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 ART> 2024년

[2024 ART_COLLECTOR] 아주 사적인 미술 아지트 백지현

처음 작품에 매료된 이후 열정적인 컬렉팅으로 예술을 향한 부단한 헌신과 사랑을 표현해온 백지현은 
자신이 기댈 수 있는 작품이 자리한 공간에서 매일 예술이 곁에 머무는 삶을 향유하는 중이다.

EDITOR 이호준 PHOTOGRAPHER 이창화

백지현 컬렉터가 가장 애정하는 블랙 큐브 룸 안에 서 있다. 옆에는 제이디 차의 작품이, 뒤로는 정희민 작가의 200호 작품이 걸려 있다. 두 작품 사이에 자리한 조각 작품은 아티스트 컬렉티브 아이브이에이에이아이유 시티ivaaiu city가 제작한 것.


백지현  투자업과 제조업에 몸담고 있다. 한때 워커 홀릭이라는 말을 들었을 정도로 일에 매몰된 삶을 살았지만, 예술의 위력을 체감한 이후 아트 컬렉팅에 폭발적인 에너지를 쏟아붓고 있다.



천안에서 생활하는 백지현 컬렉터는 학원으로 쓰던 상가 공간을 자신만의 수장고로 삼았다. 사실 수장고라는 단어로 공간의 역할을 설명하기란 다소 부족한 감이 있다. 이곳을 스토리지 목적으로 쓰고자 한 것은 분명했지만, 조금은 색다른 모습이 되길 바랐기 때문. 결국 총 5개의 방 중 세 곳은 특정한 기준이나 취향에 따라 전시 공간처럼 쓰는 한편, 또 하나의 방은 작품을 빼곡하게 보관하기 위해 사용하고, 나머지 방 하나는 늦은 밤까지 지인들과 사담을 나누는 응접실로 활용한다. 용도는 달라도 모든 공간에 작품이 자리하고 있으니 미술 아지트라는 표현이 적확할지도 모르겠다. 취재를 위해 타인의 집 혹은 작업실을 무수히 방문해봤지만, 이토록 묘한 긴장감과 설렘에 사로잡힌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수장고라 이름 붙일 만한 용도의 공간을 꾸리는 데에는 정해진 규약이나 양식이 없다지만 확실히 색다른 것 같습니다. 분명 수장고 같은 면모를 갖췄음에도 어느 방은 아지트, 또 어떤 방은 전시 공간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무엇보다 원래 학원으로 쓰던 공간이라는 점이 가장 흥미롭습니다.

이곳을 정의 내릴 정확한 단어를 찾진 못했어요. 다만 아지트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언제든 지인들과 미술 이야기를 즐기거나 혹은 사담을 나눌 수 있는 곳으로요. 처음부터 수장고처럼 쓸 생각으로 여길 매입한 건 아니지만, 공간의 장점이 꽤 명확했어요. 방이 많아서 별도로 구획할 필요도 없었거니와 작품을 걸 만한 벽도 많았거든요. 덕분에 다방면으로 활용하고 있죠.



그로테스크한 인상의 작품들이 진열된 블랙 큐브 룸. 백지현 컬렉터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특히나 눈길이 가는 곳이 있습니다. 화이트 큐브 룸과 블랙 큐브 룸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벽 컬러도 대비될 뿐 아니라, 전시한 작품의 스타일 또한 마치 대척점을 보는 듯 확연히 다릅니다. 어떻게 큐레이팅했나요?

지금의 제 취향을 집약해둔 공간이라 설명하고 싶네요. 컬렉팅 초기에는 애니메이션처럼 캐릭터나 팝적인 요소가 도드라지는 작품을 좋아했는데 작품을 수집하면서 취향의 범주가 확장되더라고요. 사실 어떻게 방을 꾸미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고, 내가 가지고 있는 작품들 간의 공통점을 찾다 보니 특정 키워드로 귀결되는 포인트가 있었습니다. 그걸 보여주는 공간들이라 봐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화이트 큐브 룸은 라이트앤스페이스 아티스트의 작품을 주로 배치해뒀어요. 개념 미술 작가들, 특히 빛을 탐구하는 작가의 작품을 주로 두었는데요. 박민하, 헬렌 패시전Helen Pashigian 같은 작가의 피스를 걸어뒀어요. 블랙 큐브 룸은 ‘그로테스크’라는 단어 하나로 많은 부분이 설명될 것 같네요.



