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 2026년 6월호

샌딩기로 발굴한 회화의 고고학

회화에서 출발해 벽화와 퍼포먼스까지. 매체에 경계를 두지 않는 작가 메간 루니.
붓으로 캔버스 위에 색을 올리고 전동 샌딩기로 갈아내기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을까.

EDITOR 박이현 WRITER 백아영

Megan Rooney in front of ‘Echoes & Hours’(2024) in situ mural at Kettle’s Yard, Cambridge. Courtesy of the Artist, Photo: Camilla Greenwell


메간 루니 1985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태어나 현재는 런던에서 활동한다. 케임브리지 케틀스 야드, 토론토 현대미술관, 잘츠부르크 쿤스트페라인, 쿤스트할레 뒤셀도르프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상하이 에스파스 루이 비통에서 열린 단체전에 참여했다. 루이비통 재단, 런던 아트 카운실 컬렉션, 볼티모어 미술관, 바르샤바 현대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돼 있다.


캔버스에 색을 여러 번 덧칠하고 전동 샌딩기로 갈아내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화면에는 물감의 층이 쌓였다가 떨어져 나간다. 이 과정에서 작품에는 붓질의 흔적뿐 아니라 작가의 내면, 그를 둘러싼 환경과 시간까지 담긴다. 메간 루니에게 회화는 덧붙이는 동시에 지워나가는 행위다. 회화를 중심에 두고 설치, 벽화, 퍼포먼스를 유기적으로 엮어내는 작가 메간 루니가 타데우스 로팍 서울에서 열리는 3인전 〈마음의 눈 That Inward Eye〉(5월 22일~8월 1일)에 참여한다.


작업을 시작할 때 구체적인 이미지나 스케치 없이 바로 캔버스 앞에 선다고요. 그러면 형태나 컬러는 어떻게 선택하나요? 저에게 캔버스는 사유와 탐색의 장입니다. 진정한 탐색이란 결과를 미리 상정하지 않는 데서 시작하죠. 회화가 실재하려면 작품 고유의 생성 궤적을 거쳐야 해요. 화면이 스스로 존재감을 드러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니까 긴 호흡으로 완만하게 작업합니다. 저는 물감의 물리적 성질보다 특정 분위기나 감정을 환기하는 역량에 더 주목해요. 색채를 매개로 형태를 추적해가는 과정이 화면을 운용하는 방식 전반을 결정하죠. 색은 저를 통과해 신체 밖으로, 또 캔버스 위로 이동해야 하거든요. 치밀하게 계산한 행위 같지만 동시에 우연의 가능성도 있습니다.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발생하는 예술적 가치를 포착하기 때문이지요. 저는 몇 주 동안은 작품과 추격전을 벌이듯 화면 위에 타격을 가하는데, 그 과정에서 회화가 격렬히 변모해요. 때로는 새가 활강하듯 화면 위를 유영하면서 상처 입은 영역에 안료를 더하기도 하고요. 이후 작품과 관계가 정립되면, 굴착기처럼 화면 아래 묻혀 있던 흔적들을 다시 들추어냅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작품이 서서히 형체를 갖춰가요. 이미지에서 더는 아무것도 가감할 수 없는 상태와 화면의 모든 요소가 완벽한 질서를 이루어 움직임이 불가능한 순간. 바로 그때 작업을 완결 짓습니다.


그렇게 치열하게 완성해나간 작품의 주제가 궁금하네요. 그동안 자연 풍경이나 사회·정치적 소재를 다루거나 컬러 자체에 집중하기도 했죠. 색채는 제가 가장 깊이 애착을 갖는 대상이자 끊임없이 몰두하는 화두예요. 제 창작 활동의 중심이고, 작업실에서 내리는 모든 결정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저의 회화는 언제나 개인적인 경험과 연결돼요. 물감은 제가 보고 경험한 걸 체화하고 풀어내는 수단인데, 그 표현 대상은 하나에 머물지 않습니다. 저는 빛과 온도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해요. 그래서 작품이 탄생하는 시점의 기후와 계절감이 자연스럽게 화면 속에 스며들죠. 저를 둘러싼 풍경의 시각적 경험을 화면으로 여과해내니까 도시는 제 오랜 비공식 협업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작업하는 내내 제가 관찰한 이미지와 장면을 끊임없이 반추해요.


