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이 이어온 한국과 프랑스의 시간

한불 관계가 ‘글로벌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된 지금, 두 명의 필립을 만났다. 
필립 베르투 주한 프랑스 대사와 한국 현대미술을 오랜 시간 지켜봐온 컬렉터 필립 티로. 외교의 장과 사적인 컬렉션 사이에서 오간 이들의 대화는 예술이 어떻게 한 시대의 기억을 보존하고, 다음 세대를 향한 관계의 지도를 그려나갈지 들려준다.

EDITOR 박이현 PHOTOGRAPHER 이우경


필립 베르투(왼쪽) 2023년 7월부터 주한 프랑스 대사로 재임 중인 프랑스 외교관. 한불 관계 강화와 경제·문화 교류, 한국 내 프랑스 커뮤니티 지원을 주요 임무로 수행하고 있다. 필립 티로(오른쪽) 한국에 오랜 세월 거주하며 한국 현대미술을 수집해온 프랑스 컬렉터. 현재 글로벌 인재 컨설팅 기업 DHR 글로벌의 서울 오피스에서 파트너로 일하고 있다.



한불 수교 140주년이라는 특별한 시점에 서 있습니다. 지난 4월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국빈 방한이 한불 관계에 남긴 핵심적인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필립 베르투 마크롱 대통령의 이번 방한은 한국과 프랑스의 관계를 한층 높은 차원으로 이끈 결정적인 계기였습니다. 우리는 인도·태평양 지역의 안정과 안보, 그리고 공동의 번영을 위해 연대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재확인했습니다. 특히 신기술과 혁신을 중심으로 한 경제·무역 파트너십은 이제 한불 관계를 지탱하는 견고한 축이 되었어요. 하지만 이 모든 움직임의 바탕에는 ‘문화’라는 오래된 토대가 있습니다. 여의도에 들어설 퐁피두센터 한화와의 협력, 오는 9월 프랑스에서 열릴 ‘뤼미에르 서밋Lumière Summit’의 공동 의장국 발표 등은 두 나라가 서로의 창의성을 얼마나 신뢰하고 있는지를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수교 140주년은 과거의 숫자를 기념하는 시간이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100년을 위한 파트너십을 설계하는 출발선입니다.


이번 전시는 김중업 건축가의 역작인 프랑스 대사관저에서 열린다는 점에서 더욱 특별합니다. 필립 베르투 프랑스 대사관저는 외교적 장소인 동시에 일상의 시간이 흐르는 사적인 공간입니다. 이곳을 설계한 김중업 건축가는 한국 근대건축의 거장으로 파리의 르코르뷔지에 아틀리에에서 수학하며 모더니즘의 언어를 한국 전통의 감각과 결합한 인물이고요. 이곳에 필립 티로의 컬렉션을 초대하는 것은 예술이 제도와 삶, 그리고 양국의 역사와 감각을 잇는 매개체가 될 수 있음을 환기하기 위해서입니다. 프랑스와 긴밀한 인연을 맺은 한국 작가들의 작품을 대사관저에서 감상하는 일은 한국과 프랑스가 미학이라는 공유된 언어로 쌓아온 시간을 한자리에서 다시 바라보는 뜻깊은 경험이 될 것입니다.


필립 티로 컬렉터에게 묻고 싶습니다. 한국 미술을 컬렉팅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필립 티로 한국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 저는 이곳의 낯설고도 아름다운 문화를 가까이에서 이해하고 싶었습니다. 처음에는 역사에 관심을 두었고, 자연스럽게 고미술품을 수집하며 한국의 미학적 정수를 체험했어요. 이후 고미술에 대한 탐닉은 ‘지금, 여기’의 작가들인 현대미술에 대한 호기심으로 번졌습니다. 특히 저를 놀라게 했던 사실은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들이 이미 1950~1960년대부터 프랑스와 긴밀한 교류를 나누며 자신의 세계를 넓혀왔다는 점이었어요. 제 컬렉션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했습니다. 제게 한국 현대미술을 바라보는 일은 한 나라의 미술사를 공부하는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작가들이 격변의 시대를 어떻게 통과했는지, 낯선 프랑스라는 땅에서 어떤 영향을 받았으며, 어떤 방식으로 자신만의 언어를 만들어냈는지를 따라가는 여정이었습니다.


이응노, ‘문자추상’, 1979, 종이 콜라주, 130×80cm


이번 전시 속 작가들에게 프랑스는 유학지 이상의 의미였을 것 같습니다. 필립 티로 20세기 프랑스는 전 세계 예술가들이 모여 자유롭게 숨 쉬던 해방의 무대였습니다. 한국 작가들이 또 다른 예술적 가능성을 찾고자 프랑스로 향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지요. 누군가는 그곳에 완전히 뿌리를 내렸고, 누군가는 프랑스에서의 치열한 경험을 자양분 삼아 한국으로 돌아와 자신의 작업을 독보적인 위치로 격상시켰습니다. 이들을 이끈 공통의 힘은 규범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분위기, 그리고 서로 다른 문화와 태도가 공존하는 예술적 활기였습니다. 프랑스는 작가들에게 익숙한 환경에서 벗어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마주하고, 작업 방향을 재정립할 수 있는 장이었습니다.


