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XURY ART

LUXURY WEEK x 아티스트 강은혜

손과 실만 있으면 그 어느 공간이든 작업으로 탈바꿈할 수 있는 강은혜. 불가리 ‘세르펜티’ 워치와 만나 시계의 유려한 곡선에서 힌트를 얻은 선들의 향연을 보여준다.

EDITOR 정송

현재 홍익대학교 섬유미술패션디자인과에서 후학 양성에 힘을 쏟고 있는 강은혜는 미국 볼티모어 메릴랜드 예술학교에서 섬유미술과를 졸업하고, 미시간의 크랜브룩 예술 아카데미에서 석사를 취득했다. 이후 홍익대 대학원에서 디자인공예학과 섬유미술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현대미술의 영역에서 자신만의 장면을 만들어나가고 있다. 강은혜는 실을 활용해 그림의 기본 요소인 점, 선, 면의 힘을 떠올리는 공간 설치 작업을 선보인다. 점과 점 사이를 팽팽한 실로 수없이 연결하며 면을 만들고, 낱개의 실과 이를 통해 구성된 면이 뿜어내는 에너지를 공간에 가득 채운다. 참여하는 전시마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단 하나뿐인 작업을 선보이는 작가는 이번 ‘럭셔리위크’에서도 전시 공간 ‘모이소’에 불가리 ‘세르펜티’ 워치에서 영감받은 에너지를 응축해놓을 예정이다. 은사銀絲와 금사金絲를 사용해 시계의 메탈릭한 느낌을 살리고, ‘세르펜티’ 워치의 유기적이며 곡선적인 구조를 차용해 서로 얼기설기 얽혀 흐르는 듯한 장면을 연출하는 새로운 시도를 엿볼 수 있다.



처음 작가님의 작품은 한글의 선에서부터 영감받으셨다고요.생각해보니 한글은 유독 선이 많은 글자인 것 같습니다. 어떻게 작업으로 발전시켜왔는지 궁금합니다.

작업 초기에는 패턴과 패브릭에 관심이 많았어요. 처음 한글에서 작업에 ‘선’을 차용할 때 미국에 있었어요. 과제를 하는 중에 한국인으로서 특색 있는 작품을 선보이고 싶었거든요. 자연스럽게 한글을 디자인 요소로 바라보게 된 것 같아요. 로마자 알파벳이나 다른 언어와 다르게 한글은 덩어리적인 면모가 있잖아요. 기하학적 형태로 접근했어요. 여기에 더해 언어에서 ‘의미’와 ‘소통’이라는 부분을 배제하면, 사실은 기호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처음에는 종이와 패브릭 평면에서 작업하다가 점점 공간 전체에 관심이 옮겨가면서 자연스럽게 선으로 이를 관통하는 작업을 시도하게 됐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공간 설치 작업을 선보이다 보니, 공간이 마치 캔버스의 역할을 하게 되는 듯합니다. 대체로 작업이 장소 특정적일 것 같기도 하고요. 찰나에만 존재하다 사라지는 작품이 아쉽진 않나요?

제 작업은 이미지로만 남습니다. 조금 서글픈 부분이긴 한데, 이제 받아들였어요. ‘공간’이라는 말 자체가 비어 있는 장소라는 뜻이잖아요. 저는 그런 곳들이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 아니라 상상으로 채울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공간이 결코 비어 있지 않음을 시각화하는 과정에서 선이 등장하는 거죠. 한 번 전시할 때 기본 일주일 이상 설치 시간이 소요돼요. 그런데 해체할 때는 30분도 안 걸리죠. 팽팽하게 당겨진 실을 그냥 가위로 잘라버리거든요. 저는 그 해체의 순간이 아쉽다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오히려 전시 설치부터 해체까지 이르는 과정 전반이 제 작업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 장소에서 특정 기간과 순간에만 존재하는 작업이라 더 큰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모이소’에서 열리는 이번 ‘럭셔리위크’에 참여하는 소감을 부탁드립니다.

