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 2026년 6월호

춤을 멈춘 뒤에야 보이는 것들

유재성의 춤은 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몸 안에 남은 떨림과 온기, 전통의 오래된 호흡을 조용히 끌어올려 침묵에 형태를 부여한다.

EDITOR 박이현 PHOTOGRAPHER 박재영

유재성 무용가이자 안무가. 2015년 서울시무용 단에 입단해 현재 수석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무용을 바탕으로 내면의 감정과 감각을 몸 의 질감으로 옮기는 안무를 탐구하며, 자신을 드 러내는 움직임의 가능성을 꾸준히 확장해왔다.


무용가라는 존재의 현현
유재성에게 춤은 운명처럼 다가왔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 지역 발표회에서 무용하는 남자를 본 순간 ‘내가 하고 싶은 건 춤’이라는 예감이 스쳤다. 아니, 확신에 가까웠다. 이후 마주한, 어머니의 스카프를 들고 살풀이 천을 뿌리는 듯한 몸짓을 남긴 두세 살 무렵의 사진들은 그가 춤출 운명임을 예언이라도 한 것만 같았다. 시간이 흘러 2015년 서울시무용단에 입단해 수석단원에 이르기까지 지난 10여 년은 타고난 길이라 믿었던 춤 안에서 자신을 비추고, 때로는 그 뒤에 숨어 있던 마음과 조우한 시간이었다. 유재성은 오랫동안 춤을 자신을 대변하는 언어로 생각했다. 그러나 언젠가 그토록 익숙한 표현 방식이 자신을 밖으로 꺼내는 통로인 동시에 내면으로 숨어드는 장막이 될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

“예전에는 춤이 저를 표현하는 전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사건이나 감정을 온전히 대하지 않고 춤으로 감추고 숨기는 저를 발견했어요. 제 마음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고 춤 뒤에 묻어두었다는 사실을 알아챘을 때 자신에게 미안했습니다. 그때부터 나를 속이는 연기에서 벗어나 현재 내 상태를 인정하고 그것을 신체 언어로 옮기는 작업에 집중하기 시작했어요.”

이러한 내면의 변화는 춤의 결에도 흔적을 남겼다. 과거의 그가 젊은 에너지로 무대를 장악하듯 ‘나를 더 보여줘야 한다’며 자신을 채찍질했다면, 이제는 힘을 덜어내야 찾아오는 묵직한 중력을 체감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수석단원 선발 과정에서 선보인 ‘한영숙류 승무’에서는 중후한 무게감과 절제가 선연해졌고, 국수호 안무의 ‘화랭이춤’에선 한층 농도가 짙어졌다는 평가가 뒤따랐다.

“처음에는 용기를 내야만 무대에 설 수 있었다면, 지금은 나를 믿고 내 컨디션을 빠르게 파악하는 여유가 생겼어요. 무릎 컨디션이 나쁘면 억지로 풀려 하지 않고, ‘오늘 내 몸은 이렇구나’ 하고 받아들이죠. 그러면 오히려 몸이 저를 도와주는 지점이 생겨요. 예전에는 춤이 시끄럽다는 말을 들었지만, 최근에는 깊어졌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나를 밀어붙이는 대신 그날의 나를 정확히 아는 것은 10여 년의 시간이 제게 준 가장 큰 선물입니다.”

잘하려고 몰아붙인 신체보다 그날의 호흡을 받아들인 몸이 더 묵직한 울림을 남길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운 셈.



아랫배에서 차오르는 서사

무용수를 넘어 자신의 세계를 설계하는 안무가로서 유재성은 내면에서 태동하는 미세한 신호를 포착해 무대 위에 올린다. 그에게 감정은 설명해야 할 문장으로 정리되기 전에 근육의 떨림, 동작의 밀도, 호흡의 방향으로 번역된다. <미메시스>에서 서울 무당 역할을 맡았을 때 그는 기가 다 빨려나갈 만큼 속의 기운을 끌어올려야 했다. 당시 경험은 형식의 재현을 넘어 신체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힘으로 관객을 설득하는 법을 일깨웠다.

“하나의 감각만을 중점적으로 쓰진 않습니다. 오감을 모두 사용하죠. 어떨 때는 어깨가, 어떨 때는 아랫배가 앞서 반응합니다. 저는 장면 전체가 어떤 형상으로 남는지를 중요하게 봐요. 거친 느낌인지, 일렁이는지, 부드럽게 흐르는지 등등. 마음을 직접 설명하지 않고, 그것이 몸에 어떤 결로 남는지, 어떤 리듬으로 번지는지를 무대 위에 남기고 싶어요.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리면 등판이 살짝 오그라들면서 안쪽에서 찡하게 올라오는 감각이 있고, 행복할 때는 배꼽이 확장되는 느낌이 있어요. 그런 즉각적인 몸의 반응을 포착해 춤사위로 길어 올리는 일이 제 표현의 근본입니다.”

