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 ART> 2024년

[2024 ART_COLLECTOR] 예술, 가장 의미 있는 시간에 선 파비앙 파코리

중국 현대미술과 사랑에 빠진 컬렉터가 있다. 파비앙 파코리의 광저우 컬렉션에선 현재진행 중인 중국 현대미술의 역사를 목도할 수 있다.

EDITOR 박이현 PHOTOGRAPHER 이창화

통쿤냐오Tong Kunniao의 작품을 배경으로 앉아 있는 파비앙 파코리. 그가 손에 쥐고 있는 건 자오자오의 작품, 테이블 위에 놓인 것은 왕위양이 와인 병으로 만든 작품.


파비앙 파코리Fabien Pacory  중국에 거주하며, 중국 현대미술을 중점적으로 소장하는 프랑스인 컬렉터. 주중 프랑스 상공회의소(CCI)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광저우 K11 아트 몰에서 레스토랑을 운영 중이다. 2021년에는 한국에 무역과 출판에 집중하는 회사 ‘파코리앤킴’을 설립했다.



중국 광저우 공항에 내리자마자 요란한 비바람이 몰아쳤다. 주민들도 날씨를 예상하지 못했는지, 8차선 도로가 차량으로 꽉 막혔다. 괜스레 불안해졌다. 컬렉터가 기다리는 장소가 현대미술의 메카인 ‘K11’인데, 짓궂은 하늘 탓에 작품을 만나지도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기우였다. 겨우 도착한 K11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우리를 맞이한 건 평소 매체에서나 볼 법한 작품들이었으니까. 두 눈을 반짝거리게 만든 거리를 지나 파비앙 파코리가 운영하는 하이난 음식 전문 레스토랑에 다다랐다. 미쉐린 표식에 한 번, 공간을 수놓은 작품들에 또 한 번 놀랐다. 이름만 들어도 감탄사가 나오는 중국 작가들의 작품이 대체 몇 개나 있는 것인지. 눈과 입과 마음이 이토록 흐뭇했던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자동차로 15분 거리에 있는 컬렉터의 집 또한 중국 현대미술로 가득했다. 푸른 눈의 이 남자, 그의 정체에 호기심이 치솟는다.



기술과 예술, 물질과 비물질 간의 관계를 탐구하는 왕위양의 'Moon'(2010~2020) 시리즈.



11년 전, 구 여자 친구이자 현 아내와 홍콩에서 전시를 봤던 기억이 남아 5년 전 구매한 주진스의 ‘Black and White 4’(1990).


켈렉션이 대부분 중국 작가의 작품들로 이뤄져 있습니다.

20년 전 중국에 이주했을 때 마오쩌둥을 잘 모르는 세대의 예술가가 등장하기 시작했어요. 1980~1990년대 태어난 이들은 2000년대 초반 급격한 경제성장과 사회변동을 겪으며 부모 세대와는 다른 글로벌하고 디지털화된 환경에 노출돼 있었습니다. 이는 예술에도 반영되었어요.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을 넘나들며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예술가가 늘어났고, 독특한 예술 실험과 철학이 나타났습니다. 전통적 가치관에 도전하고, 정부 통제에 반발하는 것을 바탕으로 중국 사회를 통찰하는 것이 대표적 예죠. 이러한 미술계의 변화에 매력을 느낀 저는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미술 세계와 제 삶을 연결하고 싶었고, 그 결론이 바로 컬렉팅이었습니다.


미술과 삶을 연결한다고요?

예술 작품으로 둘러싸인 공간에서 생활하고 일하는 것은 긴요한 경험이에요. 예술은 단순히 공간을 꾸미는 장식이 아니라, 우리 삶의 질을 높이고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주는 도구입니다. 매일 예술 작품을 바라보는 것은 마치 명상과도 같아서, 이를 통해 삶과 사물에 대한 인식과 감각을 전환할 수 있어요. 즉, 예술 작품은 우리의 감정을 자극하고, 사고의 폭을 넓혀주며, 세상과 상호작용하게 만듭니다. 그저 작품을 감상하는 것에서 나아가, 그 속에 담긴 내용을 살펴보고 시간을 들여 소통할 때 예술은 더욱 많은 것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광저우 K11 아트 몰에 있는 자신의 레스토랑 ‘WJ Hainan Cuisine’에 설치한 페트라 코트라이트Petra Cortright의 ‘Injury Flowchart’(2017).


거실에 있는 루핑위안Lu Pingyuan의 ‘Look! I’m Picasso!’(2018)와 어떤 마음의 대화를 하는지 궁금해졌습니다.

