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 2024년 6월호

WORK IN PROGRESS

예술과 기술의 만남을 지원하는 국제 예술상 ‘LG 구겐하임 어워드’. 경계는 구분이 아닌 상생하는 것임을 보여주는 LG와 구겐하임 미술관의 협업은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EDITOR 박이현

슈리칭과 노암 시걸이 진행한 퍼포먼스 렉처(2024년 5월 2일).


예술과 기술의 만남은 언제나 궁금증을 자아낸다. 0과 1이라는 이진수로 작동하는 ‘(디지털) 기술’과 0과 1을 언급하면 이분법적 사고라고 비판받는 ‘예술’이 교집합을 생성한다니 당연히 이목을 집중시킬 수밖에. 그렇다고 예술과 기술의 조우가 최근 벌어진 일은 아니다. 과거부터 쭉 이어져왔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기술은 예술 작품을 창작하기 위한 도구라는 인식이 강했다. 그러나 디지털과 인공지능 기술이 급진적으로 발전한 오늘날에는 그 경계가 모호해졌다. 예로, 이젠 작가 대다수가 기술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닌, 기계적 규칙 혹은 작동 방식 같은 기술 그 자체를 분석하고 실험하는 데 집중하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인공지능에 예술 작품을 적극적으로 창작하라고 명령을 내리기도 한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예술과 기술이 이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된 것이다.


기술과 샤머니즘적 믿음을 결합한 슈리칭의 ‘Hagay Dreaming’. 원시시대 성에 대한 담론, 부족의 전통을 지키려는 사람들과

도전적인 젊은 세대의 갈등 등을 다룬다.


최근 예술과 기술이 교차하는 최전선에서 포착된 반가운 움직임이 있다. 바로 LG와 구겐하임 미술관Guggenheim Museum이 제정한 ‘LG 구겐하임 어워드LG Guggenheim Award’다. 이는 기술을 활용한 혁신적인 작업으로 현대 예술의 지평을 확대하는 데 크게 이바지한 아티스트를 선정해 10만 달러(약 1억3000만 원)의 상금을 수여하는 국제 예술상이다. 이러한 LG 구겐하임 어워드는 2027년까지 다각도로 기술과 예술의 융합을 발굴하고 지원할 예정. 올해는 인터넷 기반의 현대미술 장르인 ‘넷 아트Net Art’의 선구자로 불리는 슈리칭Shu Lea Cheang이, 작년에는 디지털 시대 공정과 평등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스테파니 딘킨스Stephanie Dinkins가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LG 구겐하임 어워드에 관해 LG전자 어소시에이트 큐레이터Associate Curator 노암 시걸Noam Segal은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예술가들을 연구하고, 지원하고, 홍보하기 위해 기획한 상이에요. LG는 이를 원동력 삼아 창의적인 디지털 세상을 열어가고자 합니다. LG전자와 LG디스플레이가 자랑하는 최첨단 기술에 구겐하임의 예술적 감성을 더해서요. 한편, 구겐하임 미술관은 기술이 사회를 형성하거나 사회에 의해 형성되는 방식을 연구하는 예술가를 지원하는 데 의의를 두고 있습니다.”


슈리칭의 ‘Mycelium Network Society’는 서로 연결된 균사체 네트워크 구조를 빌려 경제 양극화, 정보 비대칭 등의 대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2024년 LG 구겐하임 어워드 수상자 슈리칭.


