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호

자연과 사람을 잇는 건축 Itami Jun museum

‘사람의 온기와 생명을 밑바탕에 두고, 그 지역의 전통과 문맥, 에센스를 어떻게 건축물에 담아낼 것인가?’를 고민하던 
건축가 이타미 준. 그의 얼을 느낄 수 있는 유동룡미술관이 개관했다.

GUEST EDITOR 유승현

ⓒ 김용관

미술관 2층 상설 전시가 열리는 공간. 제주도의 형태를 본떠 타원형으로 설계했다


건축가 이타미 준(유동룡)은 바람과도 같은 사람이다. 단편적으로 그를 규정할 수 없을뿐더러 어딘가에 얽매이는 삶을 살지도 않았다. 그는 1937년 재일 교포로 태어나 40여 년간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경계인의 삶을 살았다. 평생 일본으로의귀화를 거부했으나 일본의 권위 있는 건축상 ‘무라노 도고상’을 수상했고, 한국인 최초로 프랑스 슈발리에 예술문화훈장을 받으며 건축계에 명징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제2의 고향으로 제주를 꼽았던 그는 포도호텔, 방주교회, 수·풍·석 미술관 등 제주의 다양한 건축물을 설계하기도 했다. 세계적인 건축가 이타미 준이 타계한 지 12년이 흘렀다. 긴 시간이 흘렀지만 누군가는 그의 유언을 품고 살았다. “사이좋게 지내라. 그리고 이타미 준 건축문화재단과 기념관을 만들면 좋겠다. 모든 책임은 내 딸 유이화에게 있다. 다만 이것은 내 희망 사항이다.” 이타미 준의 딸이자 ITM 유이화건축사사무소 대표 유이화는 그 말을 실현하기 위해 계속해서 달려왔고, 2022년 12월 드디어 제주 저지리 예술인마을에 유동룡미술관Itami Jun Museum이 문을 열었다.

이타미 준의 철학을 담은 공간
유동룡미술관은 재일 교포 건축가로서 본명 대신 예명 이타미 준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고인을 기려 그의 본명으로 이름 지어졌다. 이름을 내건 만큼 건축부터 전시 프로그램까지 이타미 준의 철학을 기준점으로 삼았다. 미술관에 무심히 놓인 의자 하나도 생전 그가 만든 의자의 사진을 보고 복원했을 정도. 공간은 아버지를 누구보다 잘 아는 딸이자 10여 년간 함께 일한 파트너 유이화 대표가 설계했다. “이타미 준의 이름을 내건 미술관이기에 이타미 준이 잘 드러나는 동시에 그를 담는 그릇 역할을 겸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부담도 만만치 않았죠.” 지상 2층 규모의 미술관을 설계한 그는 제주의 형태를 본뜬 타원형 상설 전시관 ‘먹의 공간’을 2층에 올렸다. 또한 곶자왈을 비롯한 주변의 자연환경을 품는 형태를 통해 이타미 준의 건축 철학인 지역성, 바람의 언어 등을 담고자 했다. 설계를 완성한 뒤 2020년 기공식을 진행했지만 2년여의 시간이 흘러서야 개관을 하게 되었다. 땅을 파기 시작하자 제주 방언으로 평평한 암반을 뜻하는 ‘빌레’가 등장했기 때문. 6개월간 공사를 중단하고 설계도를 변경했다. 부지의 빌레도 온전히 드러냈다. 그렇게 이타미 준의 얼을 담은 미술관은 제주의 자연에 움텄다. 미술관으로 향하는 길부터 내부까지 건축적 시퀀스 또한 빼어나다. 우선 자연과 밀착된 느낌을 주기 위해 돌과 스테인리스스틸로 길게 담을 냈다. 담은 여행의 들뜬 마음을 잠시 내려놓고 이타미 준의 예술을 만나기 위해 준비하는 전이 공간의 역할을 겸한다. 미술관 내부는 3개의 전시실과 라이브러리, 교육실, 아트 숍과 티 라운지로 구성된다. 상설 전시관은 꾸준히 이타미 준의 작품 세계를 소개하는 공간으로 활용할 예정이지만, 기획 전시관은 개관전 <바람의 건축가, 이타미 준> 이후 다양한 장르의 작가, 작품을 소개할 계획이다. 건축뿐 아니라 미술, 서예 등 전방위적으로 경계 없이 예술 활동을 펼쳐온 이타미 준의 철학을 십분 반영한 결정인데, 이타미 준의 건축을 중심으로 다양한 장르의 예술과 교류하고자 한다. 실제로 미술관 개관식 때는 무용가 안은미 선생이 공연을 했고, 미술관에는 피아니스트 양방언 선생의 음악이 흐른다. “아버지는 건축가로서 한국의 전통성에 매료되어 어떠한 유행에도 흔들리지 않은 분이에요. 재일 교포 2세인 양방언 선생님의 음악에서 아버지와 비슷한 결을 보았어요. 생전에 아버지와 인연은 없었지만 미술관을 통해 두 분이 만난다고 생각해요. 다른 예술가들의 작품을 지속적으로 소개하는 것 또한 같은 이유예요.” 미술관을 채운 향기와 티 라운지의 티도 비슷한 맥락으로 준비했다. 향은 이타미 준의 서재에서 늘 나던 고서적과 먹 내음을 한서형 조향사가 재현한 것이다. 티 라운지의 티는 제주 티하우스 ‘우연못’과 협업해 블렌딩한 것으로, 제주의 자연과 이타미 준 건축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완성했다. 한 모금 마시는 순간, 살짝 흐르는 민트 향이 제주의 시원한 바람을 상기시킨다.


