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5월호

워치메이킹 유산을 탐구하는 엠마누엘 브레게

워치메이킹 역사에 위대한 발자취를 남긴 아브라함-루이 브레게의 7대 직계손이면서 현재 브레게 부사장이자 헤리티지 책임자인 엠마누엘 브레게를 만났다.

EDITOR 윤정은


엠마누엘 브레게 1962년생. 파리 소르본 대학에서 역사 전공으로 박사학위(DEA)를 취득했다. 1993년 브레게에 함류해 헤리티지 큐레이터로서 파리 방돔 광장과 취리히·상하이의 브레게 뮤지엄을 감독했고, 1997년부터 2014년까지 프랑스의 브레게 브랜드 매니저로 활약했다. 현재는 브레게의 부사장이자 헤리티지 책임자다. 저서로 <브레게, 워치메이커 since 1775. 아브라함 루이 브레게의 생애와 유산(1747~1823년)>, <브레게, 항공계에서 쌓아온 100 년의 역사> 등이 있다.


시계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이들이라면, 결코 지나칠 수 없는 이름이 있다. 바로 아브라함-루이 브레게Abraham-Louis Breguet. 2개의 배럴과 진동추를 장착한 셀프와인딩 시계를 비롯해, 1분에 한 번씩 회전하며 중력에 의한 오차를 상쇄시키는 장치인 투르비용tourbillon, 공 스프링gong-spring으로 소리를 발생시켜 시간을 알리는 미닛 리피터minute repeater 등을 개발한 인물이다. 이러한 기술들은 ‘컴플리케이션’이라 불리며 오늘날 하이엔드 워치메이킹을 가름하는 주요 잣대다. 그는 기술적 측면뿐 아니라 미학적 측면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많은 시계에서 볼 수 있는 엔징 터닝 방식의 기요셰guilloché다이얼도 그가 최초로 고안한 것. 시계 중심을 벗어난 오프센터 다이얼도 처음으로 선보였다. 스위스 시계 브랜드 브레게는 이러한 아브라함-루이 브레게의 유산을 계승한다. 창립자의 후손 중에서는 엠마누엘 브레게가 부사장이자 헤리티지 책임자를 담당하며 선조와의 유대를 이어가고 있다. 아브라함-루이 브레게의 7대손이자 역사학자다. 2009년 루브르 박물관에서 브레게 주최로 열린 ‘브레게, 유럽 워치메이킹의 정점’ 전시의 공동 큐레이터를 맡았고 2011년 스위스 국립박물관 전시와 2015년 샌프란시스코 미술관 전시에서도 공동 큐레이터로 활약했다.


4년 만의 한국 방문이다. 오랜만에 서울을 찾은 소감은?

한국은 역동적인 나라다. 그사이 또 새로운 것들이 많이 생겨났다. 거리 곳곳은 깨끗하고 건물들은 고급스럽다. 어찌 보면 한국인은 모든 것에 완벽을 추구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한국 고객들이 브레게 시계를 유독 사랑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정교하면서도 간결한 브레게의 미학이 한국인의 취향과 잘 맞아떨어지는 것 같다.


경제와 기술 분야의 역사를 전공했다고 들었다. 관련 분야에서 시계업계로 커리어를 전환하게 된 배경이 궁금하다.

경제학사와 기술사를 전공했고 파리 소르본 대학에서 역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커리어를 전환했다기 보다는 확장했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 같다. 브레게라는 가문 자체가 탁월한 연구 대상이기 때문이다. 특히 과학과 기술의 역사 쪽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유서 깊은 워치메이킹 가문의 이야기가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브레게 하우스에 합류하게 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후손으로서 조상의 업적을 연구하고 그 유산을 지켜가는 일은 어떤가?

굉장히 뿌듯하고 자랑스럽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렇듯 놀라운 업적을 남긴 조상에 비해 나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으로써 한없이 겸손해지기도 한다. 후손이라는 생각보단 역사학자라는 마음가짐으로 일하고 있다.




