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iary 16 05 26’을 크게 확대한 이미지를 활용한 신세계 라운지 입구.
관객과 작품으로 가득한 프리즈 서울은 볼 것도 많고 들를 곳도 많다. 그만큼 시선도 빠르게 움직인다. 집중하지 않으면 어느새 람과 작품 사이를 떠밀리듯 지나치기 쉽다. 지난 9월 2일부터 5일까지 코엑스에서 열린 프리즈 서울에서 ‘신세계 라운지’는 관객의 발걸음을 잠시 늦추는 공간이었다. 신세계 라운지는 올해부터 5년간 프리즈 서울의 헤드라인 파트너로 참여하는 신세계그룹이 첫 협업 프로젝트로 마련한 곳이다. 이곳에선 프랑스 작가 폴 콕스Paul Cox의 개인전 < L’Immensité du Quotidien: The Monumental Everyday >가 열렸다. 전시 공간 중심에는 4개월 동안 저녁마다 수행해온 명상과 관찰을 구아슈 물감으로 담아낸 ‘Diary’ 연작 336점이 자리했다. ‘Diary’ 336점이 한자리에 모여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라운지에 들어서자 수백 장의 작은 종이가 벽면을 가득 메운 모습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폴 콕스가 4개월간의 명상과 관찰을 구아슈 물감으로 담아낸 ‘Diary’ 연작 336점으로 구성한 신세계 라운지.
336개의 기록이 만든 한 장면
‘Diary’는 같은 크기의 종이에 구아슈로 그린 회화 일기다. 특정 장소를 충실히 재현하기보다 눈에 들어온 인상과 감각을 간결한 선과 색, 면으로 옮겼다. 어떤 화면에서는 선이 촘촘하게 교차하고, 어떤 화면에서는 몇 개의 색이 맞물려 균형을 이룬다. 얼핏 비슷해 보이는 구성도 자세히 보면 선의 간격과 방향, 채도가 조금씩 다르다. 가까이에서 보니 각 그림의 개성이 두드러졌다. 그런데 몇 걸음 물러서자 같은 크기의 작품이 일정한 간격으로 반복되고, 비슷한 선과 색의 구성이 그림마다 조금씩 변주되면서 벽면이 하나의 거대한 패턴으로 다가왔다. 여기에 액자 사이에 둔 여백까지 규칙적으로 이어지며 리듬을 더했다. 개별적인 하루하루가 나란히 놓이면서 4개월의 시간이 벽면에 펼쳐졌다.
폴 콕스는 자신의 하루에 관해 “삶에서 가장 본질적이고 중요한
단위The essential, important unit in one’s life”라고 말하는데,
‘Diary’ 역시 매일 마주한 빛과 색, 주변의 변화를 그려냈다. 그런데
반복된다고 해서 모두 같은 것은 아니다. 동일한 크기와 재료, 제한된 형식은 각 그림의 차이를 선명하게 했다. ‘The Monumental
Everyday’라는 전시 제목처럼 사적인 기록이 한자리에 모이자 보통의 날들이 광활한 풍경이 됐다.

일상의 재구성
파리와 부르고뉴를 기반으로 활동해온 폴 콕스는 회화를 중심으로 발레와 오페라의 무대 및 의상, 연극 포스터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들었다. 흥미로운 점은 매체가 바뀌어도 눈앞의 대상을 그대로 옮기지 않고 형태와 색, 움직임을 새롭게 조합한다는 것. ‘Diary’도 현실에서 출발하지만 특정 장소를 알아보기는 쉽지 않다. 작가의 시선이 머무는 곳도 거창한 사건이 아니라 창으로 스며드는 한 줄기 빛처럼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파편들이다. 사소한 것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특별한 사건을 찾아 나서는 대신 늘 곁에 있는 것을 자세히 바라보는 일. 평범한 순간을 특별하게 부풀리지 않는 태도를 ‘단순함’이라 불러도 좋지 않을까.
작품을 보면서 무엇을 그렸는지 맞히는 일은 점점 중요하지 않게
느껴졌다. 길이나 언덕, 식물을 떠올리게 하는 형태도 한 가지 이
미지로 고정되지 않았다. 몇 개의 선과 색만 남긴 듯한 간결한 화면 또한 눈에 띄었다. 최소한의 요소만 남은 그림에서는 선의 위치와 색면의 크기, 여백이 화면의 인상을 결정했다. 수많은 작품이
동시에 관심을 요구하는 아트페어에서 폴 콕스의 작은 그림은 오히려 조용한 편이었지만, 강한 색이나 압도적인 크기를 앞세우지
않아도 한 장 한 장 천천히 들여다보게 했다.

라운지를 나온 뒤 남은 것
신세계그룹이 첫 헤드라인 파트너십 프로젝트로 ‘일상’을 택한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신세계는 1963년 신세계갤러리를 시작으로 백화점과 리테일 공간에서 미술을 선보여왔다. 이번에는 프리즈 서울 내부에 별도의 라운지를 조성하고, 미술과 공간을 결합해 온 경험을 아트페어 안으로 옮겼다. 라운지 입구에는 ‘Diary 16 05 26’을 크게 확대한 이미지를 활용했는데, 작은 크기의 회화 한 점이 벽면을 뒤덮을 만큼 커지면서 한 점의 일상 기록이 전혀 다른 규모로 변하는 모습을 예고하는 듯했다.
신세계 라운지를 나온 뒤에는 특정한 한 점보다 336점이 한 벽을 채운 모습이 먼저 떠올랐다. 폴 콕스가 묘사한 것은 특별한 사건 이 아니라 매일 지나치는 하루였다. 하루하루 그린 그림이 수백 장 모이면서 개인의 시간은 한눈에 담기 어려울 만큼 큰 장면으로 바뀌었다. 수많은 작품이 쉴 새 없이 등장했던 프리즈 서울에서 폴 콕스의 ‘Diary’가 유독 기억에 남은 이유는 어쩌면 바로 그 ‘단순함’ 때문일지도 모른다.

"제가 바라는 건 그저 어떤 의식의 경지에 닿는 것. 머릿속을 떠돌던 모든 생각이 사라지는 그런 마음의 상태예요. 그리고 제 손이 스스로 노래하기 시작할 때까지 그 순간에 온전히 머무르는 거죠."
폴 콕스 파리와 부르고뉴를 오가며 활동하는 프랑스 작가. 회화를 중심으로 그래픽 디자인과 일러스트레이션 등 다양한 영역을 넘나든다. 발레·오페라 무대 및 의상 디자인, 연극 포스터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독자적인 조형 세계를 구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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