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샤넬 하우스의 상징인 브릴리언트 컷 클로즈 세팅 센터 다이아몬드가 숫자의 여백을 채운 ‘N°5’ 네크리스와 ‘N°5’ 이어링 모두 CHANEL FINE JEWELRY.
2017년 <오리엔트 특급 살인>이 개봉했을 때, 나는 극중 사건보다 배우들의 목과 손가락에 더 정신이 팔려 있었다. 배경이 하필 1930년대 중반이었기 때문인데, 대공황 한복판에서도 할리우드와 뉴욕 사교계는 오히려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만큼 주얼리도 화려했을 터. 직업병이 발동해 감독이 어디까지 고증을 했을지 궁금한 마음에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이스탄불발 칼레행 열차 속 12명의 승객 가운데 내 시선은 줄곧 여자들에게 쏠렸다. 특히 주디 덴치Judi Dench가 맡은 러시아 공작부인과 미셸 파이퍼Michelle Pfeiffer가 분한 미국 상류층 여인의 주얼리는 한 컷도 놓치지 않았다.
러시아혁명 이후 프랑스로 망명한 설정의 드라고미로프 공작부인은 맨살이 거의 안 보일 정도로 목걸이를 겹겹이 둘렀고, 귀에는 큼지막한 샹들리에 이어링까지 달았다. 알록달록한 칵테일 링을 손가락마다 끼고 나온 걸 보니, 원작에서 “A Knuckleduster of Rings”라고 쓴 대목을 꼼꼼히 챙긴 모양이다. 찬란했던 제정러시아의 영광을 되살리려는 걸까. 극도로 호화로운 차림이 오히려 애처롭게 느껴질 정도였다. 반면 미셸 파이퍼가 연기한 허버드 부인은 공작부인에 비하면 한결 정돈된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녀 역시 묵직한 골드 브레이슬릿을 겹쳐 착용하고, 강렬한 유색석 목걸이와 커다란 칵테일 링 몇 점을 더했다. 실제로 1930년대 미국 주얼리는 유럽보다 과감했고 부피도 훨씬 컸다.
영화가 클라이맥스에 이르면 주얼리에만 빠져 있던 게 민망해질 만큼 극적인 반전이 터진다. 그래도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 사이, 시대의 격변 속에 몰락한 유럽 왕족과 신흥 강대국 미국 부유층 여인의 주얼리를 나란히 놓고 비교하는 건 이 영화에서 꼭 챙겨볼 만한 감상 포인트다.

영화 <오리엔트 특급 살인Murder on the Orient Express>(2017) 스틸 컷. © 네이버 영화 스틸컷 24
대공황, 가성비를 높여라
1929년 10월, 뉴욕발 대공황이 터졌다. 재즈와 함께 달려온 광란의 1920년대는 그렇게 끝났다. 다시 긴축이다. 그런데도 아르데코 주얼러들은 기죽지 않았다. 오히려 1920년대보다 더 크고 독특한 주얼리를 만들어냈다. 이 시기에 특히 빛을 발한 건 컨버터블 디자인이다. 팔찌가 브로치로, 목걸이가 팔찌로 변신했고 티아라를 분해하면 목걸이와 팔찌가 됐다. 하나를 사면 여러 개처럼 쓸 수 있으니 불경기에 이보다 좋은 가성비가 없었다. 대공황에서 살아남은 주얼러는 까르띠에, 부쉐론, 반클리프 아펠 같은 파리의 전통 메종이었다. 미국에서는 할리우드가 주얼리 시장을 살렸다. 주머니 사정이 팍팍해진 사람들이 영화관으로 몰려들었고, 스크린 속 배우들의 차림은 곧 유행이 되었다. 사람들은 돈이 없어도 저렴한 주얼리로 배우들의 스타일을 따라 했다. 스크린이 곧 쇼윈도였던 셈이다.
미국은 유럽보다 경기회복도 빨랐다. 뉴욕에서는 티파니와 마커스 앤 컴퍼니가 건재를 과시했고, 1932년에는 해리 윈스턴Harry Winston이 자기 이름을 건 회사를 세웠다. 그가 주목한 건 한 세대 전 도금 시대Gilded Age의 주얼리였다. 오래된 주얼리를 매입해 해체하고, 다이아몬드를 재연마한 뒤 현대적으로 세팅해 되팔면서 뉴욕 상류층 사이에 단숨에 이름을 알렸다. 몇 년 후 제2차 세계대전이 터졌을 때도, 전쟁터에서 멀찍이 떨어진 미국은 유럽보다 유리했다. 참전 후에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초강대국이 되었으니, 1940년대부터는 주얼리에서도 독자적 스타일을 만들어나갔다.

