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명숙 193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58년 홍익대학교 미술학부에 입학했으나 1학년을 마치고 중퇴했다. 20세에 화가 박서보와 결혼한 후 주부로 지내다 2006년 67세 나이로 문학미디어에 단편 <오렌지의 기억>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이후 꾸준히 글쓰기를 하고 있으며, 수필집 <나로 말할 것 같으면>(2021)을 출간했다. 그리고 지난 5월 딸 박승숙과 함께 <명랑한 독립>(2026)을 발표했다.
연희동을 떠나 새로운 보금자리인 시니어 하우스에서 생활하고 계십니다. 요즘 하루를 어떻게 보내세요?
<명랑한 독립>에 쓴 것처럼 단순한 생활이에요. 오늘은 인터뷰가 있다고 하니까 신경이 쓰였는지 좀처럼 집중이 안 되더라고. 원래 하던 대로 책도 보고 글도 써보려 했는데···. 자꾸 시계만 들여다봐서 텔레비전 보다가 시간 맞춰 나왔어요. 현관문을 열었는데 어찌나 뜨겁던지 깜짝 놀랐네. 밖에는 거의 안 나오거든요. 나가봐야 슈퍼에서 과일이나 군것질거리 사가는 정도예요. 시니어 하우스는 헬스장 같은 시설이 잘돼 있지만, 나는 그런 걸 잘 못하니까 혼자 지내는 시간이 길어요. 오히려 그게 내 성향에는 맞는 것 같아.
시니어 하우스에서 목욕탕 물 쓰는 방식, 사람들 사이에 오가는 풍문 등 이전과 다른 생활을 경험하고 계십니다. 개인적으로는 “연애하시나?”라는 질문에 “기대하셔”라고 답한 장면에선 웃음이 나왔어요.
처음에는 그쪽 생리를 몰랐어요. 조금 험상궂게 생긴 사람만 봐도 긴장했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아요. ‘이 사람은 이래서 이러는구나’ 이해하게 되니까 마음이 한결 편해졌죠. 그동안 내 주위 사람들을 내가 선택해서 만난 경우가 별로 없었잖아요. 화랑 사람들 아니면 화가들, 화가 부인들, 그런 테두리 안에서만 지냈지요. 그런데 여기에 와서는 완전히 탈출했다는 느낌이 들어요. 또 다른 관계를 맺고 있으니까. 성격은 원래 안 변한다지만, 살아남으려면 안 변할 수가 없겠더라고. 적응하다 보니 장난도 치게 되고, 웬만한 농담은 정색하지 않고 되받아쳐요. 그럴 때도 나만의 전략이 있어요. 무표정으로 하는 거지. 말하는 사람이 먼저 웃으면 상대방이 김이 빠져서 안 웃거든. 절대 웃지 않고 얘기해야 해. 타이밍도 잘 맞춰야 하고.
<명랑한 독립>에서 산다는 일을 100년에 걸쳐 자기만의 작은 우물을 만드는 일에 비유하셨습니다. 돌이켜보면 선생님의 우물은 어떤 세계였나요?
그거 겉멋 들어서 유식한 척하고 써본 거예요. 내 우물 안에는 박서보밖에 없어요. 그 테두리 안에서만 살았기 때문에 거기서 벗어날 수가 없었죠. 아직도 다 벗어났다고는 못 하겠고, 사실은.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나니까 한동안은 내가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 그전에는 그런 상황을 여러 번 상상했는데, 막상 닥치니까 아무것도 떠오르지가 않았어요.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은 이걸로 다 끝났구나 싶었죠. 내 일이 따로 있었으면 그 일을 하면 되는데, 그런 게 전혀 없었으니 손발이 잘린 기분이었어요. 그래서 다른 세계에 가서 적응해보면 어떨까 하고 시니어 하우스로 간 거지. 처음에는 ‘내가 정말 잘한 결정인가’ 의문도 들었는데, 살아보니 이것도 꽤 괜찮은 인생이더라고. 연희동에 계속 머물렀다면 이런 경험도 못 했을 테고. 예전과 비교하면 딴사람이 된 것 같아요.

