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 2024년 9월호

세상을 향한 거대한 시, 강익중

‘우리는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는 작가 강익중이 작가로 살아온 40여 년간 한 번도 놓치지 않고 천착해온 주제다. 광화문과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 그리고 런던 템스강과 순천만에서 모습을 드러냈던 그 공동의 벽화가 올가을, 뉴욕의 한국문화원과 이집트의 기자 피라미드에 뜬다.

GUEST EDITOR 박지혜

강익중  충청북도 청주 출생. 1984년 홍익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1987년 뉴욕 프랫 인스티튜트를 졸업했다. 1994년엔 그의 예술적 조언자인 백남준과 함께 2인전 <멀티플/다이얼로그>를 열었으며, 1997년엔 베네치아 비엔날레 한국관 전시 특별상을 수상했다. 아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던 한글 카드에서 비롯된 ‘강익중체’를 사용한 한글 도상 모자이크 작업, 그리고 세계인의 그림을 한데 모아 선보이는 대규모 공공 미술 작업을 이어오며, 희망과 융합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강익중은 광화문 복원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설치되었던 거대한 가림막 ‘광화문에 뜬 달’(2007~2010)로 널리 알려진 작가다. 알록달록한 단청색으로 표현된 반듯한 글씨의 한글 모자이크, 혹은 그의 시그너처가 된 달항아리 그림을 본다면 누구나 어렵지 않게 그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베네치아 비엔날레와 파리 유네스코 본부, 템스강까지 전 세계의 중요한 문화적 스폿에서 작품을 선보여온 그가 올가을 특별한 프로젝트를 펼친다. 뉴욕 한국문화원과 협업해 전 세계의 사람들이 마음에 품고 있는 소중한 한 문장을 거대한 벽화로 선보이는 ‘한글벽 프로젝트’와 이집트의 기자 피라미드에서 열릴 <포에버 이즈 나우Forever Is Now> 전시가 그것이다. 그는 한글이나 달항아리 같은 한국적 모티프, 어린이나 실향민의 그림을 차곡차곡 모아 하나의 거대한 의미 망을 만들어낸다. 보잘것없어 보이는 파편을 조각조각 모아 거대한 기념비를 만드는 방식은 그가 세상, 그리고 그림을 바라보는 방식과도 닮아 있다. 무의식처럼 남기는 스케치, 놓칠 수 없어 끄적여놓는 시상詩想 그리고 지구에 점점이 흩어져 있는 존재에 대한 애정을 하나로 모으고자 하는 마음. 세계를 돌며 꾸준히 계속되고 있는 그의 설치 프로젝트 역시, 그 마음과 이야기를 차곡차곡 쌓아 여럿이 함께 써나가는 ‘시’와 다름없다. 소소함으로 거대함을 일궈나가는 작가, 그럼에도 세상은 살 만한 것이라고 말해주는 몇 안 되는 미술가 강익중과 나눈 이야기.


뉴욕에 수십 년째 거주 중이신데요. ‘뉴욕’이라는 도시에서 산다는 것은 작가로서 어떤 감각을 갖게 하나요? 그곳에서의 삶을 고집하고 계신 이유도 궁금합니다.

집을 잠시 비운 것 같은데 벌써 40년이 지났습니다. 살아온 세월의 3분의 2 이상을 뉴욕에서 보낸 셈입니다. 하지만 제 기억의 무게는 뉴욕에서의 기억보다 어릴 적 이태원의 골목이나 청주 무심천 둑방길의 추억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뉴욕은 인종의 용광로라는 의미로 ‘멜팅 포트melting pot’라고 불리지만, 저는 뉴욕이 여러 화려한 색으로 이루어진 스테인드글라스 창이라고 생각합니다. 각자의 영역과 고유의 색이 있지만 희망이라는 빛이 통과할 때 밝게 빛나는 것이지요. 이방인에게 뉴욕은 내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는지를 스스로에게 묻게 하는 도전의 도시이기도 합니다. 가끔 후배들에게 해주는 말이 있습니다. 미국은 우리에게 차려진 밥상과 같다고요. 밥상을 미루지 않고 먼저 밥을 먹는 사람이 미국의 주인이 됩니다. 처음 접하는 낯선 문화나 환경 앞에서 움츠러드는 것은 당연하지만, 자신에 대한 위축감이나 피해 의식 때문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현재 청주에서 열리고 있는 <청주 가는 길 : 강익중> 전시를 보면, 그곳에 대한 기억이 참 좋게 남아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유년 생활은 어땠나요?