1 부채꼴 모양으로 정교하게 조각한 록 크리스털을 따라 다이아몬드를 세팅한 ‘에방타유Éventail’ 브로치. 1935년. SYMBOLIC & CHASE. 2 바게트 컷과 직사각형 컷 다이아몬드를 두 줄로 세팅한 아르데코 스타일의 다이아몬드 네크리스. 1930년. FD GALLERY.
올 화이트 주얼리가 빛나던 순간
디자인의 뼈대는 여전히 1920년대였다. 다만 1920년대가 강한 색채 대비의 시대였다면, 1930년대 초반은 플래티넘에 다이아몬드를 세팅한 ‘올 화이트 룩’이 대세였다. 1932년 가브리엘 샤넬이 발표한 ‘비주 드 디아망Bijoux de Diamants’ 컬렉션이 이 흐름의 정점이었다. 패션 디자이너가 하이 주얼리를 직접 만든 첫 사례이기도 했는데, 다이아몬드만으로 구성한 이 컬렉션은 올 화이트 시대의 미학을 집약한 작품이었다. 원가를 줄이려고 플래티넘 대신 화이트 골드를 쓰는 주얼러들도 있었다. 부드러운 흰색, 관능적인 흰색, 상큼한 흰색···. 같은 흰색도 알고 보면 결이 꽤 다른데, 이 화이트 주얼리가 가장 아름답게 살아난 곳은 흑백영화 속이었다.
하지만 색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루비, 사파이어, 에메랄드는 주얼리 가장자리를 장식하는 악센트 스톤으로 여전히 애용됐다. 다이아몬드에서는 바게트 컷, 에메랄드 컷 등 다양한 커팅으로 변화를 줬다. 1930년대 뉴욕 사교계를 배경으로 올 화이트 주얼리를 감상하고 싶다면 우디 앨런의 영화 <카페 소사이어티>(2016)를 권한다. 샤넬이 파인 주얼리와 의상을 모두 협찬한 작품인데, 크리스틴 스튜어트와 블레이크 라이블리가 착용한 샤넬 다이아몬드가 1930년대 분위기를 그대로 되살렸다. 이때만 해도 몇 년 뒤 제2차 세계대전으로 플래티넘이 사라질 줄은 아무도 몰랐겠지만.

