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 2024년 5월호

홍콩, 미술에 물들다

3월 말 ‘홍콩 아트위크’에 미술 행사가 쉴 새 없이 휘몰아쳤다. 아트페어, 열띤 미술 토론 등 미술 열기로 뜨거웠던 그날의 홍콩 분위기를 전달한다.

EDITOR 박이현

아트바젤 홍콩, 허브를 꿈꾸다


‘아트바젤 홍콩’ 인카운터스 섹션에 출품한 양혜규의 ‘우발적 서식지’(2024) 설치 전경.


홍콩 첵랍콕 국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깨달았다. 홍콩이 얼마나 미술에 열광하는지를. 3월 기온은 우리나라 늦봄의 날씨와 비슷했지만, 체감 열기는 반팔을 입어야 할 정도로 뜨거웠다. 마천루 사이엔 아트위크를 홍보하는 문구가 가득했고, 센트럴과 침사추이를 오가는 페리 위에선 조금만 고개를 돌려도 ‘아트바젤 홍콩’과 ‘M+’ 뮤지엄 로고를 볼 수 있었다. 길거리는 지도를 검색하며 갤러리와 벽화 등 아트 스폿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의 목소리로 시끌벅적하기도. 심지어 전혀 예상치 못한 공간에서 유명 작가와 셀럽도 마주치니 ‘이것이 미술을 사랑하는 사람의 특권’이라는 괜한 자부심에 우쭐했다.

홍콩은 미술 요충지가 되기에 충분하다. 일단 지리적 위치가 뛰어나다. 전 세계 사람들이 모이는 까닭에 어디서든 서로의 문화를 존중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미술품 거래에 대한 세금 제약도 적다. 경제적 자유로움은 홍콩 미술 시장이 급속도로 성장하는 데 견인차 구실을 톡톡히 했다. 그 한가운데에 ‘아트바젤 홍콩’이 있다. 2013년 첫선을 보인 아트바젤 홍콩은 매년 8만여 명이 찾고, 1조 원 규모의 매출을 기록하는 아시아 최대 아트페어다. 비록 지난 3년간 팬데믹으로 잠시 주춤했지만, 올해는 규모 면에서 팬데믹 이전인 2019년 수준을 회복했다. 3월 26일 VIP 프리뷰를 시작으로 3월 30일까지 홍콩 컨벤션 센터에서 열린 아트바젤 홍콩에는 40개 국가 242개 갤러리가 참여했으며(2023년 대비 37% 증가), 관람객 7만5000명이 다녀갔다. 흥미로운 점은 아시아 갤러리 비중이 50% 이상이라는 것. 이러한 수치가 아시아 현대미술의 위상이 올라갔음을 방증하는 게 아닌지 아트바젤 홍콩 디렉터 안젤 시양리Angelle Siyang-Le에게 물었다. “맞아요. 오늘날 아시아는 미국 다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활발한 미술 시장입니다. 아트바젤 홍콩은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재, 공공과 상업을 잇는 연결 고리예요. 저는 아트페어라는 플랫폼이 구매와 판매 목적에서 나아가 교육의 역할을 하길 바라요. 아트바젤 홍콩을 통해 아시아 젊은 세대가 다양한 기회를 얻고, 꿈을 실현하면 좋겠어요. 이는 아시아 관련 갤러리 비중을 높인 주된 이유죠.”


하이퍼리얼리즘 작가 강강훈의 작품을 소개한 조현화랑.


2024년 아트바젤 홍콩에선 한국 갤러리와 한국 작가의 약진이 돋보였다. 조현화랑은 첫날 이배 작가의 작품 3점을 솔드아웃시켰고, 리만머핀은 이불 작가의 ‘Perdu CXCIV’를 약 2억5000만 원에 팔았다. 고가 판매로 주목받는 아트페어 단골 작가 박서보(약 9억 원), 심문섭(약 2억 원), 하종현(약 3억 원)도 컬렉터들의 큰 관심을 받았다. 양혜규는 예술성과 상업성을 모두 잡은 작가 중 하나다. 특히, ‘인카운터스Encounters(대형 설치 작품)’ 섹션에 출품한 ‘우발적 서식지Contingent Spheres’는 전시장 입구에 자리를 잡아 탄성을 자아내며 지나가는 관객을 자주 볼 수 있었다. 현대자동차와 테이트 모던이 선택한 작가 이미래를 소개한 티나킴 갤러리, 사진작가 김경태의 작품을 개인전처럼 설치한 휘슬갤러리 역시 관객의 시선을 끌었다.

