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IO BOTTA 빛을 짓는 신실한 석공

마리오 보타는 스위스 티치노의 풍경과 오래된 기억을 바탕으로, 돌과 벽돌의 육중한 물성 속에 빛의 질서를 새겨온 건축가다. 인간의 몸을 신뢰하며 삶을 보호하는 공간을 세우는 일, 그것이 반세기 넘게 이어온 그의 건축 세계다.

EDITOR 박이현 WRITER 임나리

‘산 조반니 바티스타 성당’ 내부 모습. Photo: Mario Botta Architetti


마리오 보타 돌과 벽돌을 비롯한 조적 재료의 물성, 원·사각·원 통 등 명료한 기하학, 천창을 통해 유입되는 빛의 대비로 독자적 인 건축 세계를 구축한 스위스 건축가. 1943년 티치노주 멘드 리시오에서 태어나 베네치아 IUAV 건축대학에서 공부했으며, 1970년 루가노에 건축사무소를 열었다. 카사 로톤다, 산 조반니 바티스타 성당,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와타리움 미술관, 리 움미술관, 교보타워, 남양성모성지 대성당 등을 설계했다.


마리오 보타는 1943년 스위스 남쪽 티치노주의 작은 도시 멘드리시오에서 태어났다. 행정구역은 분명 스위스지만 언어와 정서, 햇빛은 이탈리아 쪽으로 기울어진 경계 지역이다. 이탈리아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는 티치노에서 나고 자란 그는 정규 교육과정을 그대로 따르지 않았다. 15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루가노의 건축사무소에 제도공으로 들어간 보타는 16세에 벌써 자신의 첫 주택을 설계했고, 18세에는 고향에서 사제관을 지었다. 책상이 아니라 현장에서 건축을 먼저 익힌 셈이다. 이후 건축에 대한 열망으로 밀라노 미술학교를 거쳐 베니스 건축대학에 진학했는데, 그는 이곳에서 20세기 모더니즘 건축의 세 거장을 차례로 만났다. 바로 그의 지도교수였던 카를로 스카르파와 당시 베니스에서 진행 중인 프로젝트로 근처에 머물던 르코르뷔지에와 루이스 칸이다. 마리오 보타는 르코르뷔지에와 루이스 칸의 프로젝트에 조수로 참여했다. 그는 카를로 스카르파로부터 벽돌, 대리석, 콘크리트를 조각하는 감각을, 르코르뷔지에로부터 기하학적 볼륨이 자아내는 유희를, 루이스 칸으로부터 공간에서 빛과 그림자를 찾아내는 방법을 배웠다. 학위를 마친 1970년 보타는 고향에서 가까운 도시 루가노로 돌아와 건축사무소를 열었다. 그 후 2011년 보타는 진정한 고향인 작은 마을 멘드리시오로 다시 사무실을 옮겼으니, 50년 넘게 자신의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활동해온 것이다.

마리오 보타는 인간에게 근원적으로 더 익숙한 재료들을 탐구해왔다. 그에게 유리와 철 같은 20세기 현대건축을 상징하는 재료는 관심 밖이었다. 스위스와 이탈리아 국경에 인접한 그의 고향 지역은 유럽 각지에서 활약한 석공을 중세부터 배출해온 곳이다. 돌을 다루는 숱한 방법에 정통했던 마리오 보타를 두고 어떤 이는 ‘석공’에 비유하기도 한다. “집을 짓는 데 달 착륙 기술이 필요한 건 아닙니다”라는 그의 유명한 말에는 신소재와 신기술이 아무리 넘쳐나도 집이라는 인간을 보호하는 원초적 형태에는 지난 수 세기 동안 이어진 방식이 크게 달라질 이유가 없다는 믿음이 담겨 있다. 지금 인간의 몸과 과거 인간의 몸이 다르지 않기 때문. 두꺼운 벽, 높은 천장, 작은 창을 가진 이탈리아와 스위스 전통 가옥에서 며칠 지내본 사람은 이런 집이 얼마나 큰 정서적 안정감을 주는지 알 수 있을 테다. 그는 미래가 아닌 과거와의 대화를 통해 건축을 다지고 세공한다. 이는 기술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시간에 대한 신뢰다. 보타는 땅의 중력과 자연의 형태에 기꺼이 순응하는 동시에 인간의 성실함이 깃든 건축을 짓는다.