브랜드와 관련한 책도 많이 출간했다.특히 인물에 초점을 맞춘 점이 인상적이다.

업계에 들어왔을 때, 이미 브레게를 다룬 서적은 많이 있었다. 그런데 정말 시계와 워치메이킹에 관련된 책들뿐이었다. 나는 ‘창립자가 어떤 사람이었을까?’하는 점에 초점을 맞췄다. 대단한 워치메이커였고, 프랑스를 넘어 여러 나라에서 놀랍도록 눈부신 성공을 거둔 한 위대한 인물의 이야기를 조명하고 싶었다. 그래서 1997년 <브레게, 워치메이커 since 1775. 아브라함 루이 브레게의 생애와 유산(1747~1823년)>을 썼다. 이 책은 2017 재출간했는데, 추가된 정보와 이미지, 스외치그룹 설립자인 니콜라스 G. 하이에크Nicolas G. Hayek에 대한 내용을 삽입했다.


아브라함-루이 브레게의 여러 발명은 시계 산업의 놀라운 발전을 이끌었다. 가장 의미 있게 생각하는 업적은?

아브라함-루이 브레게는 예술과 기술을 정말 놀랍게 접목시킨 인물이다. 워치메이킹은 기능적 측면은 물론 장식적인 요소도 중요한데, 그는 시계의 디자인 자체를 완전히 혁신적으로 변화시켰다. 이전의 시계가 둥글고, 두툼하고, 또 초침과 분침 같은 여러 개의 핸즈가 달린 형태였다면, 브레게가 선보인 시계는 더 얇고 우아한 데다 독특한 개성을 드러낸다. 이런 디자인을 완성하려면 일단 기술적으로 탁월해야 한다. 내부의 무브먼트와 여러 가지 장치들이 뒷받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탁월한 발명가이자 예술가라 할 수 있다.


앞서 말한 대로 예술과 기술의 조화가 두드러지는 대표적 작품을 꼽는다면?

지금 착용하고 있는 ‘클래식 캘린더 7337’ 워치가 좋은 예다. 이 시계의 특징인 오프센터 다이얼은 브레게가 처음으로 고안한 디자인이다. 원래 벽시계에 사용되었던 음력 문페이즈 역시 아브라함-루이 브레게가 세계 최초로 손목시계에 도입했다. 리피터 시계에 사용되는 공 스프링도 그가 처음으로 개발해 시계의 사운드적인 측면을 크게 개선시켰다. 무엇보다 이런 다양한 요소를 조합하면서도 시계의 두께가 더 두꺼워지지 않도록, 무브먼트를 조정했다는 점이 정말 놀랍다.


창립자의 아카이브를 토대로 파리의 브레게 뮤지엄을 총괄했다. 시계 애호가들의 성지 같은 곳이다.

“브레게가 이런 브랜드다”하는 것을 단순히 말로 전하는 데 그치지 않고, 방문하여 직접 경험하게 하고 싶었다. 하우스의 역사와 헤리티지를 보여주는 모든 자료와 증거품을 한자리에 모았다. 200년 이상 된 진귀한 앤티크 워치들을 눈앞에서 볼 수 있는 점도 매력적이지만, 무엇보다 브레게가 점점 더 혁신하고 발전하는 힘의 근간을 이곳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방문하는 이들이 놓치지 말아야 할 포인트가 있다면?

일단 지금까지의 마스터피스라고 볼 수 있는 작품이 대다수 전시되어 있다. 나폴레옹의 부인이었던 조제핀 황후의 시계도 있고, 세계 최초의 셀프와인딩 워치, 마린 크로노그래프 워치, 터치로 움직이는 태그 워치와 다양한 리피터 워치도 만날 수 있다. 시계를 사랑하는 이라면 흠뻑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248년이라는 긴 역사만큼 아카이브도 방대할 것 같다. 보유하고 있는 아카이브의 양은 어느 정도인가?