사진작가 김경태의 작품을 개인전처럼 설치한 휘슬갤러리.




서주룽 문화지구, 일상에서 즐기는 미술


서주룽 문화지구의 활발함이 보이는 M+ 외관 풍경. 


2020년대 홍콩의 랜드마크를 꼽자면, 단연 M+다. M+의 방향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주룽 문화지구West Kowloon Cultural District’를 우선 언급해야만 한다. 서주룽 문화지구는 1998년 ‘일상에서 문화를 즐겨야 한다’라는 일념에서 출발한 프로젝트다. 8년간의 오랜 논의 끝에 2006년 홍콩 행정부는 서주룽에 문화 예술 지구를 조성하기로 했고, 13년이 지난 2019년부터 하나둘씩 건물이 들어서는 중이다. 교육·비즈니스·엔터테인먼트·주거·호텔 시설이 모인 약 39만7000m²(12만 평) 부지는 동시대 중국 미술에 집중하는 ‘홍콩 고궁박물관Hong Kong Palace Museum’, 야외에서 미술 작품을 벗 삼아 산책할 수 있는 ‘아트 파크Art Park’, 장르를 넘나드는 현대 공연을 볼 수 있는 ‘프리스페이스Freespace’, 중국 전통 연극을 무대에 올리는 ‘시취 센터Xiqu Centre’ 등으로 이뤄진다. 현재 서주룽 문화지구는 2026년 사업 완료를 목표로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M+에서 열린 울리 지그의 중국 미술 컬렉션 전시 의 한 장면.


2021년 개관한 M+는 ‘아시아 최초의 글로벌 미술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헤르초크 & 드 뫼롱Herzog & de Meuron이 설계한 약 1만7000m²(약 5000평) 규모의 미술관에선 20~21세기에 탄생한 시각 매체 작업을 감상할 수 있다. 오직 실내에만 머문다면,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질지도. 홍콩 아트위크를 경험해보니 실제 여러 미술 행사가 M+ 중심으로 펼쳐졌다. 미술계 인사들이 한데 모여 문화 예술이 도시경제에 미치는 영향이나 AI가 이끄는 시각예술 같은 미술계 화두를 이야기하는 ‘홍콩 국제 문화 서밋Hong Kong International Cultural Summit’, 미술 애호가와 후원자, 작가 등 3000명이 모여 샴페인을 즐기는 ‘파티 앳 M+’ 등이 대표적. M+에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은 공간은 작년 우리나라 ‘송은’을 찾았던 세계적 컬렉터 울리 지그Uli Sigg의 중국 미술 컬렉션 전시 다. 1990년대 급속한 경제 발전으로 중국 사회는 전통 유산과 서구 문화가 뒤섞이는 현상이 일어났다. 예술가들이 이 같은 불확실성을 그대로 흘려보낼 리 없다. 그들은 모호함, 부조리, 세계화, 의구심 등의 키워드를 작품에 녹여냈다. 이에 관해 M+ 정도련Doryun Chong 부관장·수석 큐레이터는 “1990년대 중국의 사회 환경은 작가들에게 전례 없는 예술적 실험 기회였어요. 중국 현대미술의 전환점이라 할 수 있죠. 는 개인과 사회, 역사, 예술 사이의 얽히고설킨 관계를 살펴보는 데 의의가 있습니다”라고 설명한다.


홍콩 고궁박물관 전시 전경.



(좌) 홍콩 고궁박물관 전시 전경.

(우) 홍콩 고궁박물관 전시 전경.


홍콩 고궁박물관도 눈여겨봐야 할 명소다. 2022년 7월 대중에게 정식으로 개방한 고궁박물관은 홍콩 유명 건축가 로코 임Rocco Yim이 자금성에서 영감을 받아 중국 전통 건축 미학과 최첨단 기술을 결합해 디자인했다. 총 9개의 갤러리 공간으로 구성되며, 베이징 고궁박물원(자금성)에서 빌려온 1000여 점의 보물이 수장고에 잠들어 있다. 그중 166점은 중국에서 국보로 분류되는 1급 문화유산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수집품의 진면목을 확인하고 싶다면, 2025년 3월에 막을 내리는 을 놓치지 말자. 신석기시대와 명나라·청나라 왕조를 아우르는 금속공예품, 도자기, 서예 작품, 종교 미술을 전시하고 있는데, 이들을 보노라면 자연스레 과거의 중국으로 시간 여행을 떠날 수 있다.