박서보미술관의 개관전 <박서보와 흐엉 도딘: 비움 그 충만> (8월 21일~2027년 1월 3일)이 열리는 전시장에 선 윤명숙.
글과 그림은 선생님에게 어떤 점에서 닮은 작업인가요?
공통점 은 있어요. 둘 다 아무것도 없는 데서 시작하잖아요. 새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는 거하고 빈 종이에 글을 쓰는 거하고. 그런데 글은 노트북 하나만 들고 다니면 되지만, 그림은 준비할 게 여럿이고 한 번 앉으면 서너 시간은 꼼짝없이 그려야 해요. 다만 이제 체력 이 달려요. 이사할 때도 혹시나 해서 그림 도구는 다 가져갔는데 엄두를 못 내겠더라고.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은 지금 남아 있는 것과는 조금 달라요. 40대 초반에 남편이 작업실이 없어서 주차장에서 그림을 그릴 때 옆에서 남편이 쓰던 물감을 그린 적이 있어요. 미완성이라 버리려고 했더니 남편이 못 버리게 하더라고. 생각해보니까 그때 안 버려서 지금껏 남은 거야. 고맙죠. 지나고 보니 정작 내가 바라던 쪽으로는 한 번도 모험을 안 해봤어.
2021년 출간한 <나로 말할 것 같으면>에서 “나는 태생적으로 서정적인 작품을 봐야 마음이 흔들리는 모양이다”라고 하셨어요. 미감이 달랐던 두 분은 서로의 작업을 어떻게 바라봤나요?
서로 작품 얘기는 잘 안 했어요. 우리 선생님은 내가 그림 그릴 때 옆에 오지도 않았고요. 온다 해도 내가 못 그리죠. 대가가 뒤에 서서 내가 하는 걸 보고 있으면 얼마나 창피해요. 나는 추상 쪽은 잘 모르기도 하고, 내가 아는 거라고 해봐야 정물이나 그리는 정도니까, 남편 그림을 두고 이렇다 저렇다 할 입장이 못 되었어요. 그래서 서로 관여를 안 했죠. 젊었을 때는 조금 섭섭했어요. 내가 그림 그리는 데는 관심이 없구나 했는데, 남편이 투병할 때 나 그리기 좋으라고 한 10호쯤 되는 틀을 열 점 정도 만들어서 밑칠까지 해놨더라고. 몸도 성치 않은 사람이 그걸 다락방까지 들고 올라온 걸 보면, ‘나보고 그림을 그리라는 얘기구나. 아주 무관심한 건 아니구나’ 그때 알았어요. 내 그림을 좋아했는지는 모르겠어. 작품을 좋게 평가했다기보다 내가 계속 그리는 걸 그냥 인정해준 거겠죠. 남편 작품 중에 뭐가 제일 마음에 드느냐고 물으면 선뜻 못 꼽겠어요. 내가 그런 격조 높은 그림을 볼 안목이 별로 없거든. 괜히 아는 척했다가 무식이 탄로나니까 아무 소리 안 해요. 작품은 잘 몰라도 그 사람이 살아온 건 바로 옆에서 봤잖아요. 한 가지 일을 끝까지 해냈다는 건 정말 존경해요.

(위) 8월 21일 연희동에 문을 연 박서보미술관 3층에 서 있는 윤명숙. 뒤에 있는 작품은 ‘묘법 No. 230127 & No. 230128 & No. 230129’(2023)로 박서보미술관에서만 볼 수 있다.
(아래) 에디터가 독일 함부르크 몽블랑 하우스에 보았던, 박서보 화백이 아내 윤명숙에게 쓴 편지.
