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보경, ‘밤의 잔상’, 2026
서민정, ‘감추어둔 한 줌의 땅’(4피스) 중 2피스, 2025
김보경 작가님은 ‘사라진 순간’을 붙잡고, 서민정 작가님은 ‘부서지고 재구축되는 힘’을 따라갑니다. 서로 다른 궤도를 그려온 두 사람의 작업이 어느 순간 같은 밤하늘 아래 놓인 듯 보이는데요. 처음 서로의 세계에서 무엇이 겹쳐 보였나요? 서민정 처음에는 서로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어요. 저는 점과 획이 파편처럼 쌓이는 작업에서 점차 면 面 중심의 화면으로 옮겨가고 있었고, 김보경 작가님은 정돈된 이미지의 구조를 조금씩 흐트러뜨리며 손의 속도와 호흡이 드러나는 쪽으로 가고 있었거든요. 각자의 길을 걷다가 어느 지점에서 마주친 기분이었달까요. 이후 이야기를 나눠보니 작업 밑바닥에 깔린 정서도 닮았더라고요. 개인적인 경험은 한 겹 걸러내고, 몸에 남은 감정의 결이나 말로 다 풀어내기 어려운 여운을 각자의 방식으로 드러낸다는 부분에서요.
김보경 저도 비슷한 인상을 받았어요. 서민정 작가님은 서로 다른 힘이 부딪히고 흩어진 뒤 다시 관계를 맺는 과정에 관심이 있고, 저는 지나간 순간을 붙잡기 위해 기억 속 이미지를 다시 엮어내는 방식을 택하죠. 방식은 다르지만, 둘 다 지금 눈앞에 없는 것을 다시 감각 가능한 자리로 불러온다는 대목에서 서로 통한다고 느꼈습니다.
김보경 작가님은 색을 정교하게 붙잡던 시기를 지나, 지금은 흑백의 농담으로 화면을 구축하고 있어요. 김보경 한때는 완벽한 이미지를 구현하고 싶었어요. 멋있는 잡지의 한 장면을 보면, 그 색을 그대로 재현해내고자 물감 그램 수까지 재면서 맞췄을 정도예요. 그런데 어느 날 안경을 꼈는데, 제가 보던 색이 달리 보이는 거예요. 내가 예쁘다고 여기던 하늘색도 누군가에게는 전혀 다르게 보일 수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색을 붙잡고자 했던 마음이 조금 깨진 때였죠. 그후 제가 기대하던 색이나 형태를 하나씩 걷어낸 과정이 있었어요. 그때 선택한 재료가 목탄입니다. 목탄은 직접적이에요. 손으로 문지르고, 번지고, 가루가 흘러내리면 다시 문지르고···. 예전과 달리 캔버스에 훨씬 가까이 다가가서 작업하게 됐어요.
김보경 작가님의 화면에선 부산과 인천, 바다와 불, 빛과 어둠 등 멀리 떨어진 존재들이 맞물립니다. 김보경 저는 하나의 장면을 그대로 옮기기보다 제 안에 남아 있는 여러 기억을 새로 엮는 편이에요. 부산에서 자랐고 현재 인천에 살고 있는데, 송도를 걸으면 동백섬이 떠오르고 인천대교를 보면 광안대교가 함께 떠오를 때가 있어요. 부평지하상가에서 서면이 스치기도 하고요. 그래서 두 도시 사이에 생기는 감각을 붙잡습니다. 바다와 불도 비슷해요. 할아버지를 해양장으로 보내드릴 때 바다 위로 흩어지던 하얀 가루와 빛이 여전히 눈에 선합니다. 그러나 그때 풍경이 슬픔으로만 남진 않았어요. 생일 케이크의 초, 불꽃놀이, 무인도에서 피운 불 등 전혀 다른 기억들이 함께 떠오르거든요. 이별의 불과 살아가기 위한 불이 결국 제 안에선 이어져 있었어요.

서민정 고려대학교 미술학부 동양화과를 졸업한 뒤 <메아리>(2026), <새벽의 왕>(2025) 등 개인전을 열었다. 세계를 끊임없이 부서지고 재구축되는 에너지의 순환으로 바라보며, 장지 위에 겹겹이 쌓은 붓질과 분채로 그 진동의 순간을 붙잡는다.