라이징 아티스트 어셈블!

신진 작가 발굴을 지향하는 ‘아트 센트럴 2024’에서 화제가 된 수나야마 노리코의 ‘무더운 세상’.


아트바젤 홍콩과 M+, 고궁박물관 외에도 홍콩 아트위크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콘텐츠가 있다. 2015년 아트바젤 홍콩의 전신인 ‘홍콩 아트페어’ 주역들이 모여 설립한 ‘아트 센트럴Art Central’이다. 컨벤션 센터에서 도보로 15분 거리에 있는 부지에 천막을 치고 진행하는 아트 센트럴의 특징은 신진 작가 발굴을 지향한다는 것. 통통 튀는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작품, 상대적으로 합리적인 가격의 작품이 주를 이룬지라 작가의 가능성을 미리 알아챈다는 기쁜 마음으로 전시장 곳곳을 누비고 다닐 수 있다.

3월 28일과 31일 사이에 개최된 아트 센트럴의 화두는 일본 작가 수나야마 노리코Sunayama Norico의 퍼포먼스 ‘무더운 세상A Sultry World’이었다. 붉은색 드레스 안에 관객이 들어가야 완성되는 퍼포먼스가 금기와 호기심을 자극해 신선했다는 평가다. 이번 아트페어를 진두지휘한 코리 앤드루 바Corey Andrew Barr는 말한다. “예년보다 교육·체험·토크 프로그램 숫자를 늘린 점이 관객에게 호감을 얻은 것 같습니다. 우리 아트페어에 찾아오는 컬렉터들은 대부분 자녀 손을 잡고 오는데, 즐거웠다는 피드백을 많이 받았거든요. 훗날 이들이 미래의 컬렉터가 돼 아트 센트럴에 돌아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몇 년 동안 아트 센트럴은 아트바젤 홍콩과 비슷한 속도로 성장했어요(올해 방문객은 4만1000명). 이는 홍콩의 예술 생태계가 전반적으로 확장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아트@하버 2024’에서 시시각각 색이 변하는 조명 작품을 선보인 팀랩.


더 대중 친화적인 내용도 있다. K11 뮤제아, 타마르 공원 등을 캔버스로 활용하는 ‘아트@하버Art@Harbour 2024’다. 혹, 로맨틱한 무드가 필요하다면, 6월 2일까지 타마르 공원 방문을 적극 추천한다. 빅토리아 하버 건너편 침사추이를 배경으로 잔잔한 음악이 흐르기 때문. 혹자에게는 과학과 기술, 예술이 융합한 작품이 덤으로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팀랩teamLab은 시시각각 색이 변하는 조명 작품을 선보였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도시를 잇는 빛의 파동을 묘사한 작품은 상호작용의 중요성을 고찰하게 해 인상적이었다. 랩 건축LAAB Architects과 아티스트 딜런 쿽Dylan Kwok이 제작한 풍선 고양이 작품 ‘슈뢰딩거의 침대Schrödinger’s Bed’도 상호작용interactive에 방점을 찍는다. 어느 자리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고양이의 모습이 잠든 것 같기도, 깨어 있는 것 같기도 한데, 마치 우리의 사고방식을 전환하는 건 사소한 차이라는 걸 피력하는 듯한 모양새다.

이처럼 3월 홍콩은 미술의 향기로 그득하다. 미술에 진심인 사람이라면, ‘이곳이 유토피아’라는 생각이 절로 들 테다. 혹, 봄을 무심히 지나 보냈다고 너무 서운해하지 마시라. 대규모 아트페어만 문을 닫았지 갤러리와 미술관, 각종 문화 예술 프로그램은 계속된다. 그러니 미술에 파묻히는 일상이 궁금하다면, 지금 바로 홍콩행 비행기 티켓 예매 버튼을 클릭해보자.


통통 튀는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아트 센트럴 전경.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