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 2023년 10월호

기꺼이 나를 움직이게 하는 것, 오은

단지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기꺼이 생각하고 상상해보는 것. 시인 오은은 ‘읽기’가 아닌 ‘상상하고 경험하는’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시대의 흐름 속에서도 시가 지닌 가치는 변하지 않는 것이라 말하며.

EDITOR 이호준 PHOTOGRAPHER 이우경

2002년 봄 <현대시>를 통해 등단한 후 <호텔 타셀의 돼지들>,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나는 이름이 있었다> 등의 시집을 선보이며 대산문학상, 현대시작품상 등 국내 유수의 문학상을 수상했다. <너랑 나랑 노랑> 등 산문집 출간과 더불어 팟캐스트 방송과 다수의 강연 활동 등을 소화하며 지금 가장 영향력 있는 시인이자 문학인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했다.



5년 만의 신작 <없음의 대명사>를 출간한 오은 작가는 시인이자 팟캐스터, 강연자 등 다양한 수식어를 지닌 인물이다. 인터뷰를 위해 찾은 카페 사장님과도 담소를 나눌 정도로 스스럼없이 타인의 이야기에 녹아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를 수식하는 최적의 단어는 상상하는 사람이 아닐까.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을 보고 다르게 받아들이며 사유하는 행위에는 어떠한 지친 기색이 없어 보였으니 말이다.


벌써 21년, 강산이 두 번이나 지나는 시간 동안 시와 함께했네요.

등단 직후에는 시인으로서의 자의식이 없었어요. 친한 형이 제 글을 보고 시 같은 느낌을 받았다며 신인 작가상 응모전에 대신 투고했는데, 덜컥 당선이 됐지요. 당연히 시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전무했고, 제가 썼던 글은 모두 시라고 생각해서 쓴 것들이 아니었어요. 토해내듯 쓴 감정의 응어리 같은 것이었죠. 당선 후에도 한동안 시를 쓰지 않았어요. 그러다 2년 후, 밴쿠버에 머물게 되면서 작품을 쓸 기회가 생겼어요. 시인 오은으로서요. 배운 적이 없었으니 행갈이나 연갈이 등을 알 길이 없었죠. 골머리를 앓다 늘 쓰듯이 써보자 하고 산문시 형식으로 말들의 덩어리를 만들어 발표했어요. 그때가 2004년 가을, 처음 시인으로서 자각한 순간이었습니다.


자각이라는 말이 마치 계시처럼 들립니다.

한자리에서 오랫동안 앉아 있는 걸 못해요. 이걸 하다 다른 걸 해야 하고 다시 또 다른 일을 해야 하는 편인데 그 당시에는 화장실도 가지 않고 4시간 내리 글을 쓰는 데만 몰두했어요. 유례없는 일이었고, 그 기분이 나쁘지가 않더라고요. 그때 ‘아, 이 일을 오래도록 할 수 있겠구나. 그러면 시를 쓰고 싶다’라고 생각했어요.


올해 5년 만의 신작 <없음의 대명사>를 선보였어요. 제목의 의미가 있다면요?

시집 속 모든 시의 제목이 대명사예요. 대개 제목을 명사로 짓는 경우가 많은데, 저는 제목이 시를 읽으며 벌어지는 상상의 갈래를 많이 제한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가령 ‘그것’이라고 모호하게 지칭한 제목 덕분에 독자들이 시를 감상하며 각자 다른 상상을 펼친다면 시는 여러 갈래의 생명을 가지게 되는 것이라 봤습니다. ‘없음’이라고 쓴 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진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내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소중했던 존재의 사라짐일 수도 있고 내 안에 품은 성정과 무뎌지는 마음이 그 대상이 될 수도 있겠죠. 없음의 대상은 유무형의 것이며 하나로 지칭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책의 제목을 ‘없음의 대명사’라 지었어요.


패스트 콘텐츠가 범람하는 시대적인 흐름 속에서 비교적 속도감이 느린 콘텐츠라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나요?

시는 읽기와 상상이라는 행위를 동반해요. 독자가 노력해야 하는 일련의 번거로운 과정을 필요로 하죠. 그럼에도 왜 읽어야 하는지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시를 읽는다는 것은 독자가 나서서 무언가를 받아들이기 위해 사고하고 해석하기 때문이에요. 그 과정 속에서 때로는 타인이 되고 생소한 상황에 스스로를 놓아보기도 하죠. 내가 노력하고 애쓴 만큼 보고 들리는 장르인 셈이에요. 빠른 속도로 삶을 살다가도 지금 내가 잘 살고 있는지 재고하고 사색할 수 있는 시간이 분명 필요합니다. 단어 사이사이 비워둠으로써 한 편의 시가 완성되는 것처럼요.


그래서 독서를 능동의 영역으로 표현하는 경우도 더러 있죠.

패스트 콘텐츠, 즉 수동의 영역에서는 쾌락을 느낄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독서라는 능동의 영역은 생각을 유발합니다. ‘내가 책 속 인물의 상황이라면 어떤 말을 했을까?’라는 식의 생각이요. 간단해 보이지만 사실은 엄청난 사고를 하는 거예요. 겪지 않은 것을 생각이라는 행위로 미리 경험해보는 것이니까요. 생각으로 만든 일련의 질문은 장차 사람을 운용하는 가치관의 토대가 되어주기도 합니다. 또한 실제 어느 문제에 직면하건 해결책의 실마리를 가져다줄 수 있기도 하죠. 생각을 통한 간접적 경험이 무척이나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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