마리오 보타 건축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카사 로톤다’.


마리오 보타 건축의 원형, 카사 로톤다
1970년 루가노에 작은 건축사무소를 연 스물일곱 살의 보타에게 처음 주어진 일은 스위스 티치노 마을의 저예산 단독주택들을 짓는 것이었다. 그는 이 시절 그의 건축사무소는 하나의 ‘실험실’이었다고 회고한다. 원·삼각형·원통 등의 기하학, 지상층 정원, 천창 등 훗날 그가 종교 건축과 미술관을 설계할 때 사용한 건축 어휘들이 이 시기부터 차곡차곡 쌓여갔다. 시멘트 블록 벽을 커다란 원 형태로 도려내 하늘과 산을 액자식 풍경처럼 활용한 ‘카사 카차Casa Caccia’부터 호수를 내려다보는 급경사면에 콘크리트 타워를 세우고 철골 다리를 통해 집의 꼭대기부터 진입하게 한 ‘카사 비안키Casa Bianchi’까지, 그의 건축 어휘는 추상적 기교가 아닌 험난한 땅 위에서 건축을 통해 자신의 입지를 구축하는 대담한 제스처였다. 그중의 절정은 1982년 완공된 ‘카사 로톤다Casa Rotunda’다.

“왜 집은 사각형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카사 로톤다는 두 가지 건축적 결단이 돋보인다. 하나는 배치다. 정면이 존재하지 않는 원통 구조의 건물을 필지의 경계 쪽이 아닌 대각선 방향으로 얹어 훗날 이웃 집들이 들어서도 입면이 서로 마주 보지 않도록 미래의 관계까지 배려했다. 다른 하나는 절개다. 요새처럼 완전히 닫힌 벽돌 원통형에 세로로 가른 틈을 만들었는데, 이 틈은 계단 같은 수직 동선, 안팎을 잇는 진입로, 하늘과 소통하는 채광창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며 자칫 폐쇄적일 수 있는 덩어리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카사 로톤다의 미학은 사진가 가브리엘레 바실리코와 함께한 동명의 사진집 <카사 로톤다> 출간으로 이어졌다. 보타는 화제를 모은 이 책을 발판 삼아 1986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이 전시는 스위스 지방의 한 무명 건축가를 세계 무대의 중심으로 호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20년 가까이 주택이라는 밀도 높은 단위에서 조련한 기하학 그리고 대지와의 대화는 1990년대 이후 마리오 보타가 지은 대형 프로젝트들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산 조반니 바티스타 성당’을 구상하며 그린 연필 스케치.


종교 건축 여정의 시작, 산 조반니 바티스타 성당
1986년 4월 25일 티치노 산악 지대의 작은 마을 모뇨에 눈사태가 덮쳤다. 17세기 지어진 마을 성당 ‘산 조반니 바티스타San Giovanni Battista’는 그 자리에서 형체도 없이 무너졌다. 잔해 속에서 건질 수 있는 것은 1746년 제작한 종 2개뿐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재건 위원회를 꾸렸고, 재건 프로젝트는 곧 티치노 출신 건축가 마리오 보타에게 맡겨졌다. 보타는 옛 성당을 복원하는 대신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성당을 짓기로 했다. 보타는 타원형 평면 위에 인근 계곡에서 캐낸 흰 대리석과 리베오 채석장의 짙은 편마암을 번갈아 쌓아 올렸다. 바로 보타를 상징하는 ‘지브러 벽’이다. 색감과 질감이 다른 돌을 수평으로 번갈아 쌓은 이 얼룩말 무늬 벽은 그의 작업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지브러 벽은 티치노를 여행하다 보면 역사적 건물 입면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데, 이 무늬 자체가 보타에게는 티치노 풍경 중 일부였다고 할 수 있다.

