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XURY ART

부지런한 사랑, 류지혜

그 누구보다도 부지런하게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인 류지혜. 자신이 진정으로 공감한 작품만을 끌어안는다. 그래서 그 가치를 숫자로 환산할 수 없다. 집 하나를 온전히 작품에 내어준 그에게서 어떠한 마음으로 작품을 모았는지 들었다.

EDITOR 정송 PHOTOGRAPHER 이창화

류지혜  약 15년 전 집 근처 화랑에서 처음 수묵화를 구매한 후 예술에 빠져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컬렉팅에 임하고 있다. 단순히 작품을 컬렉팅하는 데만 머무르지 않고 미학 수업을 만들고, 또 찾아다니면서 더욱 많은 작가를 알아가는 중이다. 서울은 물론 지방을 기점으로 활동하는 알려지지 않은 작가까지 관심을 기울이며 주목한다.



부산 해운대에 위치한 류지혜의 또 다른 집은 하나의 전시 공간이다. 현재 서울에 거주하고 있지만, 이곳에 자주 내려와 지인, 작가, 큐레이터는 물론 미술 관계자들과 밤새 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창창한 미래를 그리고 있는 이희준·정희민·옥승철 등 우리나라의 젊은 작가부터 노순택·이명호·정희승 등 중견 작가와 해외 작가까지 컬렉션의 범주가 무척 다양한데, 그중에서도 류지혜의 이름을 국내외 미술계에 알린 건 단연 히토 슈타이얼Hito Steyerl의 ‘Power Plants’다. 작가의 작업 중에서도 미술사적 연구를 위해 미술관에 소장될 만한 작업들을 소위 ‘뮤지엄 피스Museum Piece’라고 부른다. 그런데 류지혜가 개인 컬렉터로서 거의 유일하게 히토 슈타이얼의 작품을 개인 소장한 것. 시작은 부산에서 듣게 된 미학 수업이었다. 그때 처음 히토 슈타이얼의 작품 세계를 알게 됐고, 2017년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Skulptur Projekte Münster에서 대형 설치 작업을 직접 목도한 뒤 반해버렸다. 그리고 2019년 방문한 프리즈 런던의 에스터 시퍼 갤러리에서 운명처럼 ‘Power Plants’를 만났다. 류지혜는 단지 “사랑에 빠졌을 뿐”이라고 했다. 그래서 과감해질 수 있었고, 거침없이 달려들 수 있었다고. 이 작품이 컬렉터로서 류지혜의 인생을 한 번 뒤흔든 것은 맞지만, 그의 삶은 그 전후로 그다지 바뀐 것이 없다. 여전히 바쁘게 사랑받아 마땅할 작가를 찾아 미술계를 종횡무진한다.



유예림 작가의 ‘정말 맛있겠어요 저도 조금만 주시겠어요?’. 부산 해운대 집에 들어서면 한눈에 보이는 곳에 걸린 그림으로,

이곳을 찾은 많은 이가 가장 인상 깊다고 평하는 작품 가운데 하나다. ‘더 프리뷰’ 아트 페어에서 작가를 처음 본 후 소장하게 된 대형 작품이다.


작품을 컬렉팅한 지 얼마나 오래되셨나요? 처음 품에 안은 작품이 궁금합니다.

15년 정도 됐어요. 정말 오래됐네요. 처음 구매한 작품은 생생히 기억해요. 장 보러 갔다가 근처에 있던 갤러리에 들렀는데, 박병일 화백의 한국화에 마음이 사로잡혔어요. 그때 우리 애가 사춘기라 마음이 조금 힘들었을 때예요. 눈 내리는 도시 풍경 같은 수묵화였는데, 마치 제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서 한참을 서서 봤어요. 포기할 수 없더라고요. 그래서 그게 제가 처음으로 소장한 작품이 됐죠. 지금까지도 그 작품에서 위안을 참 많이 받고 있어요.



‘Blooming Pattern’의 주인공은 풍경에 집중해 우리의 삶을 재해석하는 작가 송수민이다.

이 역시 류지혜가 컬렉팅할 때 주목해온 삶을 투영하는 작품들과 궤를 같이한다.


스스로에게 ‘컬렉팅’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어떠한 철학을 갖고 계시는지 궁금해요.