아버지의 잦은 사업 실패로 인해 저희 가족은 서울의 여러 변두리를 전전하며 살았습니다. 어려운 형편에 한 끼라도 줄이기 위해 어머니는 방학이 시작되면 저를 청주에 있는 둘째 이모의 집으로 보내셨어요. 이모는 어머니의 안부를 묻고, 도착한 첫날에는 프라이팬에 제가 좋아하는 통닭을 구워주셨죠. 방학 내내 무심천과 우암산이 제 놀이터였습니다. 개학이 가까워져 집으로 돌아가는 날, 이모는 터미널까지 늘 바래다주셨고, 버스 짐칸에 보따리를 넣어주며 제 손에 용돈을 쥐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버스에 앉아 눈물을 닦는 제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계셨습니다. 청주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분이 바로 둘째 이모입니다.


뉴욕에서 대중교통으로 이동할 때마다 3인치 크기의 캔버스를 들고 다니며 매일같이 그리기 시작한 것이 작업의 출발이라고 들었습니다. 애초에 ‘대작’을 만들겠다는 야망과는 관계가 없는 작업 방식인 것 같습니다.

그림이 막힐 때 제 스스로에게 이야기하는 몇 가지 문장이 있어요. 그 문장들로 대답을 대신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림은 그릴수록 잘 그려진다’, ‘붓을 언제 놓느냐가 더 중요하다’, ‘그림은 떨어져서 그린다’, ‘그림도, 디자인도 더할 때보다 뺄 때 살아난다’, ‘그림은 역시 체력이다’, ‘마지막 그림을 상상하고 그린다’, ‘전시도 없는데 그림 그리는 화가가 진짜 화가다’, ‘좋은 그림은 조화롭다’, ‘시간 보내기에 그림만 한 게 없다’, ‘그림은 쉬운 것, 옆에 있는 것, 아는 것부터 그린다’, ‘그림은 별것 아니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작가님 작업은 ‘한글’ 텍스트가 주를 이루지만, 영어나 다른 언어로 작업할 때도 있습니다. 작가님 작품을 외국인이 모국어로 감상할 때 그들에게 일어나는 감정을 관찰해본 적이 있으신가요? 더불어 작품에서 ‘언어’를 사용할 때 조형성과 내용 중 어느 것에 더 중점을 두고 계신지요?

요리로 비유하자면, 한글의 조형적 아름다움과 내용은 모두 중요한 재료입니다. 외국어로 번역한 작품을 통해 관객들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관찰하는 것은 어려웠지만, 번역된 작품이 독자들에게 어떻게 반응을 일으키는지를 알 수 있는 기회는 많았습니다. 올가을 이집트 기자에서 열릴 피라미드 설치 작품을 준비하면서 여러 언어 학자에게 자문을 구하는 과정에서, 언어의 조형적 요소가 내용 못지않게 감정적 전달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는 9월에는 뉴욕 한국문화원 신청사에서 높이 22m의 세계 최대 규모의 ‘한글벽 프로젝트’를 공개할 예정입니다. 여기에 한국의 문화 예술인들이 참여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는데요. 이 프로젝트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또 영구 설치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작년 5월, 뉴욕 한국문화원의 신청사를 방문한 자리에서 김천수 문화원장, 조희성 큐레이터와 함께 건물 로비의 비어 있는 공간 활용 방안에 대해 논의하던 중 한글벽 설치를 제안했습니다. 이후 양현재단, 싸이버로지텍, 키스그룹의 후원으로 가로 8m, 높이 22m로 세계 최대 한글벽 작업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LG전자는 한글벽 캠페인 사이트(hangeulwall.org)를 개설하고, 영어 문장을 입력하면 한글로 변환되는 시스템을 개발했습니다. 4개월 동안 전 세계에서 770만 명이 접속하고, 7000명 이상이 소중한 문장을 입력했으며, 접수된 문장 중 가장 많은 하트를 받은 900개의 문구와 프로젝트에 참여한 유명인 100명의 문구 등 총 1000개 문구를 선별해 나무 타일로 제작 중입니다. 이는 세계인의 집단 지성을 모아 21세기 정신 문화재를 창조하는 일렉트릭 프로젝트라 할 수 있습니다.


이 프로젝트의 ‘Things I love to talk about’라는 주제가 자못 감동적이었습니다.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가장 가슴에 와닿았던 문장이나 깨달음이 있다면요?

‘Things I love to talk about’는 제가 그동안 꾸준히 작업해온 ‘내가 아는 것’의 뉴욕판입니다. 이번 설치 제목은 뉴욕에 맞게 소통을 중심으로 구성했습니다. 많은 문장이 가슴에 와닿았지만, 특히 배우 류승룡 씨의 “단순하게 단단하게 단아하게 단호하게”가 잔잔한 울림을 주었습니다. 피아니스트 조성진 씨의 “마음의 중심을 잡고 걸어가기”도 깨달음을 주는 문장이었고요.