산 조반니 바티스타 성당은 원통형 구조를 사선으로 자른 단면 위에 원형 유리 천창을 덮은 대담한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좌석은 소박한 마을 규모에 맞춰 15개뿐이다. 실내를 가로지르는 완만한 경사의 아치는 눈사태 당시 실제로 무너지지 않고 마을 일부를 지켜낸 옛 성당의 아치를 기리는 상징물이다. 성당은 발표 당시 적잖은 논란을 일으켰다. 전통적인 알프스 마을 풍경 속에 솟아오른 낯설고 현대적인 원통형 건물을 두고 지역 주민 사이에서 의견이 갈렸다. 하지만 보타는 자연의 파괴적인 힘 앞에서 “인간이 애써온 수고를 긍정하는 건축”이라고 답했다. 이 성당은 이후 프랑스 에브리 대성당, 텔아비브 심발리스타 유대교 회당과 더불어 마리오 보타의 종교 건축을 대표하는 작업이 됐다.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내부 모습.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전경. Photo: Mario Botta Architetti


형태가 시각 정체성이 된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1988년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SFMOMA)은 새로운 전용 건물을 짓기로 결정했다. 1935년 창립한 이래 다른 건물의 일부를 빌려 사용하던 미술관에 이것은 그들의 정체성을 세우는 중차대한 일이었다. 미술관 측은 프랭크 게리, 안도 다다오 등 유명 건축가를 대상으로 지명 설계 공모를 진행했고, 최종적으로 유럽에서는 명성을 쌓았지만 미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마리오 보타가 선정됐다. 그의 나이 45세 때였다. 이 프로젝트는 보타에게도 낯선 도전이었다. 유럽 곳곳에서 작업을 해왔지만, 미국 땅에 건물을 짓는 건 처음이었다. 그는 이 작업의 목표를 “상징적인 힘을 가진 랜드마크를 만드는 것”이라고 밝혔다. “건축가가 도시에 건물을 짓고자 하는 열망은 예술가가 미술관에 자신의 작품을 전시하고자 하는 열망과 같다”고 솔직하게 고백하기도 했다. 미국에서 뉴욕 다음으로 큰 규모를 자랑하는 현대미술관이기에 욕심이 났으리라.

미술관 정문에서 들어서면 시선은 곧장 건축물 한가운데로 이어지는데, 그 끝에는 검은 돌과 흰 돌을 번갈아 쌓은 지브러 무늬의 원형 탑이 있다. 탑 꼭대기는 사선으로 잘린 형태에 유리로 마감한 거대한 오큘러스(라틴어로 ‘눈’을 뜻하며, 천장에 뚫린 원형 채광창을 가리키는 건축 용어)를 이루고, 관람객은 그 아래 놓인 계단을 오르며 오큘러스를 향해 나아가는 구조다. 벽돌로 둘러싸여 밖에서는 폐쇄적으로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서면 오큘러스를 통해 쏟아지는 빛으로 가득하다. 1995년 미술관 개관 60주년에 맞춰 문을 연 이 건축물은 평가가 극명하게 나뉘었다. 그럼에도 이 건물의 기하학적이고 견고한 인상과 줄무늬 패턴은 하나의 시각적 장치가 되어 미술관 로고는 물론 초청장과 문구류 등 각종 커뮤니케이션 디자인 전반에 영감을 주었다. 보타의 바람대로 건물 자체가 하나의 아이덴티티가 된 것. 이 프로젝트는 그를 세계적 건축가의 반열에 올려놓는 전환점이 됐다.



