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름이 오면 한국인은 본능처럼 면을 찾는다. 살얼음이 동동 뜬 냉면, 고소한 콩국물에 잠겨 있는 소면, 들기름을 두르고 김 한 줌 올린 메밀면. 하지만 놀랍게도 냉면은 원래 겨울 별미였다. 조선 후기 세시풍속지 <동국세시기>(1849)는 냉면을 음력 11월의 시절 음식으로 기록한다. 뜨겁게 달군 온돌방 안에서 이가 시리도록 찬 메밀면을 먹는 것, 이는 찬 것으로 추위를 다스린다는 역설적 행위였다. 냉면이 여름 음식이 된 건 여름에도 얼음을 만드는 기술이 생기고 나서의 일이다. 그렇다고 그 전에 여름 국수의 전통이 없었던 건 아니다. 같은 책에 여름 시절 음식으로 골동면이 등장한다. 메밀국수에 잡채·배·밤·소고기·돼지고기를 넣고 참기름과 간장으로 버무려 궁중 연회에 올리던 비빔국수다. 지금 우리가 아는 빨갛고 매콤한 비빔국수로 바뀐 건 설탕이 흔해진 1960년대 이후의 일이다.

‘솔밤’을 이끄는 엄태준 셰프.
“국수는 단순해 보이지만, 사실 가장 숨길 게 없는 음식이에요.
재료마다 다른 방식으로 식감을 구현해내는데,
그게 단순한 취향이 아니라 하나의 미학처럼 자리 잡혀 있죠.”
솔밤 엄태준 셰프

솔밤을 오픈한 이래 지금까지 손님들에게 원하는 수종의 젓가락을 선물로 주는 문화를 이어오고 있다.
우리 모두의 국수
국수의 역사는 더 거슬러 올라간다. 1123년 고려를 방문한 송나라 사신은 “열 가지 넘는 음식 중 국수 맛이 으뜸”이라 적으면서도, 밀이 귀해 결혼식 같은 큰 행사가 아니면 먹지 못한다고 덧붙였다. 맛은 최고였지만 평소엔 구경도 못하는 음식, 그게 고려의 국수였다. 조선시대까지도 국수의 주재료는 메밀이었다. 밀보다 척박한 땅에서 잘 자라고, 북쪽 산간지대에서 특히 풍부했다. 메밀에는 글루텐이 없어 반죽을 잡아 늘리기 어렵기 때문에 선조들은 틀에 반죽을 넣고 눌러 면을 뽑아내면서 끓는 물에 바로 삶는 방식을 발전시켰다. 쫄깃하게 늘어나지 않고 뚝뚝 끊기는, 메밀 특유의 거칠고 서늘한 식감이 여기서 나왔다. 냉면, 막국수, 온면이 모두 이 기술의 산물이다.
밀가루 국수가 일상 음식이 된 건 뜻밖의 계기에서였다. 한국전쟁 이후 미국의 원조 밀가루가 쏟아지면서 혼례와 제사 때나 먹던 귀한 음식이 순식간에 모두의 식탁에 올라온 것이다. 냉면은 고향을 잃은 실향민들이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전국으로 퍼졌고, 평양식·함흥식이라는 이름도 이 시기에 굳어졌다. 콩국수는 1960~1970년대 혼분식 장려 운동과 맞물려 대중화됐다. 국수는 그렇게 귀함에서 흔함으로, 의례에서 일상으로 내려왔다. 그렇다고 국수가 품은 의미까지 내려온 건 아니었다. 한국에서 결혼을 앞둔 사람에게 건네는 인사가 있다. “언제 국수 먹여줄 거냐.” 고려 때부터 성례에서만 제공하던 귀한 음식이었으니, 국수 한 그릇을 대접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경사를 알리는 일이었다. 길고 가늘게 이어진 면발은 장수를, 그리고 끊기지 않는 인연을 상징했다. 흔해진 뒤에도 그 뜻은 살아남았다. 지금은 어느 마트에서나 쉽게 살 수 있는 국수 한 봉지에 천 년 가깝게 이어온 의미가 여전히 담겨 있다.

주꾸미와 참나물, 그리고 등겨장을 활용한 비빔면.