영화 <카페 소사이어티Cafe Society>(2016) 스틸 컷. © 네이버 영화 스틸컷 24
더블 클립 브로치 & 와이드 브레이슬릿
주얼리 전문가에게 1930년대의 가장 세련된 아이템을 고르라면, 십중팔구 다이아몬드 브레이슬릿과 더블 클립 브로치를 꼽을 것이다. 브레이슬릿 폭은 1920년대보다 넓어졌지만, 여러 개를 겹쳐 착용하는 유행은 그대로였다. 올 화이트 다이아몬드 세팅이 주류였고, 루비·사파이어·에메랄드가 포인트로 들어간 스타일도 많았다. 이브닝드레스에는 장갑 위에 팔찌를 착용하기도 했다. 거대한 버클이 달린 입체적인 스트랩 브레이슬릿도 이때 나왔는데, 리본이나 스크롤 문양이 곳곳에 들어갔다.
더블 클립 브로치는 1930년대의 히트작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언제 어디서든 착용할 수 있어 불경기에 구세주 같은 아이템이었다. 똑같은 클립 2개가 한 쌍을 이루는데, 합치면 하나의 브로치가 되고, 떼면 드레스 클립 2개로 쓸 수 있었다. 루이 까르띠에가 1927년 이 메커니즘을 특허로 등록한 것이 시초다. 1930년대 들어 미국의 코스튬 주얼리 브랜드 코로Coro가 ‘듀에트Duette’라는 이름으로 대중화시키면서 폭발적으로 팔렸다. 재킷 라펠·벨트·모자에 꽂았고, 클립 2개를 따로 쓸 때는 드레스 네크라인이나 숄더 스트랩에 대칭으로 고정하는 게 정석이었다. 펜던트나 팔찌로 변신 가능한 제품도 있었고, 2개를 모아 머리 위에 꽂기도 하고 벨트 중앙이나 이브닝 백 가장자리에 달기도 했다. 1935년 이후에는 기하학적 디자인에 조각적 요소를 가미해 입체감을 더했고, 1940년이 가까워지면서 비대칭 형태가 유행하며 부피가 점점 커졌다.
1920년대 주얼리가 길게 늘어지는 형태였다면, 1930년대는 정반대였다. 목걸이는 긴 소투아르 대신 목선에 가까운 스타일이 대세가 됐고, 귀고리도 펜던트 부분이 짧아지는 대신 귓불에 닿는 부분이 커졌다. 장식이 귓불 쪽에 집중되면서 귓불 전체를 덮을 만큼 볼륨감 있는 이어 클립이 등장했으며, 스크롤·나뭇잎·꽃 모티프가 인기를 끌었다. 반지는 더 크고 복잡한 형태로 진화했다. 센터스톤 주변 베젤에는 기하학 형태의 보조석을 빼곡히 세팅했고, 부채나 소용돌이 모티프를 즐겨 사용했다.

18K 옐로 골드와 플래티넘에 총 0.91캐럿의 브릴리언트 컷 라운드 다이아몬드를 수놓은 ‘쟌 슐럼버제 바이 티파니 브이 로프’ 이어 클립 TIFFANY & CO.

삼각형, 마름모 등과 화환 형태로 기하학적 패턴을 구현한 ‘모자이코’ 뱅글 브레이슬릿 BUCCELLATI.
아르데코가 저물다
올 화이트 주얼리가 한창이던 1933년, <보그>에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주얼리 업계에 금 열풍이 다시 불기
시작했다.” 30여 년간 군림해온 플래티넘 시대의 끝이 예고된 셈이다. 당시에는 플래티넘보다 금이 저렴했다(지금은 정반대지만). 1935~1936년 파리의 전통 메종들도 하나둘 옐로 골드로 돌아섰다.
1937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된 주얼리는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평면적인 기하학 패턴 대신 스크롤 장식
에 꽃이며 잎사귀 모티프가 크게 자리를 차지하는 조각적인 디자인이 전면에 나섰다. 주얼러들은 골드의 넓
은 면을 보석 없이 과감하게 비워뒀다. 금속의 광택 자체가 디자인이 된 것이다. 서늘하게 새하얀 플래티넘의
시대가 끝나고, 금빛의 시대가 오고 있었다.

옐로 골드와 핑크 골드, 다이아몬드, 브라운 PVD 소재가 각각 층을 이뤄 레이어드된
‘콰트로 클래식’ 스몰 펜던트와 ‘콰트로 클래식 다이아몬드’ 엑스스몰 링, 스몰 뱅글 모두 BOUCHERON.
WRITER 윤성원 주얼리 히스토리언이자 한양대 공학대학원 보석학과 겸임교수. <나는 금 대신 보석을 산다>, <젬스톤 매혹의 컬러>, <세계를 매혹한 돌> 등을 집필했으며 주얼리의 역사, 보석학 정보 등 모든 분야를 융합적으로 다루고, 나아가 보석업계의 인재 양성에 기여하고 있다.
COOPERATION 부쉐론(080-822-0250), 부첼라티(6905-3490), 샤넬 파인 주얼리(080-805-9628), 티파니(1670-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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