‘남양성모성지 대성당’. 사진 제공: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문화예술위원회


한국이 사랑한 서양 건축가, 교보타워에서 남양성모성지 대성당까지

마리오 보타와 한국의 인연은 1989년, 교보생명 신용호 회장이 오랜 노력 끝에 그를 한국으로 초청하면서 시작됐다. 목적은 교보 사옥의 설계였다. 1991년 시작된 서초동 사옥(오늘의 교보타워) 건설은 1994년까지 여전히 도면만 붙들고 있을 만큼 더디게 나아갔다. 세계적 거장의 설계도 열일곱 번이나 퇴짜를 놓을 만큼 신 회장의 안목은 까다로웠다. 그렇게 거듭된 수정 끝에 1999년에야 착공에 들어갔고, 2003년 완공까지 꼬박 14년이 걸렸다. 유리로 둘러싼 가벼운 고층 건물이 익숙하던 시절의 서울에 뉴욕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 같은 독보적 랜드마크를 원했던 신용호 회장에게 벽돌이 주는 단단한 무게감은 정확히 필요한 응답처럼 보였을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마리오 보타는 2004년 장 누벨, 렘 콜하스와 함께 리움미술관 건축에 참여하면서 테라코타 벽돌로 한국 도자기의 아름다움을 형상화하며 그의 원형 로톤다 어휘를 서울에도 새겨 넣었다. 이후로도 남양성모성지 대성당, 매향리 평화기념관, 전남 신안의 인피니또뮤지움으로 한국과의 인연을 이어 나간 마리오 보타. 그는 서양 건축가 중 국내에서 가장 많은 작품을 남긴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교보로 시작한 한국과의 인연은 20여 년 뒤, 전혀 다른 성격의 프로젝트로 이어졌다. 2011년, 경기도 화성 남양성모성지의 이상각 신부가 보타에게 성당 설계를 청한 것. 이상각 신부는 해외 건축 답사 중 보타의 작업을 보고 확신을 얻었다고 한다.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공식 절차를 건너뛴 채 저돌적으로 보타에게 연락을 취하고 만남까지 성사시킨 이상각 신부. 병인박해 순교지인 이 땅에 평화통일을 기원하는 대성당을 세우겠다는 진정성 있는 그의 메시지에 보타는 즉석에서 흔쾌히 승낙했다. 신부가 청한 조건은 세 가지였다. “빛으로 충만한 교회, 소리가 좋은 교회,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한 친환경 냉난방 구조.” 이후 3년간 13차례 설계를 고쳐나갔고, 예산 문제로 3000석에서 1200석으로 규모를 줄여야 했을 때도 보타는 이를 흔쾌히 반겼다. 9년에 걸친 공사 끝에 2023년 남양성모성지 대성당은 완공되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일화는 설계비다. 보타는 “천국에 갈 수 있도록 기도해달라”는 말과 함께 실비 수준만 받았다. 그는 이 작업에 임한 마음가짐을 이렇게 설명했다. “물질적인 것을 넘어 인간의 영적인 요구에 부응하는 건물을 짓고 싶다.” 이 같은 헌신은 곧 다른 이들을 불러왔다. 보타의 소개로 합류한 ‘20세기의 미켈란젤로’ 줄리아노 반지는 90대의 나이에 재료비만 받고 십자고상과 성모상, 제대 조각을 완성했다. 눈을 감은 전통적 예수상 대신 눈을 뜨고 정면을 응시하는, 죽음이 아닌 삶을 상징하는 형상이었다. 남루한 현대 노동자의 모습으로 그려진 ‘최후의 만찬’ 성화에는 마리오 보타와 한국의 파트너 건축가 한만원, 이 작업을 성사시킨 이상각 신부의 얼굴이 들어 있다. ‘수태고지’ 속 여성들은 한복을 입은 모습. 세계적 거장들의 한국을 존중하는 태도가 인상 깊다. 이상각 신부는 보타와 함께 페터 춤토르에게도 건축을 의뢰했고, 승효상, 정영선 등 한국 건축과 조경계 인사들도 힘을 보탰다.

평생 종교 건축만 하고 싶다는 마리오 보타의 꿈은 결국 한국에서도 기적처럼 실현됐다. 교보타워가 자본과 근성의 산물이라면, 남양성모성지 대성당은 신념과 헌신의 산물이다. 그러나 둘을 관통하는 것은 같은 재료다. 티치노에서부터 다뤄온 돌, 그리고 모뇨의 성당과 카사 로톤다에서 반세기 가까이 다듬어온 빛의 방식이다. 기도하듯 벽돌을 하나씩 쌓아 올려 공간이 빛을 품게 만드는 일. 반세기 넘게 마리오 보타가 해온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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