대표적으로 그의 안무작 <현현 顯現>은 이러한 사유가 ‘창호’라는 사물과 만난 결과다. 서울특별시무형유산 제26호 ‘소목장(창호)’에 뿌리를 둔 이 작품에서 그는 창호를 보일 듯 말 듯한 은밀함이자, 가려진 것을 잠시 떠오르게 하는 장치로 해석했다.

“창호의 틀과 한지가 마치 보이지 않는 대상을 붙잡는 ‘그물’처럼 느껴졌어요. 어둠 속 빛이 창호에 스밀 때, 혹은 사람의 형상이 그 뒤에 맺히는 찰나 비로소 무엇인가 감지되죠. <현현 顯現>이라는 제목처럼 무용수의 몸이 잔상처럼 일렁이며 안과 밖이 순환하는 시공간을 구축하고자 했습니다. 그 과정을 거치며 저 자신도 ‘더 명확하게 나를 내보여도 된다’는 응원을 얻었어요.”


창호를 보일 듯 말 듯한 은밀함이자, 가려진 것을 잠시 떠오르게 하는 장치로 해석한 <현현顯現>. 무용수의 몸이 잔상처럼 일렁이며 안과 밖이 순환하는 시공간을 구축했다.


아버지와 반려견을 떠나보낸 뒤 몸에 남은 온기와 감각을 좇은 <잔열>. 슬픔을 말로 설명하기보다 몸에 남아 있는 미세한 떨림과 온기를 붙잡으려는 몸짓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다.



식지 않는 잔열

유재성의 작업은 왕왕 결핍과 상처, 상실처럼 말로 쉽게 정리되지 않는 내밀한 지점에서 동력을 얻는다. <히든>과 <자화상>이 심연을 응시하는 여정이었다면, <잔열>은 아버지와 반려견을 떠나보낸 뒤 몸에 남은 온기와 감각을 좇은 작품이었다. 개인적인 슬픔에서 비롯된 만큼 중간중간 피드백을 받을 때마다 마음이 흔들리기도 했다. 특정 동작을 걷어내자는 의견이 때로는 자신의 슬픔을 평가받는 것처럼 다가왔기 때문. 그러나 그는 그 정서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마음이 남긴 떨림과 온도를 호흡과 동선에 어떻게 실을 수 있을지 거듭 물었다.
“슬픔을 말로 설명하기보다 몸에 남아 있는 미세한 떨림과 온기를 붙잡아보는 작업이어야 했어요. 10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그 에너지가 서서히 고조되는 과정을 관객이 감각적으로 느끼게 하는 것이 가장 큰 도전이었습니다.”

이러한 창작의 바탕에는 ‘한국무용’이라는 뿌리가 자리한다. 상실의 정서를 품은 <잔열>조차 결국 호흡과 무게, 안쪽에서 차오르는 기운을 통해 무대 위에 펼쳐졌다. 유재성에게 한국무용은 특정 형식을 재현하는 이름이 아닌, 감정을 호흡과 중력으로 통과시키는 오래된 문법에 가깝다. 그는 자신이 진흙투성이 땅을 밟고 농사짓던 세대의 몸을 가진 사람은 아님을 분명히 인식한다. 그러나 지금의 몸으로 춤을 추더라도, 그 안에 깃든 한국무용의 호흡과 정신적 정통성은 잃지 않아야 할 근간으로 여긴다.

그 믿음은 서울시무용단 공연에서도 이어졌다. 2025년 서울시무용단이 <스피드>, <일무>, <미메시스> 등 전통의 동시대적 확장을 시도하는 흐름 속에서 그는 전통이 오늘의 감각으로 되살아나는 장면을 가까이에서 목격했다.
“저는 전통을 DNA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머리색을 바꾸고 힙한 옷을 입는다고 해서 유전자가 바뀌지는 않잖아요. 제가 어느 방향으로 창작을 하든, 제 몸 안에 담긴 한국무용의 바탕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만 그 표현 방식은 관객이 감각할 수 있는 언어, 이 시대를 담을 수 있는 방식으로 확장하고 싶습니다. 본연의 것을 소중히 여기고, 나아가 전통이 이 자리에서 다시 살아 호흡하게 만드는 작업을 계속하고자 해요.”

여전히 유재성은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 춤은 나를 보이게 하는가, 감추는가? 슬픔은 몸 어디에 남는가? 전통은 새로운 호흡 속에서 어떻게 다시 숨 쉬는가?’ 그는 완성된 답을 앞세우지 않고, 질문을 자신의 춤 안에서 계속 되새긴다. 무대 위 어느 찰나, 아직 이름 붙지 않은 무형의 마음들은 유재성의 몸을 빌려 잠시 선명한 형태를 얻고, 우리 앞에 현현한다.



HAIR & MAKEUP ARTIST 구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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