혹자는 종교와 철학이 명상의 정도라고 말하지만, 예술 작품을 통해서도 비슷한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하루에 5분, 10분, 때로는 20분 정도 시간을 내어 작품을 감상하면, 발상을 전환할 수 있거든요. 내면의 소리도 들을 수 있고요. 말씀하신 루핑위안은 피카소의 색채와 추상적 표현 방식을 모티프 삼아 자신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을 구축한 작가입니다. 앞서 언급한 경향처럼 작가의 작품 역시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을 넘나드는데요. 이를 보노라면, 종종 중국에 거주하는 프랑스인으로서 제 삶이 지향해야 하는 지점을 고심하게 돼요.


첫 번째로 구매한 작품과 가장 최근 소장한 작품은 무엇인가요?

첫 번째로 소장한 작품은 자오자오Zhao Zhao의 ‘Constellations’입니다. 자오자오는 어떤 사안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섬세하고 은유적으로 묘사하는 능력을 지닌 작가예요. 마지막으로 구매한 건 왕위양Wang Yuyang의 작품인데요. 그는 디지털 미디어, 유전공학, 인공지능 등을 활용해 기술과 예술, 물질과 비물질 간의 관계를 탐구합니다. 얼마 전에는 ‘디올 레이디 아트Dior Lady Art’ 프로젝트에도 참여했고요. 저는 작품에 깊이 감동하면, 작가의 스튜디오에 찾아가 오랜 시간을 함께하며 작업 세계를 이해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친분을 쌓다 보면 자연스럽게 가까운 사이가 되곤 하죠. 자오자오, 왕위양, 쉬전Xu Zhen…. 저에겐 모두 인생의 소중한 벗입니다.


레스토랑 프라이빗 룸 벽면에 자리 잡은 루차오Lu Chao의 ‘Dark Energy No.1’(2018).


중국에 거주하는 프랑스인 컬렉터라 작품 구매 과정에서 발생한 에피소드가 있을 것 같습니다.

자오자오, 쉬전, 쩡판즈Zeng Fanzhi 등과 공유한 에피소드는 셀 수 없을 정도예요. 지면에 풀어내면 1권이 넘어갈걸요?(웃음) 문득, 주진스Zhu Jinshi와의 일화가 떠오릅니다. 미리 고백하자면, 주진스와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는 사이예요. 11년 전, 여자 친구와 홍콩에서 작가의 전시를 본 적이 있는데, 그때의 따스했던 풍경이 오랫동안 마음속에 잔상으로 남았어요. 그래서 5년 전 그녀를 위해 주진스의 ‘Black and White 4’(1990)를 구매했습니다. 당연히 당시 여자 친구는 지금 제 아내가 되었고요. 우리는 침대 머리맡에 그 그림을 설치했는데, 볼 때마다 11년 전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서 추억에 젖곤 해요. 이후로도 주진스가 속한 펄 램Pearl Lam 갤러리 전시에 자주 방문했지만, 쉬이 인연이 닿질 않네요.


고미술품 또한 중국 미술 시장을 이끄는 한 축이잖아요. 고미술품 수집에도 관심이 있나요?

아내가 중국 전통 회화와 서예 작품을 컬렉팅하고 있습니다. 고미술을 심도 깊게 이해하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하기에 발걸음을 내딛는 일이 저는 선뜻 용기 나지 않더라고요. 다행히(?) 아내가 전문가라서 틈틈이 배우고 있어요. 구매한 작품들은 아파트 맨 위층 수장고에 보관 중입니다.


레스토랑 프라이빗 룸 입구에 있는 자오자오의 ‘Preserved Duck Eggs #1’(2016).


어떤 기준으로 작품을 구매하나요?

주관적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제 컬렉팅의 핵심 원칙 중 하나는 ‘잠시 멈춤’이에요. 작품을 수집하고 감상하는 일은 예술가의 눈을 응시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눈동자에 빠져들었을 때 시간의 흐름이 평소와 다르게 다가오는 일, 누구나 한 번쯤 겪었을 거예요. 느리게 흘러가거나, 아니면 완전히 멈춘 듯하거나. 이런 순간에는 어떤 깨달음과 깨우침이 일어나지 않던가요. 마찬가지로 예술 작품 감상도 성찰로 이어져야 합니다.


