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 2024년 9월호

오늘의 산수화

생동하는 자연으로부터 삶의 철학을 탐구했던 전통의 산수화는 현대미술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오늘의 산수화는 확장된 언어로 그 스펙트럼을 무한히 넓혀가는 중이다.

GUEST EDITOR 박민

시간성이 소멸된 산 ‘산’_강서경


강서경은 정형화된 회화의 개념으로부터 탈피해 새로운 해석을 더하며 회화적 언어의 확장 가능성을 실험하고 탐구해왔다. 그렇게 전통이라는 대상은 작가의 언어를 통해 평면, 조각, 영상 등 동시대적이며 현대적인 예술 언어로 재해석되었다. 그리고 그의 작품 활동 중심에는 개인에게 허락된 자리와 더불어 나와 함께 사는 다른 이들의 존재, 그들의 움직임을 인지하고 서로 관계 맺는 ‘진정한 풍경眞景’에 대한 고민이 있다. 자신의 작업에 대해 “미술 언어를 찾아가는 과정이며 여전히 회화의 방향성을 고민하고 연구하는 과정에 있다”라고 말하는 작가는 지난 3월 국제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마치March>에서 ‘산’ 연작을 공개했다. 그중 ‘산-아워스Mountain-Hours’는 브론즈를 구부리고 두드려 띠의 안과 밖의 질감을 완전히 다르게 하며 이를 통해 시간성의 소멸을 표현했다. 또한 꽃잎을 닮은 곡선 고리를 두른 ‘산-꽃Mountain-Flower’은 돌고 도는 시간의 흐름을 상기시켰다. 강서경의 회화적 언어로 담아낸 산과 꽃은 작품이 걸린 공간을 산수화의 한 장면처럼 보이게 한다. 이들은 조각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시간의 흐름을 담은 회화의 연장선상에 있다. 전통의 회화 언어에서 풍경화는 지난 계절이 남기고 간 순간을 바라봐야 한다면, 강서경의 산과 꽃이 만들어낸 풍경화에서는 그 사이를 거닐며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을 목도할 수 있다. 시간성의 소멸, 그리고 시간의 흐름이 담긴 그의 산수화에는 한걸음 한걸음 행진하듯 힘차게 나아가고 있는 생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기도 하다. 작가가 구현한 봄의 풍경은 탄생과 소멸을 무한히 반복하며 그 안에서 시간의 흐름은 계속 이어지는 생의 조각 중 하나가 된다.



피의 산 ‘블러드 앤 와인’_김지평


김지평은 동양화 혹은 한국화 작가에 속하지만 산수화의 틀 안에 담는 이야기는 전통의 경계를 벗어난 것들이다. 전통의 산수화는 평화롭고 이상적인 모습의 자연을 대상으로 하지만 ‘블러드 앤 와인Blood and Wine’에서는 산수화라는 그릇에 여성의 달거리 주기와 그에 따른 불안정하고 풍요로운 몸의 상태를 담았다. 동양의학 텍스트이자 이미지로 이루어진 ‘내경도’를 모티프로 여성인 자신의 몸의 경험을 자연으로 비유해 그린 작품 중 하나로, 호르몬과 산수화라는 생경한 조합을 통해 작가가 던지고자 했던 건 의도나 메시지라기보다는 그림을 그리며 경험한 자유와 해방감 같은 감각이다. 작가는 산수화로부터 동서양의 문화 차이와 다양성을 이해하고 회복해야 할 자연에 대한 감각을 배우며 환경문제와 연결된 실마리를 찾고자 한다. ‘산수’에 담긴 ‘산과 물’이라는 개념은 견고함과 유연함, 고정된 것과 움직이는 것이 계속 충돌하며 생성되는 늘 변화하는 세계의 표현이라는 동양적 사고에 매료되어 작가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도 늘 살아 있고 유연하기를 기대한다. 그에게 전통은 숙제이자 영감이다. 그리고 전통과 현대를 대척점에 놓인 것으로 보지 않으며 각각이 지닌 고정관념을 직시하고 전통을 현대화해야 한다는 선입견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무엇보다 전통을 전근대적이라는 이유로 현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으로부터 현대를 발견하는 것을 지향한다. 다른 시대와 다른 문화의 차이를 찾아내기 보다 이해의 폭을 넓히는 것이 작가의 산수화가 지니는 출발점이다. 그런 산수화는 작가에게 언제나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작업이다.