2023년 LG 구겐하임 어워드의 첫 테이프를 끊은 스테파니 딘킨스는 AI가 습득하는 정보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 편견을 유발할 수 있다는 목소리를 내기 위해 인공지능, 증강현실, 가상현실 등을 활용하는 작가다. 그를 상징하는 작업은 인공지능이 인간과 어떤 상호작용을 일으키는지 실험한 ‘비나 48과의 대화Conversations with BINA48’(2014). 실존하는 흑인 여성 비나 로스블랫Bina Rothblatt을 모티프 삼아 제작한 AI 로봇 ‘비나 48’은 사람과 대화하면서 차별과 편견의 언어를 구사해 화제가 됐다. 여기서 진일보한 작업 ‘Not the Only One(2018~)’도 눈여겨봐야 한다. AI에 아프리카계 미국인 3대(할머니-어머니-딸)의 구술 데이터를 학습시킨 것. 이 과정에서 부정적인 내용(인종차별, 폭력 등)을 배제했더니, AI가 자신만의 착한 관점을 구축해 관객에게 놀라움을 안겼다. 두 작업을 보고 있으니, 작가가 AI가 정보를 받아들일 땐 어느 정도의 필터링이 필요함을 주장하는 듯했다. 이에 관해 딘킨스는 설명한다. “AI 맥락에서 예술은 인간 창작물의 윤리적 차원을 돌아볼 수 있는 긴요한 매개체입니다. 덕분에 우리 사회와 인간관계에 미치는 영향, 그리고 다른 지각 있는 존재와 지각없는 존재 사이에서 인간의 위치는 어디인지 생각할 수 있죠. 기술과 사회의 교차점에 있는 예술은 혁신의 진정한 가치가 우리가 만든 기술로 인간의 존엄성을 높이고 공감을 촉진하며, 모두를 위한 평등한 존재를 만드는 능력에 있음을 일깨워줍니다. 기술력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스테파니 딘킨스의 작업이 인공지능과 예술 창작, 사회의 연결 고리를 고찰하는 데 방점을 찍는다면, 올해 수상자 슈리칭은 디지털 아트, 설치미술, 영화 제작 등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30년 넘게 VR과 코딩 등 신기술을 바탕에 둔 예술적 실험을 이어온 작가다. 그는 ‘넷 아트의 시조새’로 불린다. 슈리칭의 이름을 미술계에 알린 작품은, 구겐하임 미술관이 작가에게 커미션을 의뢰한 작업이자 미술관 소장품인 ‘브랜던Brandon’(1998~1999). 브랜던은 사용자가 자유롭게 참여하는 인터넷의 비선형적 특성을 반영한 프로젝트다. 마치 16비트 게임을 떠올리게 하는 슈리칭의 작업은 1993년 벌어진 살인 사건을 주제로 토론이 벌어진 웹 플랫폼을 추적하는 것이 핵심. 위아래로 움직이는 섬네일들을 클릭하면 당시 사건 자료를 보여주는 하이퍼링크와 팝업으로 연결되는데, 이를 따라가다 보니 어떤 사안에 대해 온·오프라인 플랫폼이 정녕 공정한 배심원 역할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하게 된다(‘브랜던’은 brandon.guggenheim.org에서 확인 가능).


미래를 내다본 작업도 있다. 먼저, 작가는 ‘Locker Baby Project’(2001~2012)에서 훗날 다가올지도 모르는 인간 복제 산업과 인간의 기억 및 감정과의 관계를 고찰했다. 또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2003년엔 공식 화폐로 가정한 마늘이 금융시장에서 어떻게 기능하는지 살펴보는 작업을, 2019년엔 ‘파놉티콘Panopticon(소수 권력자가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한눈에 파악하는 감시체계)’과 ‘시놉티콘Synopticon(다수가 소수를 역으로 감시하는 것)’처럼 SNS와 CCTV에 종속된 현대인의 삶을 다룬 작품 ‘3×3×6’을 선보였다. 20여 년 전에 이미 바이오테크, 비트코인 등을 예상한 것. 이 같은 슈리칭의 작업에 관해 LG 구겐하임 어워드 심사위원단은 “특정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기술을 이용해 실험적 예술을 펼치며 디지털 시대 스토리텔링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온 작가의 도전과 열정에 경의를 표한다”라는 심사평을 남겼다.


2023년 LG 구겐하임 어워드 수상자 스테파니 딘킨스가 인공지능 신작을 발표했던 행사 (2024년 1월 25일).


  LG전자 어소시에이트 큐레이터 노암 시걸.


수상자들의 작업 외에도 시선을 끄는 것이 있다. 0과 1이라는 디지털 신호체계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트로피다. 이진법의 구성 요소는 단순하지만, 이것이 증강현실이나 인공지능 같은 놀라운 기술을 가능하게 했듯이, 0과 1 두 숫자의 형태가 교차하는 순간을 조형적으로 포착했다고. 흡사 LG와 구겐하임 미술관의 협업을 형상화한 모양새다. 0과 1의 디지털 기술로 대표되는 LG와, 0과 1에서 파생된 고정관념에서 한 걸음 나아가고자 하는 구겐하임 미술관이 손을 맞잡았달까. 어쩌면 LG 구겐하임 어워드는 필연일지도 모른다. LG가 올레드OLED라는 세계 최고의 디지털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건 너무 유명한 사실. 구겐하임 미술관 역시 오래전부터 기술에 관심을 보여왔다. 미술관 컬렉션에 있는 초기 디지털 작품과 가상현실, 로봇공학, 증강현실 등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 이를 방증한다. 시기만 늦어졌을 뿐, 만날 준비는 모두 갖췄던 셈. 노암 시걸은 말한다. “기술 기반의 예술을 바라보는 관점은 다른 매체와 다르지 않습니다. 단순히 아티스트만 지원하는 건 우리의 목표가 아니에요. 관객이 해당 기술을 이해할 수 있도록 예술적 행위의 특성을 강조하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하죠. 기술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는 예술 작품은 기술과의 만남을 풍성하게 만듭니다. 이는 그동안 우리가 보지 못했던 것들을 인식하게 할 거예요.”


가상의 정원 안에서 만나는 인물을 통해 여러 세대에 걸친 흑인 여성의 역사를 들을 수 있는 스테파니 딘킨스의 ‘Secret Garden’.


   2023년 LG 구겐하임 어워드 수상자 스테파니 딘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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