모이소는 개인전이 아니다 보니 함께하는 다른 4 명의 작가님과의 시너지를 가장 먼저 생각할 수밖에 없었어요. 구획이 되지 않은 하나의 공간에 다른 작가님들은 어떤 브랜드와 어떠한 작업을 전개하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가장 효과적인 설치는 무엇일까 고민했습니다. 대체로 단체전에서는 제가 하고 싶은 방식을 고집할 수는 없잖아요. 그렇다 보니 좀 더 주변 환경과 여러 요소를 수용하는 방식으로 작업하게 되는 듯합니다. 다섯 작품이 한 공간에서 어떠한 장면을 연출할지 기대돼요. <럭셔리>라는 매체와 브랜드 그리고 기획자와 참여 작가들의 시너지가 많은 분께 전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작가님께서는 평면 작업도 여전히 진행하고 계시죠. 이번 ‘럭셔리위크’ 작업을 구상하시면서 작업실에서 전개한 새로운 평면 작업도 봤는데 신선했습니다. 평면 작품과 설치 작품의 간극에 대해 여쭤보고 싶습니다.

많은 사람이 평면에서 설치로 작업이 옮겨간다고 생각하는데, 꼭 그렇지는 않거든요. 공간에 수없이 많은 실을 거는 행위를 평면으로 옮겨왔다는 게 맞을 것 같아요. 평면 작업에서 좀 더 직접적으로 제 에너지를 화면에 표출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평면 작업을 할 때 한지와 먹, 그리고 실을 사용하고 있어요. 먹의 농담과 선 굵기의 차이로 표현을 합니다. 멀리서 바라봤을 때는 하나의 면으로 보일 수 있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수많은 갈래로 나뉜 것처럼, 순간순간 달라지는 저의 상태가 모여 작품으로 완성되는 거라 볼 수 있죠. 그런데 이번에 인터뷰 때 보신 평면 작품은 제 생각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나온 산물이었어요. 그간 저의 평면 작품을 살펴보면 직선의 움직임만 있다는 걸 눈치채셨을 거예요. ‘럭셔리위크’에서 불가리 ‘세르펜티’ 워치와 함께 작업을 하다 보니 곡선에 눈길이 가더군요. 그래서 실타래에 먹을 묻히고 타래의 모양대로 한지 캔버스에 굴려보았는데, 신선하고 재밌었어요. 이렇게 실이 남긴 ‘흔적’은 제 작업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 가운데 하나입니다. 평면 작업에서 보면 ‘지나간 흔적’일 수 있고, 공간 설치 작업에서는 실을 걸어나가는 행위가 쌓인 ‘시간의 흔적’일 수 있어요. 이러한 공통분모가 제 작업 전반에 걸쳐 있습니다.


이번에 ‘럭셔리위크’를 위해 작업하며 꽤 즐거우셨던 것 같습니다.

맞아요. 한 가지 재밌는 일이 있었어요. ‘럭셔리위크’ 전시 제안을 받기 얼마 전에 뱀이 나오는 꿈을 꿨어요. 전시할 운명이었나 봐요. 저는 주로 직선으로 작업을 해왔어요. 그런데 뱀은 직선과 함께 유려한 곡선을 자랑하는 파충류잖아요. 듣자마자 재밌을 것 같았어요. 선들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 또 브랜드와 어떻게 연결할 수 있을지 고민하면서 동시에 은빛과 금빛으로 반짝이는 실을 사용하는 등 새로운 작업 방식도 생각해보게 됐죠.


전시의 주제인 ‘시간’과 불가리 ‘세르펜티’ 워치, 그리고 작가님의 작업에 분명 공통분모가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전시를 관람하는 이들이 어떤 점을 눈여겨봤으면 하나요? 저에게는 점에서 점으로 이동하는 선이 공간에서 공간으로 이동하는 것, 그리고 시공간을 가로지르는 것과 비슷한 것 같아요. 불가리는 매우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브랜드죠. 이를 상징하는 뱀 역시 오랫동안 불가리와 함께한 시간이 흐른 만큼 그 의미가 단단하게 축적됐어요. 과거-현재-미래를 아우르는 ‘연속성’이야말로 이런 브랜드가 가진 ‘코어’가 아닐까요? 다시 말해 점과 점을 잇는 선을 통해 시간의 연속성을 은유하는 제 작업과 맞아떨어지는 것 같아요. 이런 점을 알고 작품을 보면 주제와 ‘세르펜티’, 그리고 작업 간의 상호작용을 읽어내는 일이 훨씬 쉽게 느껴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PHOTOGRAPHER 이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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