원래 미술, 예술에 관심이 많았어요. 저는 결핍이 많은 사람입니다. 처음 작품으로 위로를 받은 경험을 한 뒤로 자연스럽게 그 결핍을 컬렉팅으로 채우게 됐어요. 그러다 보니 전반적인 컬렉션이 저를 비추는 ‘거울’ 같다는 느낌이 들어요. 어떻게 보면 아이 덕분에 컬렉팅을 시작하게 된 건데요. 우리 아이 세대가 참 자라나면서 어려움을 많이 겪었어요. 세월호도 그렇고, 지난해 이태원 사건도 그렇고요. 어른으로서 부채감과 책임감이 생기는 것 같아요. 자연스럽게 젊은 작가에게 시선이 가기도 하더군요. 이 모든 것이 합쳐져 종합해보면 결국 ‘위안’과 ‘채우기’인 것 같아요. 그렇다 보니 섣불리 저를 평안하게 해준 것들을 보낼 수 없는 거죠.


이곳 부산의 공간을 살펴보니 방마다 테마가 있는 듯해요.

정말 잘 보셨어요. 정말 좋아하는 방을 예로 설명하자면 히토 슈타이얼의 작품이 있는 암실부터 인물화로 이어지는 곳입니다. 히토 슈타이얼의 ‘Power Plants’가 있는 곳 벽면에 벽화 작업을 설치하고 싶었어요. 최대진 작가가 이곳에서 몇 날 며칠을 묵으며 ‘Somebody to Love’를 완성해줬답니다. 안쪽으로 들어오면 한쪽 벽면에는 추상적인 면모가 두드러지는 회화가, 또 다른 벽면에는 인물화가 빼곡합니다. 그중에서 샤논 보노Shanon Bono, 퍼비스 영Purvis Young 두 흑인 작가를 힘주어 소개하고 싶네요. 특히 퍼비스 영 작가의 작품 ‘Untitled’는 이곳에 오는 사람들 모두 인상적이라고 얘기하곤 해요. 부서지거나 버려진 나무판을 활용해 작업을 하는데 자신의 신앙심과 흑인의 역사 등을 화면에 담아냅니다. 예술을 전문적으로 공부하지 않았다는 점이 놀라워요. 나중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마이애미의 루벨 패밀리 컬렉션에도 소장됐다고 들었어요. 얼마나 뿌듯했는지 몰라요.


가장 소중히 생각하는 작품이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꼭 하나를 꼽아야 한다면 노순택 작가님의 작은 작품 '달을 보라'요. 사진 작품에서 느껴지는 즉각적인 감정이 좋아요. 사실 사진에는 대상이 너무나도 분명히 담기기 때문에 언뜻 폭력적으로 느껴질 수 있잖아요. 작가님도 그 점에 죄책감을 느끼면서 작업하시더라고요. 그런 태도가 너무 존경스러웠어요. 오지 말라는 걸 무작정 찾아가서 받았죠. 인물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가장자리로 뻗은 팔이 꼭 ‘네 옆에 관심을 가지라’고 ‘너를 돌아보라’고 말하는 것 같아요.



거실에 걸려 있는 스타니슬라바 코발치코바Stanislava Kovalcikova의 ‘Midlife Highlights’는 단연 가장 눈길을 사로잡는 힘을 가진 작품이다.

국내 컬렉터 중 단 2명만 소장한 작가의 작품이라 더욱 특별하다.


전시를 무척 많이 보러 다니신다고 들었습니다.

맞아요! 전시 관람의 묘미는 작가와 큐레이터를 직접 만나는 데 있는 것 같아요. 그저 작품만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이면에 감춰진, 혹은 일부러 드러내지 않은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거든요. 자연스럽게 작가들이 더 사랑스러워지고 그러더군요. 저는 지방에서 열리는 전시에서 흥미로운 점들을 더 많이 찾아내곤 해요. ‘아, 왜 이제까지 몰랐지’ 하는 작가가 매우 많았어요. 그들이 미술관에서 크게 조명될 희열을 느끼기도 하고요. 저만의 재미랄까요. (웃음)


앞으로도 계속 이어갈 컬렉팅을 통해 이루고 싶은 바가 있다면요?

참 어려운 질문이에요. 요즘 생각해본 건 예술이 닿지 않는 낙후된 지역에 작품을 선보이거나 예술 수업 등을 기획하는 거예요. 이렇게 좋은 걸 조금이라도 많은 사람과 나눌 수 있으면 좋겠죠. 공간 구성이나 큐레이팅은 조금 겁나요. 스스로를 너무 몰아세울 것 같거든요. 아직은 좀 더 알아가고 싶어요. 여전히 제가 모르는 매력적인 작가들이 많으니까요.



퍼비스 영의 ‘Untitled’가 정면으로 보이는 방에서는 정이지 작가의 작품과 샤논 보노의 작품은 물론
류지혜 컬렉터의 취향이 한껏 묻은 회화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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