몇 년 전 독일 함부르크 몽블랑 하우스에서 박서보 화백이 선생님께 보낸 엽서들을 보았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 그 편지를 마주하니 어떤 시절이 떠오르던가요?
편지가 엄청 많았는데, 30대 후반 언젠가 싸우고 내가 거의 다 태워버렸어요. 파리에서도 일주일에 한 번씩 꼭꼭 보내왔는데 내 손에 남은 건 없어요. 몽블랑 하우스에 있는 편지에선 우리 친정 식구들 안부를 참 꼼꼼하게 물었더라고. 아마 미안해서 그랬을 거예요. 큰아이가 아직 어렸고, 전셋집 얻을 형편도 아니었을 때 월세 보증금을 빼서 둘이 반반 나눠 가졌는데, 남편은 그걸 가지고 파리로 갔죠. 서너 달이면 돌아올 줄 알았건만, 거의 1년을 있었어요. 나는 친정에 갔다가 다시 서울로 올라와 일을 했고요. 우윳값은 벌어야 하니까. 남편이 돌아올 무렵에는 들어올 집도 없어서 돈을 빌려 방 하나를 얻었어요. 그 뒤 한 10년 동안은 맨땅에다 머리를 들이박았어요, 둘이서. 남편이 홍익대학교에 자리를 잡고 나서는 ‘이제 사람답게 사는구나’ 했어요. 근데 남들이 보기에는 아주 처참했었대요. 나는 잘 사는 줄 알았는데 말이지. 끈에 연탄을 매달아 골목으로 나르고, 불이 꺼지면 옆집에서 불씨를 얻어오던 걸 누가 봤나 봐. 지금 그 편지를 보니까 감동스럽다기보다 좀 글썽해지네.
<나로 말할 것 같으면>에 있는 “나는 밥이나 주는 마누라로, 자긴 술꾼 남편으로 기록을 남기다니”라는 문장이 웃음을 주면서도 짠한 감정이 들게 했습니다. 오랜 세월 ‘박서보의 아내’로 살아온 시간을 지금은 어떻게 바라보세요?
인간 박서보는 흠이 많을 거예요. 그런데 화가 박서보는 흠이 없어요. 남의 모범이 되는 삶을 살았고. 남편으로만 보면 흠투성이죠. 버텨낼 여자 별로 없었을걸요. 우리는 그림을 그리니까 생활이 전혀 달랐어요. 아이들이 클 때 교육이나 돌봐주는 일에도 거의 손을 못 댔고. 그런 데서 결핍을 느꼈겠지만 결국 아버지 덕을 단단히 보고 있잖아요. 화가하고 살려면 각오가 없으면 안 돼요. 화가 부인들은 다 표창장을 줘야 해. 나는 평생 누구의 부인으로 살았잖아요. 그렇다고 그게 보람 있는 일이라고 남한테 권하진 못하겠어. 굉장히 어려운 일이거든. 내가 다시 태어난다면 누구의 부인이나 누구한테 얽매이지 않고 나대로 한번 살아보고 싶어요.

윤명숙, ‘졸고 있는 남편’, 종이에 연필, 2021
한편으로는 60년이 넘는 시간을 한 사람과 함께 걸어오셨어요.
남들이 이런 얘기를 들으면 ‘남편 덕을 크게 본 사람이 저런 소리를 하나’ 할 수도 있어요. 그래도 보이는 것만 갖고 평가할 수는 없잖아요. 나는 60년이 넘도록 한 사람하고 같이 살았으니까 그런 점에서는 성공했다고 봐야겠네. 성공한 삶이네. 나도 한길을 걸어봤으니까. 중간에 포기를 안 했으니까. 이게 내 사랑이었던 것 같으네. 오늘 인터뷰한다고 하니까 ‘박서보한테서 완전히 독립이 안 됐구나’가 먼저 떠올랐어요. 아들한테도 여전히 아빠한테 빼먹을 게 있다고 했죠. 어차피 숨길 수도 없는 거니까 마음 편하게 이용할 대로 이용해야지.