서민정 작가님 작업의 핵심은 ‘이동’입니다. 그런데 실제 작품 앞에 서면, 이동은 단순한 장소의 변화를 넘어서는 의미로 다가오더군요. 서민정 제게 이동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가는 물리적 변화와는 거리가 멀어요. 감정이나 상태, 의미가 흔들리고 움직이는 일까지 포함합니다. 어떤 목적지가 있는 것 같지만, 온전히 도착하지 못하고 근처를 맴도는 것 같아요. 다가섰다가도 다시 밀려나고, 또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게 되죠. 작업도 그렇습니다. 하나의 형식을 오래 밀고 가는 대신, 그 안에서 끊임없이 변주하게 돼요. 어떤 것은 부서지고, 어떤 것은 다시 형태를 얻고, 또 어떤 것은 끝내 모호한 상태로 남습니다. 저는 그 과정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움직인다는 것은 불안정한 일이지만, 동시에 멈추지 않는 일이기도 하니까요.
서민정 작가님 역시 강렬한 붉은색으로 분출되던 캔버스가 낮은 채도의 새벽빛으로 옮겨왔어요. 서민정 주변 사람들과의 이별이 영향을 준 건 분명해요. 다만 그 경험 자체를 작업의 주제로 삼은 것은 아니고, 제 안에서 색과 리듬, 재료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 계기였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예전의 붉은색은 밖으로 뿜어져 나오려는 에너지였어요. 외침 같기도 하고, 경고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불안 같기도 했죠. 그런데 언젠가부터 화면의 온도가 낮아졌습니다. 신기하게도 제가 겪은 이별들은 새벽과 많이 겹쳐 있었어요. 누군가는 새벽에 떠났고, 저는 그 새벽에 가장 활발히 작업했어요. 한쪽에서는 생을 다할 때 다른 한쪽에서는 부지런히 움직인 시간이었던 셈이죠. 그래서 새벽은 제게 어둠과 희미한 빛이 공존하는 시간이에요. 차갑고 낮은 때이지만, 오래 바라보면 그 안에서 조금씩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작가님 그림에는 어둠을 품은 빛이 있잖아요. 서민정 어두운 바탕을 먼저 깔고, 그 위에 분채를 차근차근 올립니다. 분채를 올리면 밑색이 은은하게 비쳐요. 밝은 색과 아래의 어두운 색이 겹치면서 화면은 어슴푸레 밝아집니다. 그게 핵심이었어요. 아예 어둡지도, 아예 밝지도 않은 상태. 저는 그런 중간의 시간을 좋아합니다. 붉은 그림을 그릴 때도 사실 붉은색만으로 화면을 구성한 것은 아니었어요. 붉음을 더 붉게 보이게 하기 위해 다른 색들이 필요했죠. 결국 하나의 감각은 혼자 존재하지 않는 듯해요. 서로 다른 것들이 같이 있을 때 더 분명해지는 찰나가 있습니다.

김보경 지나간 순간의 감각을 기억의 조각들로 재구성해, 목탄과 흑백의 농담으로 화면 위에 되불러오는 작업을 한다. 국민대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하고 동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풍경설계>(2025), <우연적 질서>(2024) 등의 개인전을 개최했다.
두 분의 작업에는 끝내 미완으로 남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 흔들림을 매듭짓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김보경 저는 기억이라는 게 원래 그렇게 정리되지 않는 것 같아요. 어떤 장면을 하나의 상자에 넣었다고 생각해도, 시간이 지나면 다른 조각이 같이 떠오르고 그 조각 때문에 처음의 기억도 달라집니다. 정리를 할수록 오히려 카테고리가 늘어나요. 그래서 제 작업은 하나의 이미지를 확정하는 일이라기보다, 기억이 거듭 다른 모양으로 놓이는 자리를 만들어가는 여정 같아요.
서민정 저도 안정된 결론에는 마음이 덜 가고, 그 사이에서 오가는 힘에 끌려요. 세계는 부서지고 다시 세워지는 일을 반복해요. 흔들리는 상태 안에는 다른 방향으로 가보려는 힘도 있고, 아주 약하지만 놓치고 싶지 않은 낙관도 있습니다.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은 여백 덕분에 오히려 계속 움직일 수 있는 것 같아요.
상실이나 불안에서 출발한 장면들이지만, 두 분의 작업은 그 감정 안에만 머물지는 않는 듯해요. 관객이 <두 개의 달> 전시에서 어떤 시간을 지나가길 바라나요? 서민정 저는 관객이 어떤 결론을 얻는 데서 더 나아가, 서로 다른 감정이 한 화면 안에 같이 있을 수 있다는 감각을 느끼면 좋겠습니다. 어둠 속에 작은 틈이 있고, 불안 속에 미세한 움직임이 있는 상태요. 제 작업이 그런 중간의 시간을 조금 오래 바라보게 했으면 합니다.
김보경 저 또한 지나간 순간이 슬픔 너머의 다른 형태로 다시 떠오를 수 있다는 인상이 남으면 좋겠어요. 바다 위의 빛이나 목탄의 흔적처럼 금방 흩어지는 것들도 언젠가 다시 보이죠. 그런 장면을 관람객 각자의 기억 안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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