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 ART> 2024년

[2024 ART_COLLECTOR] 곁에서 지금처럼 최유진

한 작가의 예술 여정에 발걸음을 맞춘다는 것. 이는 물질적 지원만을 의미하는 건 아닐 테다. 따스한 온기로 미술의 시간을 함께 써내려가는 중인 컬렉터 최유진의 공간 속으로.

EDITOR 박이현 PHOTOGRAPHER 이창화

문이삭 작가의 조각 작품 앞에 선 최유진 아이홉 대표.


최유진  친환경 프리미엄 보디케어 브랜드 ‘아이홉iHope’ 대표. 분자생물학을 공부한 뒤 뉴욕에서 마케팅 과정을 수료했다. 예술적 환경이 넘쳐났던 뉴욕에서의 경험과 기억을 바탕으로, 미술 작가와 작품에 대한 관심을 키워가는 중이다.


캐서린 번하트Katherine Bernhardt가 그린 핑크 팬더를 유심히 살펴보다가 흰색 벽 아주 작은 부분에 시선이 꽂혔다. 전시라는 반복된 행위가 벽에 남긴 생채기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는 벽지의 패턴에서 기인한 것이었지만, 흡사 전시가 끝나고 난 뒤 공허해진, 커다란 액자를 받치고 있던 못의 부재를 메운 핸디 코트를 보는 듯했다. ‘멀끔히 정돈된 화이트 큐브’, 최유진 대표의 집을 마주한 소감이랄까. 그러나 반전은 있었다. 수평 수직이 정확한 작품이 있을 법한 공간이지만, 자유로운 붓 터치의 회화나 커다란 조각 작품이 자리 잡고 있던 것. 이러한 정형과 비정형의 조화는 최유진 대표가 걸어온 삶의 궤적을 비유하는 것만 같다.



노기쁨, 김종학, 권순영, 제여란, 에디 마르티네스의 소형 작품들.


컬렉팅의 시작이 뉴욕이라니 낭만적이네요.

대학교에서 분자생물학을 공부하던 중 뉴욕에 어학연수를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길에서 중학교 동창을 만난 거예요. 친구는 프로덕트 디자인을 전공하고 있었는데, 예술과 패션을 주제로 건넨 말이 너무 멋지게 들렸어요. 매일 분자들의 구조와 기능만 연구하던 저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죠. 한달음에 파슨스 디자인 스쿨 마케팅 과정에 지원했습니다. 뉴욕에는 고전 거장부터 현대미술까지 다양하게 즐길 수 있는 갤러리와 미술관이 많잖아요? 틈틈이 방문해서 하나둘씩 작품을 모으다 보니 지금에 이르렀어요.


당시 대표님 가슴을 쾅 울린 작품이 있었나요?

2008년쯤, 뉴욕 골목길에서 에디 마르티네스Eddie Martinez의 작품을 보고 한동안 멍하니 있었어요. 합판 위에 그린 페인팅이었는데, 선으로 무언가를 자유롭게 표현한 형상에서 카리스마를 느꼈습니다. 사실 그때는 에디가 누군지 모르고 구매했거든요. 이후 서울에 돌아와서 지인들에게 그에 관해 궁금한 점을 물어보니까 어떻게 작품을 소장했느냐며 되레 놀라는 거 있죠?



문이삭 작가의 조각 작품 옆에 자리 잡은 캐서린 번하트의 ‘Quilt and Cheese Balls’(2021).


지금은 컬렉팅할 때 어디서 정보를 얻으시나요?

일과 육아를 병행하다 보니 갤러리와 미술관에 갈 여유가 부족하더라고요. 키아프나 프리즈 역시 여유롭게 관람하는 일이 어렵고요. 그래서 요즘엔 주로 인터넷에서 미술 기사를 찾아보고, 관련 작가와 작품을 리서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궁금한 점이 있으면, 친한 갤러리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서 괴롭혀요. 빨리 이 작가에 관해 설명해달라고.(웃음) 예전에 관심 있게 봐온 갤러리가 비영리 공간, 프로젝트 스페이스 등을 공부하는 클래스를 진행한 적이 있는데, 그때도 정보를 많이 얻었죠.


거실에선 조각 작품이, 방에선 회화 작품이 단연 눈길을 끄네요. 특별히 선호하는 매체가 있나요?