다시 거실 이야기로 돌아와서 루핑위안의 작품, 왕루옌Wang Luyan의 조각, 빨간색 로쉐보보아Roche Bobois 소파, 이탈리아 대리석 등 개성 넘치는 대상들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모두가 동일한 미술 작품, 소파, 텔레비전이 있는 장소에 머무르는 것보다, 자신만의 개성과 감성을 반영한 공간을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공간과 예술의 조화를 논할 때 대다수가 그다지 고민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요. 실제 친구들의 아파트만 하더라도, 어딜 가나 가구와 작품이 비슷해 금세 지루해지더라고요. 분명 처음 가본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놀라움이나 신선함을 발견할 수 없어서겠지요. 그렇기에 나의 보금자리는 색다르게 디자인해야 합니다. 그래야 일상에서 굳어진 관념과 안녕을 고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런 점에서 제 책상이 있는 옥상 사무실은 특별합니다. 한쪽 벽 전체가 유리창으로 되어 있어서 도시 전체를 360도 파노라마로 볼 수 있는 까닭이죠. 2100만 명이 사는 거대한 메가시티에서 도시경관과 아열대 지역의 생태계를 동시에 눈에 담을 수 있다는 점에 자부심을 품고 있습니다.


자오 이첸Zhao Yiqian의 ‘That Moment Across the Sky’(2016)를 감상하며 식사할 수 있는 파비앙 파코리의 레스토랑 ‘WJ Hainan Cuisine’.


소장하고 있는 작품 외에 주목하는 작가들을 알려주세요.

올해 ‘아트바젤 홍콩’의 마이어 리거Meyer Riegger 갤러리 부스에서 본 스위스 작가 카롤리네 바흐만Caroline Bachmann의 작품이 인상적이었습니다. 12년 전부터 제네바 호수의 새벽을 캔버스에 담아온 작가로, 수면·산·하늘 등 작업 소재는 매번 같지만, 결국엔 독특한 작품으로 완성되는 점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특히 그의 작품에는 특정 형상의 둘레가 프레임 안에 들어와 있는데 “에너지가 넘쳐나는 것을 막고, 에너지를 그 안에 담는 기능을 한다”고 해서 기억에 남아요. 프랑스 그라피티 아티스트 제우스ZEVS도 저의 눈을 즐겁게 하는 작가 중 한 명입니다. 더불어 2021년 한국에 커피, 모빌리티, 의료 기기 등의 무역과 출판에 집중하는 회사 ‘파코리앤킴Pacory and Kim’을 설립하면서 한국 현대미술 시장도 유심히 지켜보고 있습니다. 한국 예술가를 지원하고, 협력할 계획도 구상 중이에요. 이렇게 다양한 국적과 예술적 배경을 지닌 작가들의 활동을 추적하며 각 나라의 현대미술이 어떻게 발전하고 있는지 지켜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입니다.


컬렉팅 세계에 곧 발을 내디딜 사람들을 위해 조언한다면?

이제 막 컬렉팅에 열정이 생긴 분들께 드리고 싶은 구체적인 조언은 작품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편안함을 느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끔, 혹은 자주 수집하면서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는데, 주로 경제적 이익을 염두에 두고 작품을 선택할 때 그런 일이 발생합니다. 투자 목적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지만, 무엇보다 내가 진심으로 좋아하는 작품이어야 애정을 담뿍 쏟을 수 있거든요. 다시 말해, 금이나 주식처럼 사는 시기를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나에게 와닿는 작품을 선택하라는 뜻이에요. 현실적인 측면에서 체크해야 할 사항도 있습니다. 예로, 작품의 크기나 보관 방법을 미리 고려해야 해요. 작품이 너무 커서 집에 들어갈 수 없으면, 그동안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것이니까요. 물론, 그 전에 이미 계단이나 엘리베이터에서 포기할 수도 있겠지만. 마지막으로, 갤러리 관계자나 작가들과 교류하며 양질의 정보를 얻어야 해요. 자신의 취향을 확립해야 컬렉션 방향이 명확해집니다.


왕루옌의 조각, 루핑위안의 회화, 로쉐보보아 소파, 이탈리아 대리석 등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거실에 선 파비앙 파코리.


당신의 답변엔 직접 부딪혀서 깨달은 사실이 녹아 있어요. 그렇다면 간접적으로 영향을 준 것들이 있을까요?

저는 이미지가 질문을 제기한다고 믿어요. 우리는 그 메시지를 읽어내야 합니다. 이미지에는 여러 해석의 경로가 있는데, 이는 사물을 보는 또 다른 방식이기도 하죠. 이 같은 관점에서, 미디어 이론가 마셜 매클루언Marshall McLuhan의 저서 <미디어의 이해Understanding Media>(1964) 속 문구를 인용해볼게요. “나는 예술을, 가장 의미 있는 순간에 발현하는 DEWS(Distant Early Warning System: 원거리 조기 경보 시스템)로 생각합니다. 예술은 항상 문명에게 무엇이 시작되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신뢰할 수 있는 시스템입니다.”


침실의 분위기를 밝게 하는 예 링한Ye Linghan의 ‘LUCY’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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