갤러리를 좋아하는 엄태준 셰프의 취향에 맞춰 미술관 콘셉트를 반영한 레스토랑 전경. 플레이팅된 음식이 미술관의 작품처럼 보일 수 있게 화이트 톤 테이블을 배치했다.
젓가락 끝의 철학
‘솔밤Solbam’은 엄태준 셰프가 어린 시절 걸어 다니던 안동의 소나무 숲에서 딴 이름이다. CIA와 뉴욕의 ‘일레븐 매디슨 파크’, 서울의 ‘임프레션’을 거친 그가 2021년 자신의 이름을 건 첫 레스토랑을 열 때 붙인 이름. 역설적으로 한식의 바깥을 깊이 들여다보면서 오히려 한식이 가진 것들이 더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고 그는 말한다. 오픈 11개월 만에 미쉐린 1스타를 받은 솔밤은 이후 아시아 50 베스트 레스토랑에도 꾸준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 외형에는 굳이 제한을 두지 않되 맛의 조합만큼은 한식의 근본을 따른다는 것이 그의 원칙이다. “새롭게 보이더라도 맛의 뿌리만큼은 한식의 본질에 닿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솔밤의 식사 코스에는 늘 국수가 오른다. 그리고 자리를 떠나는 손님에게는 젓가락을 선물로 건넨다. 로즈우드와 흑단, 유창목 등 수종마다 고유한 색과 결을 지닌 젓가락이다. 젓가락을 사용할 때마다 솔밤이 생각났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시작한 제스처이기도 하지만, 계절마다 다른 식재료와 국수를 연결하는 작업이 솔밤의 언어가 된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국수는 단순해 보이지만, 사실 가장 숨길 게 없는 음식이에요.” 그가 국수에서 가장 먼저 보는 건 면이 입안에서 씹힐 때의 치감 齒感이다. 향이나 육수의 농도는 조절이 가능하지만, 면의 질감은 재료 선택부터 숙성, 삶는 시간까지 모든 과정이 맞아야 원하는 결과가 나온다. 한국 국수 문화에서 그가 주목하는 것도 이 지점이다. 냉면의 탄력, 칼국수의 결, 잔치국수의 부드러운 넘김 등 재료와 온도, 국물에 따라 전혀 다른 경험이 되지만 그 다양성 안에 ‘씹히는 쾌감’이라는 공통의 기준이 흐른다는 것. “재료마다 다른 방식으로 식감을 구현해내는데, 그게 단순한 취향이 아니라 하나의 미학처럼 자리 잡혀 있죠.”
솔밤의 요리는 늘 계절이 먼저, 형식은 그다음이다. 겨울에는 뿌리채소의 흙내음을 살려 차돌박이와 소면을 잇고, 가을에는 송이버섯 향을 양지 국물에 담아 면과 연결한다. 여름에는 차가운 국물과 뜨거운 공기 사이의 대비를 어떻게 담을지를 먼저 생각한다. 자연에서 오는 향과 질감이 국수라는 그릇 안에서 계절을 이야기하도록 하는 것, 그게 솔밤식 면 요리의 방향이다. 이번 촬영을 위해 선보인 두 그릇에서도 여름의 향기가 물씬 풍긴다. 주꾸미와 참나물, 등겨장을 활용한 비빔면이 그 하나다. 등겨장은 보리 속겨를 볶아 보리밥과 섞어 발효시킨 전통 장류로 간장이나 된장보다 구수하고 투박하고도 깊이 있는 맛을 지닌다. 그 발효 향이 주꾸미의 탄력 있는 식감, 참나물의 싱그러운 향과 어우러지며 계절의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중면을 사용하고 들기름과 참나물 오일로 마무리해 쫄깃함과 산뜻하고 고소한 향이 오래 이어진다. 다른 하나는 돼지냉면. 돼지 전지를 코리앤더, 주니퍼 베리 등의 스파이스와 함께 오래 끓여낸 육수를 사용했다. 감태를 섞어 뽑은 면을 사용하는데, 해초류의 감칠맛이 육수의 깊이와 만나 맛이 배가되고, 미나리 오일이 그 위에 향의 층을 더한다.
엄태준 셰프는 지금까지 먹었던 국수 중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한 그릇으로 어린 시절 할머니의 손칼국수를 꼽는다. 직접 반죽하고 칼로 썰어낸 면, 하나하나 올려주신 고명들. 요리를 업으로 삼고 나서야 그게 처음으로 음식 속에서 사람의 마음을 느낀 순간이었다는 걸 알았다. 솔밤이 만들고 싶은 것도 결국 그것이다. 기억에 남는 요리가 아니라, 기억에 남는 감정. 솔밤의 국수는 그렇게 계절과 기억 사이 어딘가에 있다.

돼지 전지를 다양한 스파이스와 함께 오래 끓여낸 육수로 만든 돼지냉면.
COOPERATION 솔밤(070-4405-77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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