지금까지 살아오며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장면 하나를 꼽는다면요?
스무 살 가을,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가 가장 강렬한 장면이에요. 남학생들을 따라서 이봉상회화연구소라는 데를 갔는데, 우리 선생님이 500호짜리 그림을 그리고 있었거든. 나는 맨날 정물이나 그릴 때인데, 그렇게 큰 캔버스를 세워놓고 사다리에 웬 남자가 올라가서 이만 한 붓을 든 채 막 그리고 있더라고. 깜짝 놀랐어요. 기억이라는 건 지워질 수도 있는데, 사진이 남아 있어서 그때 모습이 머릿속에 오래 남나 봐요. 당시에는 무서운 선생님이 있구나 했죠. 삐쩍 말라가지고 내 스타일은 아니었거든. 눈도 부리부리하고. 나는 그런 남자 싫어했어요. 보통 연애를 하면 약속하고 만나고 가슴이 두근두근하는 과정이 있잖아요. 우리는 그게 없었어요. 그저 선생님이고 학생이니까. 나중에 들어보니 남편은 나를 예전부터 봤다고 하더라고. 계획적으로 나를 옭아놓은 줄도 모르고 따라간 거지. 환상이나 큰 기대가 없어서 60년 넘게 결혼 생활을 유지했는지도 몰라요. 주어진 환경에 빨리 적응하고 살아남으려고 하루하루 열심히 산 것 같아.
그런 시간들을 글로 남겨야겠다고 마음먹은 계기가 있었나요?
내가 죽으면 이런 얘기가 다 없어지는구나 했어요. 그게 아깝더라고. 기억나는 일도 좀 있고. 그래서 글로 남겨야겠다 했어요. 애들이 읽으면 ‘엄마는 어렸을 때 이렇게 살았구나’ 하며 재미있어 하겠지 싶었고. 그렇게 쓰기 시작했어요.
윤명숙, ‘붓과 페인트 통’, 캔버스 위에 유화물감, 1986
윤명숙, ‘붓과 페인트 통’, 캔버스 위에 유화물감, 1986
박서보 화백의 이름을 건 미술관이 문을 엽니다. 완성된 공간을 오늘 처음 보셨다고 들었는데, 어떠셨어요?
감회가 깊다고 해야 하지만, 아무 생각이 없어요. 그냥 당연해요. 애들한테는 고맙죠. 고생했으니까. 남편이 워낙 욕심이 큰 사람이어서 자기 그림도 많이 남겼고, 미술관 짓는 것까지 애들한테 늘 얘기를 했거든. 애들한테 빚을 남겨준 거나 마찬가지라 미안해요. 어쨌거나 성공은 했어요. 저게 되려나 했는데. 사람들이 찾아와서 봐주면 좋겠어요. 작품을 자꾸 팔아서 운영비를 대다 보면 나중에는 작품 없는 미술관이 될 수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인기 좋게 잘 써주세요. 호기심이 들게. ‘연희동 구석쟁이에 뭐가 있다더라. 거기는 한번 가봐야겠다’ 싶게.
마지막으로 사람들에게 ‘윤명숙’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기억되고 싶으세요?
나는 글 쓰는 작가도 화가도 아니거든요. 사람들이 부르기가 마땅치 않으니까 그냥 작가라고 하나 봐요. 그렇게 부르면 남의 옷 얻어 입은 것처럼 불편해요. 진짜 열심히 글 써도 발표가 안 되는 사람들이 수두룩한데, 나는 어떻게 하다가 책이 나온 거예요. 글이 특별히 좋아서라기보다 운이 좋았던 거지. 더군다나 작가나 화가로도 남고 싶지는 않아요. 어쩔 수 없이 ‘화가 아무개 부인’으로 불릴 때는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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