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 ART> 2024년

[2024 ART_COLLECTOR] 고요 속의 소요 정예슬

얼마 전까지 개성 넘치는 디자인의 패션 브랜드 오아이스튜디오를 운영하며, 10~20대 패션 피플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던 정예슬. 그런 그의 독특한 감성이 묻어나는 미술품 컬렉션을 소개한다.

EDITOR 박이현 PHOTOGRAPHER 이경옥

최윤희 작가의 작품 앞에 앉은 정예슬 컬렉터.


정예슬 1990년생 미술 컬렉터. 오아이오아이, 솔티페블, 로우타이드 등의 브랜드가 소속된 ‘파인드폼’의 대표이사이자 CEO로 13년간 활동했다. 어릴 때부터 미술을 공부하면서 자연스럽게 작품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언덕배기에 자리 잡은 정예슬 컬렉터의 집에 방문하던 날, 세찬 비가 내렸다. 모던한 파사드 때문이었을까. 대문 옆 초인종을 누르는 순간까지만 하더라도 금속에 부딪히는 빗소리가 집 안을 울릴 것이란 뻔한 예상을 했다. 아니었다. 창살 밖에선 물방울이 현란한 춤을 추고 있었으나, 내부는 거짓말처럼 고요했다. 마치 정갈함 속에 느긋함과 평온함이 묻어나는 일본의 와비 사비侘び寂び의 미학을 마주한 것 같았다. 하지만 늘 이런 공간엔 반전이 도사리고 있는 법. 벽에 설치된 작품 속 붓의 흔적이 소요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들이 내뿜는 선율은 비에 축 처진 기분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빤함과는 거리가 먼 정예슬 컬렉터의 집, 꽤 매력적이다.


명상해야만 할 것 같은 동양적인 인테리어예요.

마당이 있는 집에 살고 싶어 단독주택으로 이사했어요. 중형견을 키우고 있는데, 예전 집은 고층이었거든요. 이사를 앞두고 리모델링할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 깨끗한 집을 찾다가 2023년 4월 이곳을 소개받았습니다. 전에 거주하던 분이 인테리어 디자이너여서 직접 집을 꾸미셨다고 하더라고요. 공간이 주는 공기가 따스해서 단번에 계약했어요. 특히 빗살무늬 창살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에 마음을 뺏겼죠. 분위기가 고풍스럽다 보니 가구도 원목 계열로 마련했어요. 정리를 마치기까지 6개월이나 걸렸답니다.


테일러 화이트Taylor White의 ‘No, I Cut My Own Hair’(2020).


2층 공간은 콘트라스트가 강한 대형 작품들이 있어서 그런지 왠지 모를 힘이 느껴집니다.

제가 집에서 제일 애정하는 공간이에요. 중앙에 오리지널 빈티지 가구를 놓고, 3면을 최근 소장한 작품들로 구성했죠. 명상의 연장선에서 탄생한 크리스 조핸슨Chris Johanson의 기하학적 회화, 흘러간 시간에 대한 감정과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 의의가 있는, 무채색에 가까운 최윤희 작가의 작품, 드로잉·사진·조각·회화를 넘나들며 시간의 흔적을 표현하는 안토니아 쿠오Antonia Kuo의 인스톨레이션이 그 주인공들입니다. 곧 서도호 작가의 작품도 홍콩에서 도착할 예정이에요.


안토니아 쿠오의 작품은 매우 무거울 텐데요. 어떻게 2층까지 올라왔는지 궁금해요.

당시를 생각하면 운송해주신 분들에게 여전히 죄송합니다. 저도 단순히 무겁다고만 알았지, 그렇게 땀을 흘리실 줄은 몰랐어요. 대형 사이즈 작품 위에 세라믹으로 만든 부조 작품과 이를 감싸는 철제 프레임의 무게를 그제야 실감했으니까요. 더욱이 작품 무게를 못 버티고 벽에서 떨어지면, 마룻바닥이 상할 확률이 높잖아요. 설치는 물론, 벽을 보강하는 작업까지 마무리해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에디 마르티네스Eddie Martinez의 ‘BF No. 31’(2022).