ⓒ 김용관

자연을 경험하는 그 자체로 작품이 되는 건축을 지향한 석石 미술관.


젊은 시절 이타미 준의 모습.



ⓒ Shinichi Sato

이타미 준이 총괄한 제주 영어 교육 도시 프로젝트를 통해 완공된 광장 중앙의 ‘JDC 상징탑’.


바람을 닮은 건축가
매년 제주 금릉해수욕장에서 가족들과 해수욕을 하며 휴가를 보냈다는 이타미 준. 그가 이토록 제주를 사랑한 이유는 무얼까? 건축가 이타미 준은 대지를 어루만지고 사람을 보듬는 바람을 영감의 원천으로 삼곤 했다. 그는 바람이 들려주는 노래에 집중하다 보면 어떤 형상이 떠오른다고 했다. 수·풍·석 미술관을 설계할 당시 이런 인터뷰를 남기기도 했다. “요즘 내 몸속으로 제주의 바람이 불어요. 제주 사람의 상처를 보듬어준 동글동글한 오름의 선이 집으로 살아납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궤적이 그 안에 있어요.” 그는 인간을 압도하는 대자연과 겨루는 대신 사람의 상처와 마음, 생활을 품는 포용력의 바람을 건축에 인용했다. 이러한 이타미 준의 면모는 개관전 <바람의 건축가, 유동룡>에서 잘 드러난다. 전시는 이타미 준의 초기작 ‘어머니의 집’부터 말년의 제주 영어 교육 도시 프로젝트까지 40여 년의 작업을 시간에 흐름에 따라 소개한다. 작품을 통해 가공하지 않은 자연의 야성이 살아 있는 건축, 생각의 힘을 뺀 무심無心의 건축,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잇는 건축 등 이타미 준의 건축 철학 또한 살필 수 있다. 그의 전 생애에 걸친 건축물에는 ‘지역의 전통, 문맥, 에센스’를 감지하고 건축물에 녹이고자 한 흔적이 역력하다. 2개의 전시실 가득 들어찬 건축 모형, 사진, 드로잉, 글에서 이러한 노력을 엿볼 수 있다. 관람객들이 건축가의 혼과 열정을 좀 더 생생히 느낄 수 있도록 생전 이타미 준의 서재를 고스란히 구현한 부스도 마련했다. 설명적인 전시보다 건축에 관심 없는 사람도 흥미롭게 관람할 수 있는 전시를 지향했다고. 대신 작품에 대한 보다 상세한 설명은 배우 정우성과 문소리, 걸 그룹 에스파 멤버 카리나와 지젤의 오디오 도슨트를 통해 들을 수 있다. “자유로운 추상을 추구하면서 물질과 근본, 관계성에 몰두한 초기 작품에서 시작해 그만의 오리지낼러티를 만들어가는 40여 년의 여정을 축약해서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하나하나 혼을 다해 완성한 스케치과 모형의 힘을 믿던 분이셨지요. 매사에 혼을 담아 임하던 아버지의 건축적 자세를 통해 현대사회에 결핍된 사람의 온기 그리고 야성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전시는 지역성을 고려하지 않고 기계적으로 건축물이 완성되는 현대에 건축가가, 또 대중이 회복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묻는다. 3D 프린팅이나 컨테이너처럼 어느 땅에나 끼워 넣듯 건축물이 완성되는 시대에 건축의 역할과 의미는 쇠약해질 뿐이다. 유동룡미술관은 단순히 세계적인 건축가 이타미 준의 업적을 회고하는 것을 넘어, 바람처럼 사람들의 삶을 보듬고 개입하는 건축의 본질적 의미를 상기시킨다.


ⓒ Shinichi Sato

제주 한림읍 저지리 예술인마을에 위치한 유동룡미술관 전경.



ⓒ Shinichi Sato

제주의 자연을 대표하는 물을 테마로 완성한 수水 미술관. 미술품을 전시하는 미술관을 넘어 ‘명상 공간으로서의 뮤지엄’을 지향한다.

cooperation 유동룡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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