올해 ‘아트바젤 홍콩’에 가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회화에 집중했었습니다. 그런데 홍콩 컨벤션 센터에 들어가자마자 조각과 설치 작품들이 뿜어내는 기세에 압도당했어요. 왜 그랬는지 분석해보니까 아이들을 서울에 두고 혼자 홍콩에 가서 그랬나 봐요.(웃음) 컨디션도 별로 좋지 않았는데, 모든 걸 극복할 수 있었을 정도였죠. 서울로 돌아와서 문이삭, 우한나 작가의 작품을 마주한 순간, 일종의 도전 의식이 생겼습니다. 홍콩에서 조각과 설치 작품을 보고 체감한 좋은 기운이 이어진 것일 수도 있지만, 물성이 주는 오라를 오롯이 받아들일 준비를 마친 게 아닐는지.



거실 벽면에 설치한 우한나의 ‘Despair Disactivator’(2024).


대표로 재직 중인 아이홉iHope이 지속 가능한 삶을 지향하는 친환경 뷰티 브랜드잖아요. 이러한 방향성이 미술로도 이어질 것 같습니다.

그런 마음이 제일 처음 들게 한 건 허수연 작가예요. 일상에서 흔히 발생하는 종이 폐기물을 잘게 빻아서 누르고, 붙이고, 직접 만든 밀가루 풀과 섞은 뒤 ‘종이 죽’ 형태로 덧입히는 노동집약적인 방식이 매우 인상 깊었죠. 버려진 물수건, 쓰임을 다하고 남은 나무, 자연 안료 등을 활용해 존재의 덧없는 본질, 무상함 등을 추상적으로 묘사한 크리스 조핸슨Chris Johanson의 작품도 안방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아직 우리나라에선 환경문제를 논하는 작가들을 후원하는 일이 드문데, 제가 그들에게 작은 힘을 보태려고 노력 중입니다.


작품을 소장하는 과정에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2022년 프리즈 서울에서 본 호세 레르마José Lerma 작품에 매료됐어요. 당시 너무 소장하고 싶었는데, 미술 시장의 가열로 제 순서까지 오지 않더군요. 제가 뭔가 하나에 몰두하면 끝을 봐야 하는 성향이거든요. 작가가 함께 일하고 있는 모든 갤러리에 수소문했고, 결국 LA에 있는 갤러리에서 작품을 소장해 딸 방에 걸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생긴 뿌듯한 일도 있어요. 제 딸이 그림을 보면서 이런저런 감상 평을 남기고 있거든요. 학교에서도 우리 엄마가 이런 그림을 선물했는데, 나는 이런 부분이 와닿는다고 자랑한대요.(웃음) 저와 관심사를 공유해서 참 행복합니다.



호세 레르마와 일하고 있는 모든 갤러리에 수소문해 소장한 회화 작품.


그렇다면 호세 레르마의 작품이 있는 딸 방이 대표님의 최애 공간인가요?

어휴 아니죠.(웃음) 안방 소파에 앉아서 크리스 조핸슨 작품을 볼 때 평온해집니다. 아이가 3명인데, 거실과 주방에선 저에게 계속 안기거든요. 안방이 제 도피처라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아이들이 학교에 갔을 땐 거실에서 가끔 문이삭 작가의 조각과 조용히 대화해요. 압도적 기세의 작품을 보노라면, 갤러리에 와 있는 상상을 하게 된답니다.


현재 주목하고 있는 작품이 궁금해요.

신체 내부의 장기를 외부에 덧붙이듯이 착용할 수 있는 점이 매력적인 우한나 작가의 작품이요. 자신을 탐구하는 작업이라는 점에 공명했습니다. 작년 ‘프리즈 서울’을 발판 삼아 작가가 미술 시장에 등판했잖아요. 문득 그가 성장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시기별로 작품을 소장하면, 먼 훗날 제가 우한나의 가장 영향력 있는 컬렉터가 되지 않을까요? 당연히 어떤 일에 파동을 일으키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한 작가의 작업을 처음부터 끝까지 아카이빙했다는 진심을 보여주고 싶은 거예요. 향후 시대의 미술을 읽는 괜찮은 자료도 될 테고요.



크리스 조핸슨의 ‘Is With And 4’(2022~2023).


대표님에게 영감을 주었던 문장이 있을까요?

오늘의 인터뷰를 집약하는 내용으로요. “낙서하듯 편하게”라는 에디 마르티네스의 말이 떠오르네요. 그림을 어렵게 그리지 않는다는 건 곧 편안하게 지금 이 자리를 즐긴다는 뜻이잖아요. 미술품 컬렉션도 지극히 개인의 취향이 반영된 결과물입니다. 투자가치와 트렌드를 너무 좇지 말고, 나만의 무언가를 만들었으면 합니다. 저희 집에 있는 작품들이 밝은 분위기를 공통으로 자아내는 것처럼요.


황형신 작가의 코르크 스툴과 파올라 피비Paola Pivi의 핑크 진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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