10월 말부터 이집트 기자 피라미드 앞에서 열리는 <포에버 이즈 나우> 전시에도 참여할 예정이신데요. 작품 이전인 2023년 기자 방문이 작품에 영감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집트에서의 한글 열풍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집트의 명문 외국어 대학인 아인샴스 대학에서는 15개 언어를 가르치는데, 그중 한국어과가 가장 인기 있으며 입학 커트라인이 가장 높다고 합니다. 이집트 한국문화원 내 세종학당에는 올해 7000여 명이 지원했지만, 안타깝게도 공간과 강사 부족으로 2500명만 수강하고 있다고 합니다. 인류의 대표적 문화유산인 피라미드를 가진 나라에서, 최고의 언어 문화유산인 한글이 살아 움직이는 장면을 보고 큰 감동을 느꼈습니다.


이번 작품의 각 신전 내부에는 전 세계 사람들이 ‘각자의 꿈’을 주제로 그린 드로잉을 모아 벽화가 만들어진다고 들었습니다. 작품을 ‘안’과 ‘밖’으로 구분하게 된 이유, 또 이곳에서 세계인의 ‘꿈’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네 개의 신전’은 인류의 최대 문화유산 중 하나인 기자 피라미드 앞에서 과거와 미래를 주제로 세계인과 함께하는 대규모 공공 미술 프로젝트입니다. 이 프로젝트는 4개의 공간을 16개의 벽으로 나누어 구성되며, 이 벽들은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연결하고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잇는 역할을 합니다. 내부에는 이집트에 거주하는 아프리카 난민 어린이들의 꿈을 담은 그림과 북쪽 고향을 떠나온 실향민 어르신들의 그림 1000여 점이 전시됩니다. 외부에는 남북한이 함께 부르는 ‘아리랑’의 노랫말이 한글, 상형문자, 아랍어, 영어로 번역되어 설치될 예정이고요. 4개의 구조물이 이집트의 신전처럼 골목을 이루는데, 이 설치물이 오는 10월과 11월 피라미드를 찾는 이들의 마음에 작지만 큰 의미로 남기를 바랍니다.



수많은 세계인의 그림을 모으는 ‘참여형 예술’ 방식은 소통과 협조, 기술적 도움이 필요한 작업일 듯합니다. 사람들이 작업에 참여하도록 설득하는 작가님만의 노하우가 있을까요?

‘함께 일하며 서로 배우자’는 그동안 제가 해온 공공 미술의 주제이자 목표였습니다. 공공 미술을 준비하고 진행하는 데 필요한 노하우이기도 합니다. 2007년 6월, 독일 하일리겐담Heiligendamm에서 유니세프의 후원으로 전 세계 어린이들의 그림 5만 장을 제2차 세계대전으로 폐허가 된 교회 안에 설치한 적이 있어요. 세계 각지에서 보내온 어린이들의 꿈이 담긴 그림이 도착하면,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그림을 오리고, 가로세로 3인치 크기의 나무판에 붙여 설치했습니다. 이 작업에는 재소자, 약물중독 치료자 등 지역사회의 소외된 사람들이 다수 참여했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노동으로 생각하던 이들이 수천 장의 그림을 오리고 나무판에 붙이면서, 아이들의 순수한 그림에 감동하고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의 어린 시절 꿈을 떠올리며 소중한 시간을 보내고, 공동 작업을 통해 심리적 상처에 위로를 받았다는 증언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나고 보면, 가장 많이 배우고 기쁨과 감사의 혜택을 경험한 사람은 작가인 제 자신이었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이뤄가고 싶은 목표나 도전하고 싶은 프로젝트가 있다면요?

20년 넘게 임진강에 ‘꿈의 다리’를 설치하겠다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이 다리의 내부에 100만 어린이의 그림들을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외벽에는 남과 북이 함께 부르는 노랫말을 한글로 새기고요. ‘꿈의 다리’가 임진강에 놓인다면, 임진강은 분단선이 아닌 남북을 하나로 이어주는 연결선이 될 것입니다.


작가님께 최고의 럭셔리는 무엇인가요?

글쎄요, 저는 ‘럭셔리’가 단순히 많은 것을 갖고 화려한 것이 아니라 기쁠 때 너무 기뻐하거나 슬플 때 너무 슬퍼하지 않는 것. 또 그저 그런 하루, 평범한 일상을 감사하게 보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럭셔리’와 ‘행복’은 쌍둥이처럼 비슷하지만, 럭셔리가 동생 쪽일 것 같습니다. 천둥과 번개가 쌍둥이처럼 보이지만, 천둥이 동생인 것과 같은 이치죠.



COOPERATION  갤러리현대(galleryhyunda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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