박서보, 윤형근, 김창열, 이배 등 한국 단색화의 거장들이 컬렉션의 중심을 이룹니다. 오랜 시간 이들의 작품과 함께하며 발견한 아름다움이 있다면요? 필립 티로 저는 단색화가 지금처럼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기 훨씬 전부터 이들의 행보를 주목해왔습니다. 특히 한지, 흑연, 천연 안료 그리고 먹처럼 자연에서 온 재료를 다루는 그들의 방식에 매료되었어요. 이러한 작품들과 같이 지내는 일은 매우 특별합니다. 작품들은 주변을 압도하거나 장악하려 들지 않아요. 대신 조용히 스며들어 일상의 공기를 차분하게 가다듬어주죠. 시간이 흐를수록 작품의 표면은 더 많은 이야기를 건넵니다. 처음에는 미처 보이지 않던 섬세한 결, 작가의 손이 지나간 흔적, 재료가 품고 있는 묵직한 밀도가 천천히 시야에 들어옵니다. 단색화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의식에 오래 머물며 긴 여운을 남기는 조용한 힘에 있다고 믿습니다.


남관, ‘파리에서’, 연도 미상, 캔버스에 유채, 45×53cm


작품을 선택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본인만의 기준, 그리고 컬렉션을 공공과 나누는 ‘컬렉터의 책임’에 대해 어떤 철학을 갖고 있나요? 필립 티로 제 컬렉션에 포함된 작가들 대다수는 제가 처음 관심을 가졌던 20~25년 전만 해도 지금처럼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어떤 작가에게 끌리면 그 사람에 대해 집요할 정도로 공부합니다. 그의 생애와 작업 배경은 물론, 가능하다면 작가를 직접 만나 대화하며 그가 지닌 영혼의 온도를 느끼고자 해요. 때로는 작품을 즉시 구입하지 않고 몇 년 동안 그 작가의 변화를 묵묵히 지켜보기도 합니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 세계를 충분히 이해하게 되는 순간, 비로소 어떤 작품이 내 곁에 머물러야 하는지 분명해집니다. 예술 작품은 금고 안에 가둬두기 위해 존재하지 않아요. 작품은 사람들의 눈앞에서 숨 쉬고 대화할 때 가치를 지닙니다. 전시장에서 대중과 만나거나 미술관에 기증하는 일은 컬렉터의 중요한 사명이죠. 작품이 공공의 자리에서 공유될 때 그것은 개인의 소장품에서 나아가 다음 세대의 소중한 기억이자 자산이 되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한국 거장들이 프랑스에서 자신의 길을 발견했다면, 지금의 프랑스는 한국 젊은 예술가들에게 어떤 파트너가 되고자 하나요? 필립 베르투 마크롱 대통령의 국빈 방한과 함께 공식 출범한 한불 예술가 레지던시 프로그램 ‘빌라 한불Villa Hanbul’이 핵심적인 역할을 할 거예요. 이는 작가들이 서로의 문화를 경험하고 오늘의 창작을 지속할 수 있도록 기관과 예술가, 지역사회를 긴밀하게 연결하는 데 의의가 있습니다. 부산에서 시작된 이 여정은 올해 부천의 그래픽아트, 청주의 공예와 메티에 다르métiers d’art 분야로 이어지는데요. 빌라 한불의 작가들은 오는 9월 광주비엔날레 프랑스관을 통해서도 소개될 예정입니다.


6월 4일 개관을 앞둔 퐁피두센터 한화 같은 문화 협력 모델이 양국의 지형에 불러올 변화가 기대됩니다. 필립 베르투 퐁피두센터와 한화의 파트너십은 문화 교류의 방식이 성숙해졌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예요. 입체주의를 다루는 첫 전시부터 4년간 총 8개의 수준 높은 전시가 진행될 계획입니다. 퐁피두센터 한화는 프랑스와 한국의 큐레이터, 연구자 그리고 관객들이 서로 만나 새로운 담론을 형성하는 교류의 장이 될 거예요. 이제 우리의 문화적 연결은 일회성 초청이나 소개를 넘어 공동 기획과 제작, 그리고 지속 가능한 협력 구조의 설립으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서울은 이제 프랑스와 세계가 만나는 또 하나의 동시대적 무대가 되었습니다.


수교 140주년의 축제가 끝난 뒤에도 이 열기가 지속되기 위해 필요한 태도는 무엇일까요? 필립 베르투 가장 중요한 것은 미래를 향해 ‘함께 혁신’하려는 공동의 의지입니다. 여기서 혁신이란 기술적 진보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회와 문화, 그리고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우리가 어떤 가치를 지향할 것인가를 근본적으로 사유하는 방식이죠. 첨단 산업과 에너지 전환 같은 거대 담론부터 비디오게임, 패션, 웹툰 등 동시대의 미학까지 우리는 끊임없이 서사를 교환하고 있어요. 결국 한불 관계를 지탱하는 강한 동력은 낯선 아이디어에 열려 있는 태도, 그리고 젊은 세대의 예술적 실험을 지지하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이번 140주년을 통해 만들어진 이 거대한 흐름은 기념의 해를 지나 앞으로도 양국의 창의적인 영감이 교차하는 영원한 통로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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