가장 애정하는 작품으로 이근민 작가의 작품을 꼽았다. 불안정한 자신의 내면을 고스란히 마주한 느낌을 받았다고.


그로테스크한 작품을 다수 컬렉팅하는 이유가 있나요?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편안한 분위기에서 안정감을 느끼잖아요. 저는 좀 다르더라고요. 제게 닥치는 일련의 불가항력적인 상황에서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으면 오히려 저는 ‘징그럽다’, ‘무섭다’, ‘거칠다’라는 표현이 붙는 작품들을 볼 때 열이 식으면서 차분해진다는 느낌을 받아요. 심지어 작품이 저를 위로해준다는 생각도 들고요. ‘대체 작가가 어떠한 마음과 감정으로 작품을 그렸을까’라는 생각에 사로잡히다가도 그들에게 공감하고 교류를 나눈다는 느낌이 들면서 다시 제 중심을 잡아가죠.


컬렉터로서의 첫 시작을 물어보고 싶게 만드는 답변입니다.

박민준 작가님의 작품을 구매하면서부터 시작됐어요. 일반 아파트에 쉽게 들어가기 힘들고 보통은 굳이 놓으려고 시도하지도 않을 정도로 큰 작품이었는데, 처음 보자마자 매료됐어요. 그래서 제 방, 심지어 머리맡에 배치했죠. 자고 일어나면 그 작품이 제일 먼저 보이도록요. 1년 정도 같은 위치에 뒀는데, 지금은 블랙 큐브 룸에 자리 잡고 있네요.



타지에서 온 친구들을 위해 마련한 게스트 룸에 걸어둔 마이클 리키오 밍 히 호의 ‘Hey sorry I didn’t message you back sooner’(2024)


첫 소장 작품이자, 가장 애정하는 작품일까요?

가장 마음이 가는 작품은 이근민 작가의 작품이에요. 작년에 개인적으로 안 좋은 일을 여러 차례 겪었는데, 작가님의 작품을 보자마자 당시의 내 머릿속을 그대로 꺼내서 캔버스에 담아낸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동시에 누군가가 나를 알아주는 것만 같았죠. ‘나 스스로를 마주하고 있나?’라는 착각도 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근민 작가님의 작품을 일종의 은신처라고 생각합니다. 어떠한 상황이어도 저를 지켜주고, 또 기댈 수 있게 만들어주거든요. 이게 바로 예술이 인간의 삶에 끼치는 순기능이기도 할 테고요. 그래서 블랙 큐브 룸 내에서도 해당 작품을 가장 정중앙에 배치했어요. 이 작업이 공간의 중심이라 생각하고, 작품의 위치를 바꿀 생각도 없습니다.


김동형 작가의 작품도 소장 중이다. 김동형은 건축물 단면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을 선보이는 작가다.

김동형 작가의 작품도 소장 중이다. 김동형은 건축물 단면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을 선보이는 작가다.


컬렉터로서의 삶을 시작한 지 햇수로는 5년, 긴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지만 소장한 작품 수를 보면 혀를 내두를 정도예요.

사실 저는 워커홀릭이에요. 일에 매몰된 삶을 살았는데, 핀트가 아트 컬렉팅으로 옮겨간 것 같아요. 컬렉팅을 시작한 해에만 수십 점을 샀으니까요. 이제는 폭발적으로 작품을 사지는 않지만, 아트 행사를 기점으로 1년 청사진을 그리고 있긴 합니다. 중요한 아트페어나 행사 일정을 우선 스케줄로 생각하고 그 후에 다른 일정을 계획하는 편이에요.


그야말로 예술이 함께하는 삶을 살고 있군요.

이제 제게 예술 작품은 정말 가족 같아요. 처음부터 곁에 있었던 것 같달까요? 그 이외의 삶이 섣불리 상상이 되질 않네요.


언젠가 대안 공간을 마련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기도 했죠?

거창한 공간은 아닐 겁니다. 다만 제가 살고 있는 천안이 아트 불모지이기도 한 만큼 지역 작가나 신진 작가, 동시대를 살아가는 작가들을 위한 전시 공간이자 초보 컬렉터들을 위한 커뮤니티를 마련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계속 하고 있어요.


화이트 큐브 룸의 모습. 사이먼 후지와라의 작품이 중앙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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