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 2023년 10월호

찰나의 일상에서 삶을 발견하는 일, 은희경

“오래된 물건들 앞에서 생각한다. 나는 조금씩 조금씩 변해서 내가 되었구나.” 은희경 작가가 산문집 <또 못 버린 물건들>과 함께 돌아왔다.

EDITOR 김수진 PHOTOGRAPHER 이우경

한국 문단을 대표하는 소설가. 두 아이의 엄마이던 35세에 소설 <이중주>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등단했다. 대표작으로 <새의 선물>, <마이너리그>,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중국식 룰렛> 등이 있으며, 동서문학상, 이상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동인문학상 등 내로라하는 국내 문학상을 두루 수상했다.



199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등단한 후 30여 년간 1~2년에 한 번꼴로 꾸준히 신작을 발표했고, 동서문학상, 이상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동인문학상 등 내로라하는 국내 문학상을 휩쓴 드문 소설가. 은희경은 스스로를 ‘운 좋은 소설가’라고 표현하지만, 운조차 엄청난 실력이라는 걸 지금 시대를 사는 우리 대부분은 안다. 일상의 단면을 신랄하게 묘사해 가려져 있던 삶의 진실을 날카롭게 파헤치면서도 특유의 따스한 시선과 서정적 문체를 잃지 않는 작가의 글은 많은 이에게 공감과 통찰을 선사하고 있다. 이런 은희경 작가가 오랜만에 새 산문집을 냈다. 무려 12년 만이다. 책에는 팬데믹이라는 특수한 기간을 겪으며 새삼 다시 마주하게 된 오래된 물건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술잔과 감자칼, 구둣주걱, 솥밥, 스타킹, 메달 등 작가와 한 세월을 보낸 사물들이 은희경이라는 한 사람의 일상과 시선, 생각을 전한다.

12년 만에 산문집을 냈어요. 지금껏 꾸준히 작품을 발표했지만 주로 소설이었죠. 산문을 자주 쓰지 않은 이유가 있나요?

산문은 생각을 직접 노출하는 장르라 쓰기가 좀 조심스럽더라고요. ‘하찮은’ 나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노출하게 되는 것 같아서요.(웃음) 아무래도 나조차 몰랐던 묵은 편견이 그대로 드러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어렵게 느꼈던 것 같아요.


그럼에도 이번에 산문에 ‘도전’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팬데믹 기간 동안 주로 집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책과 이삿짐 상태 그대로 선반에 넣어둔 박스 같은 것들이 눈에 들어왔어요. 한바탕 정리를 하려다가 뜻밖에도 물건에 깃든 과거의 내 시간들을 떠올리게 된 거죠. 이 이야기를 글로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편으로는 작가로서 또 한번의 변화와 배움을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스스로 정한 한계 안에서 안전한 행보에 갇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글 쓰는 사람으로서 고민이 있었거든요.


책에 등장한 물건들은 정리를 좀 하셨나요? 아니면 여전히 집에서 존재감을 발현하고 있는지요.

대부분 여전히 집에 잘 있습니다. 메달 같은 것은 정말 버려야지 했는데 아직도 실행을 못 하고 있네요.(웃음)


산문과 소설을 집필할 때, 작가로서의 마음가짐에 차이가 있나요?

둘 다 ‘나’라는 사람의 경험과 인생에서 비롯되긴 하지만 산문은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쉽게 쓸 수 있고, 소설은 모든 것을 쏟아부어 엄청난 집중과 인고의 시간을 거쳐야 완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다릅니다. 산문이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주는 거라면, 소설은 일종의 페르소나를 앞세우고 내 삶에서 일부를 떼어내 새로 구축한 세계를 여행하는 여정이니까요.


작품에서 사람과의 관계, 소수자의 삶 등을 자주 다뤄왔습니다. 꾸준히 관심을 두고 있는 주제에 대해 들어보고 싶어요.

페미니즘이나 장애인, 혹은 여러 소수자에 대한 문제에 관심이 많아요. 우리가 ‘정상 사회’라고 규정하는 편견 이면에 수많은 삶이 존재하니까요. 인간이 가진 단 하나의 고유성을 지킬 수 있게 돕는 글을 쓰고 싶은 바람이 큽니다.


좋은 글이란 무엇이며, 더 나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아주 간단히 요약해 답하자면 ‘글쓰기엔 왕도가 없다’는 겁니다.(웃음) 가장 중요한 건 ‘생각’인 것 같아요. 어떤 상황이나 사건에 대해 이면에 뭐가 있을지, 본질은 무엇인지 등을 다방면으로 생각해보는 과정이 필요한 거죠. 이런 수많은 생각이 좋은 글을 만든다고 봐요. 나 역시 한 가지 상황에 대해 시간을 충분히 두고 다양한 방식으로 고민해보려 하고, 항상 책을 곁에 두고 시간이 날 때마다 읽습니다.


언젠가 한번쯤 다뤄보고 싶은 주제가 있다면요?

‘몸’에 대해 다뤄보고 싶어요. 바꿀 수 없는, 타고난 조건인데 한 사람의 인생에 아주 많은 영향을 미치니까요. 생으로부터 소멸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일 수도 있고, 관계 맺기의 조건일 수도 있겠죠. 몸을 소재로 죽음에 대해 써보고 싶은 게 오랜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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