를 융합적으로 다루고, 나아가 보석업계의 인재 양성에 기여하고 있다.
COOPERATION 겔랑(080-343-9500), 다미아니(6204-1924),
부첼라티(6905-3490), 쇼메(1670-1180), 타사키(3461-5558),
티파니(1670-1837), 피아제(1877-4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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