풍경에 담긴 수행의 시간 ‘트레이스’_김민정


동양화를 전공한 김민정은 한지에 안료가 흡수되는 예측할 수 없는 효과에 영감을 받아 동아시아 채색화에서 수묵과 채색 추상화로 자신만의 작업 방향성을 찾아갔다. 2000년대에는 한지를 자르고 태우는 작업에 이르며 명상과 실험에 가까운 과정을 통해 기존의 동아시아 회화 관습에서 벗어나 동양화를 재해석했다. 오랜 시간 전통적인 서예와 수묵화를 탐구해온 작가는 자신의 그림은 종이가 결정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에 한지를 “섬긴다”고 말한 바 있다. 작가 70인의 초대형 작품을 전시하는 2024 아트바젤의 ‘언리미티드’ 섹션에서 선보인 ‘트레이스Trace’는 8m 길이의 ‘산Mountain’을 중앙에 두고 양옆의 벽에 ‘타임리스Timeless’ 2점을 배치해 완성했다. ‘산’ 연작은 일필휘지의 수묵화이기 때문에 대형 작품으로 구현하는 데 두려움이 있었지만 ‘언리미티드’를 통해 수묵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 흥미롭게도 ‘산’의 시작은 숲이 아닌 바다였다. 파도의 물결치는 소리를 그렸지만, 완성된 작품으로부터 자신의 고향 광주에서 보던 산이 떠올라 ‘산’이라 명명했다. ‘타임리스’는 ‘산’으로부터 출발했다. 10년간 깊숙이 보관해온 ‘산’ 연작을 자른 후 가장자리를 불로 태우고 배열해 완성한 것이다. 과거에는 마음에 들어오지 않아 그냥 두었던 작품이 태워진 후 다시금 새로운 생명을 얻은 셈이다. 갑옷을 만들 수 있을 만큼 질기고 강인하지만 한편으로 물성은 연약한 한지를 작은 바람에도 금방 꺼질 듯한 약한 촛불로 태운 후, 불이 남긴 흔적을 섬세하게 조절해 선을 만들며 다시 배열하기까지의 모든 과정에서 작가는 집념을 잃지 않고 수행해나갔다. 자칫 종이를 소멸시킬 수 있는 불과의 협업을 통해 이뤄낸 작품은 자연의 순환과 공의 개념을 성찰할 수 있도록 이끈다.



자연으로부터 찾은 기하학 ‘빛의 산’_이정배


이정배는 산수화의 관점에서 현대사회의 풍경을 그려왔다. 작가는 지난 작업에서 필요와 욕망에 의해 함부로 자연을 재단하는 인간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견지해왔던 것에 반해 최근 몇 년 사이에는 도시를 채우는 건물 사이로 보이는 자연의 조각을 담담히 바라보고 자연의 색면을 기하학적인 형태로 만들어내고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산수화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라면 이정배의 작품 세계 속 자연은 대도시에 존재하는 자연의 이야기다. 홀로 존재하는 자연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게 서울을 걷다 보이는 빌딩 너머의 산과 하늘이나 고층 건물에 걸려 있는 듯한 일몰과 일출의 풍경 등이 기하학적인 요소를 지닌 형태로 표현된다. “분절된 자연을 산수화의 영역으로 몰아 넣고 한 번 더 사유한 뒤, 평평한 색과 면으로 치환하거나 몰개성화한다”라고 자신의 작업 세계에 대해 작가는 설명한다. ‘빛의 산’은 거대한 기하학적 형태의 작품으로 빌딩 사이로 보이는 산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언뜻 균일한 녹색을 지닌 것처럼 보이지만 색을 얹고 다시 갈아내는 작업을 수없이 반복한 끝에 얻어진 색과 질감을 담아냈다. 여기에 삼베를 안에 덧댄 작품의 양 옆면은 살짝 거칠고 굴곡져 있어 회화의 붓 자국 같은 느낌을 드러낸다. 이는 ‘조각적 회화’ 또는 ‘회화적 조각’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작가의 의도이기도 하다. ‘자연의 기하학’ 시리즈를 시작하며 가장 처음에 구상했던 작품으로는 ‘금의 인왕산’과 ‘은의 인왕산’이 있다. 가파른 암벽이 올려다보이는 거대한 인왕산은 작가의 시선을 거쳐 길이 10cm가 채 되지 않는 크기의 산이 되었다. 순금과 순은을 이용해 기하학적인 모양으로 만든 2개의 산은 고층 건물 사이로 작게 보이는 인왕산의 모습을 구현한 것으로 도시 안에서 발견한 자연의 한 조각을 가장 순수하고 값진 재료로 표현하며 강한 물질감을 보여준다.



산 너머의 세계 ‘M’_정주영


‘산의 화가’라 불리는 정주영은 북한산과 인왕산, 도봉산, 알프스 등 산을 대상으로 산의 일부나 봉우리, 바위 등을 그림으로 그려왔다. 작가에게 풍경을 본다는 것은 “생생한 대상을 총체적이며 통합적으로 경험하는 것이며, 풍경과의 조우는 나날이 새로운 인식과 정신의 지평을 여는 일”이다. 억겁의 시간을 한자리에서 같은 모습으로 굳건히 서 있는 산의 면면과 관찰자의 시선에 따라 조금씩 달라져가는 산의 조건은 작품의 깊은 영감이 되어주었다. 그렇게 캔버스로 옮겨온 산으로부터 때론 인간의 얼굴이나 인체와 닮은 형상을 찾아내기도 했다. 산을 향한 작가의 시선은 좀 더 확장되어 산 너머 혹은 산 위의 공간들을 향했다. 옮겨진 시선 안에 들어온 것은 구름이다. 구름을 회화적 매개체 삼아 ‘M’ 연작이 시작되었다. 이전의 작업들이 특정한 산을 대상으로 했다면 구체적 대상은 사라진 셈이다. 어떤 한계 없이 넓은 열린 공간으로 느껴지는 하늘로 회화의 공간이 확장되며 작품은 보다 추상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 하늘, 구름, 일출, 일몰 등 어느 하나의 모습으로 머물러 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풍경은 손에 잡히는 실체는 없지만 분명한 모습으로 눈앞에 펼쳐진다. 그렇게 재현할 수 있는 것에서 재현할 수 없는 것으로, 알 수 있는 것에서 알 수 없는 것으로 회화적 방법론이 옮겨갔다. 정주영의 시선을 거친 하늘의 풍경은 수많은 레이어가 쌓인 다채롭고 몽환적인 색채의 그러데이션으로 표현된다. 생으로 시작해 죽음으로 마치며 그 안에서 희로애락의 감정이 무한하게 반복되는 인간의 삶과 하루에도 수없이 변하는 구름은 일견 닮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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