사실 처음 브레게 뮤지엄을 구상할 당시엔 하우스에서 보관하고 있는 앤티크 타임피스의 수가 많지 않았다. 그래서 경매를 통해 350점 정도를 확보했는데, 특히 조제핀 황후의 시계는 엄청나게 치열한 경매를 거쳐야 했다. 제품 외에 가문에서 보존하고 있는 자료도 상당히 많다. 프랑스 왕립과학회나 여러 나라의 박물관에 있는 기록물, 브레게가 고객들과 주고받은 서신도 있고, 창립자 이후의 자료도 방대하다. 지금도 꾸준히 아카이브의 양을 늘려가고 있고, 제작하는 시계마다 세세한 기록을 남겨 미래의 가치를 높이고 있다.



파리 방돔 광장에 있는 브레게 뮤지엄. 취리히와 상하이에도 각각 브레게 뮤지엄이 있다.



마치 보물찾기처럼 들린다.

흥미롭고 즐거운 작업이다. 자료나 책의 페이지를 넘기며 몰랐던 사실을 새로 알게 될 때도 많다. 최근엔 창립자와 고객들이 소통한 내역을 담은 문서를 다수 확보했다. 러시아, 폴란드, 스페인, 터키 등 다양한 나라에서 고객의 기록을 찾을 수 있었는데, 이는 브레게가 당시에 어떤 방식으로 네트워크를 구축해서 판매했는지를 보여준다. 고작 18세기 말에 해외까지 영업망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나? 굉장히 흔치 않은 사례다.


해외만큼은 아니지만 한국도 요즘 빈티지 시계 수집가가 늘어나고 있다. 빈티지 시계 시장에서 브레게의 가치는?

몇 차례 한국의 시계 애호가들과 이야기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그중 많은 이가 시계의 디테일에 대해 전문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더라. “왜 이 부분이 이렇게 이루어졌을까?”, “이러한 전통이나 역사는 어디에서 왔을까?” 등 여러 가지 세부 사항에 대해 궁금해하고 또 알고 싶어 했다. 그런 이들에게 브레게는 호기심을 완벽히 충족시킬 수 있는 브랜드다. 나폴레옹 황제나 마리 앙투아네트 같은 수많은 역사적 인물이 브레게의 제품을 착용했는데, 그러한 점 역시 애호가들의 만족을 높일 것으로 생각한다. 긴 역사와 더불어 풍성한 선택지가 있다는 점도 컬렉션에 재미를 더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브레게 워치는?

컬렉션으로 따지면 ‘트래디션’ 라인과 ‘클래식’ 라인을 꼽을 수 있다. 오늘 착용한 제품은 새로 출시된 클래식 라인의 신제품이다. 일단 다이얼이 독특한 디자인을 선호하고, 날짜나 달이 보이는 방식에 매력을 느낀다.


현대사회에서는 시계의 존재 가치가 많이 달라졌다. 시간을 확인하는 용도보다는 취향을 드러내는 오브제로서 기능하는 경우가 많다. 당신이 생각하는 기계식 시계의 의미는?

다음 책의 주제로 고민할 만한 주제인 것 같다. 대답 대신 18세기에 한 철학자가 한 말을 인용하고 싶다. “시계는 하나의 세상이 담겨 있다. 이 세계의 축소판이다.” 굉장히 좋아하는 말이다.


영감을 줬다니 기쁘다. 새로운 출간 계획은 없는지?

2025년, 브랜드 창립 250주년을 앞두고 아브라함-루이 브레게가 썼던 편지 내용의 일부를 발췌한다건가, 했던 말을 인용하는 부분에 대해 확인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를 토대로 약간의 사전 역할을 하는 책을 구상 중이다. 또한 브레게가 한국에서 크게 사랑받고 있는 만큼, 여러 가지 출간물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작업도 계획하고 있다. 최근 신제품 출시에 맞춰 작은 책을 출간했는데 이 역시 한국어 번역을 마쳤다.



COOPERATION  브레게(breguet.com)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