컬렉터의 애를 태운 작품도 있었나요?

우국원 작가의 작품을 1년 반 만에 품에 안았습니다. 갤러리에서 보자마자 홀린 작품이 있어 대기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거든요. 그런데 얼마 후 작가님이 편찮으셔서 한동안 작업이 어렵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문제는 활동을 재개한다는 소식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동안 작품 가격이 3~4배씩 올라갔다는 거예요. 이제는 포기해야겠다는 심정이었는데 갤러리로부터 “작가님이 회복해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물이 바로 ‘I Hate Morning’이에요. 아침잠이 많은 저를 단번에 일어나게 만드는 마력이 있는지라, 한동안 침대맡에 두었죠.


그렇다면 첫 번째로 소장한 작품은 무엇인가요?

사실 어렸을 때부터 미술을 공부했어요. 다만, 입시 미술을 길게 해서 그런지 그리는 것보다 보는 걸 선호해요. 2019년 여름의 어느 날, 우연히 SNS 페이지를 넘기다가 허수연 작가가 드로잉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무더웠던 날씨와 달리 그림이 보송보송하고 포근하다고 해야 할까요? 실제로 감상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한달음에 갤러리에 달려가 작품을 구매했습니다.



조지 나카시마 다이닝 테이블과 안토니아 쿠오의 ‘Andromeda’(2024).


소장품 면면을 보면, 선이 굵은 작품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현재 눈여겨본 작품도 비슷한 맥락일까요?

감정과 축적된 시간들을 실타래 같은 선들과 많은 레이어로 풀어낸 최윤희 작가의 추상적 풍경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갤러리에서 진행한 아트 클래스가 끝나고 잠시 ‘비밀의 방’이 열렸는데, 찰나의 순간에 작가의 작품을 봤어요. 강렬한 붓 터치와 색감이 인상에 남더라고요. 흑과 백이 거의 없음에도 강렬한 에너지를 발산하는 게 흥미로웠죠.


상대적으로 젊은 컬렉터에 속하시잖아요. 재테크를 염두에 둔 지점도 있을 것 같습니다.

떠오르는(Emerging) 작가부터 미술계에 안착한(Established) 작가까지 다양하게 소장하고 있지만, 재테크 쪽은 아니에요. 주로 30~40대 작가들의 작품인데, 모두 평생 곁에 두고 싶은 존재들이죠. 문제는 요즘 들어 ‘미래의 우리 집에 있을 것 같다’라는 직감이 작동하는 경우가 잦다는 거예요. 대표적 예로, 지난 3월 ‘아트바젤 홍콩’에서 두근거리는 가슴을 다독이느라 꽤 고생했습니다. 친한 갤러리 디렉터와 함께 갔는데, 옆에서 현실적인 이야기로 저를 진정시키더군요.(웃음) “이 작품은 정예슬 컬렉션 방향과 어울리지 않는다”, “해외에서 거금을 투자할 필요는 없다”라면서요.


  서도호의 ‘I am Your Conduit’(2014).


정예슬 컬렉터의 남은 인생에서 하나의 작품만 소장할 수 있다고 가정해볼게요. 누구의 작품일지 상상해본 적 있을까요?

애덤 펜들턴Adam Pendleton의 작품이지 않을까 싶어요. 스트리트 아트의 연장선처럼 보이는 작품에서 힘을 받았거든요. 무채색 계열을 주로 사용해서 그런 것일지도 몰라요. 장 미셸 바스키아와 통하는 부분도 있고요. 어쩌면 아트페어에서 작품 가격을 보고 “멋있네!”라는 감탄사만 내뱉고 쿨하게 돌아서서 그런 것일지도요.(웃음)


블래디미어 케이건Vladimir Kagan의 싱글 체어와 우국원 작가의 ‘I Hate Mor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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