‘골짜기와 언덕 너머’, 2026, © Megan Rooney, Courtesy of Thaddaeus Ropac Gallery, London, Paris, Salzburg, Milan, Seoul


주변 환경 외에 또 다른 영감의 원천이 있다면요? 고대 세계와 깊은 유대감을 느끼고 역사적 유적지를 탐험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합니다. 최근에는 이집트의 장례 의식과 관습에 관심을 두고 있어요. 특히 대영박물관이 소장한 <아니 파피루스/사자의 서 The Papyrus of Ani/Book of the Dead>(기원전 1300년경)에 수록된 ‘심장 무게 달기 The Weighing of the Heart’라는 도상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의 심장과 마트 Maat(고대 이집트 신화에서 정의, 진실, 질서를 관장하는 여신)의 깃털 무게를 대조하는 의식인데, 심장이 깃털보다 무거우면 사후 세계에 입성할 수 없다고 해요. 정말 놀라운 발상이죠.


더 자세히 듣고 싶어요. 이집트인들은 죽음과 흥미로운 관계를 맺었어요. 현재의 기쁨을 간과하지 않으면서도 생의 많은 부분을 사후 세계를 준비하는 데 바쳤죠. 저 역시 화면 안에서 일종의 불가능한 균형을 성취하는 데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색채를 형태와 대조하고, 흔적이나 몸짓과 맞부딪히며 그 무게를 가늠하는 과정에는 분명 어떤 광기가 서려 있어요.


불가능한 균형을 추구한다는 점이 회화 표면을 긁어내는 방식에서 잘 드러나요. 그런 행위가 전통적인 ‘그리는 행위’와 충돌하는 걸까요? 아니면 그 영역을 확장한다고 보세요? 파리 팔레 드 도쿄에서 거대한 벽화 작업을 하던 중 광활한 화면 안에서 방향을 잃고 막혀버렸어요. 그 구획을 최대한 빠르게 걷어내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는데, 마침 자리를 비운 설치 팀의 대형 샌딩기가 눈에 들어왔죠. 망설임 없이 화면 위로 밀어 넣었습니다. 몇 주 동안 공들인 방대한 영역들이 고작 몇 시간 만에 깎여나갔고, 그 과정에서 위험하면서도 짜릿한 해방감을 느꼈어요. 이미지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흐릿했는데, 역설적으로 그 덕분에 다음 단계로 나아갈 실마리를 잡았죠. 회화가 탈선하는 순간이 없다면, 작품은 영원히 피상적인 영역에 머물 수밖에 없어요. 저는 예술에서 그런 안일함을 거부합니다. 저에게 샌딩기란 화면이 던지는 난관에 맞서는 방식일 뿐이에요.


‘Temitope Ajose and Leah Marojević in Megan Rooney’s Spin Down Sky II’, 2025, Performance at Thaddaeus Ropac, London, 2025, © Megan Rooney, Courtesy of Thaddaeus Ropac Gallery, London, Paris, Salzburg, Milan, Seoul, Photo: Camilla Greenwell


그 후로 샌딩기를 고정적으로 쓰게 됐나요? 물감을 쌓고 표면을 직접 깎아내면서 붓질 아래 레이어를 다시 드러내는 방식이 인상적인데, 이 과정을 반복하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최종 이미지가 화면에 안착하기까지 작업은 수많은 반복을 거칩니다. 긴 과정 동안 물감은 캔버스 위에 겹겹이 쌓여 물리적인 층을 이루고 회화는 점점 무거워지죠. 전동 샌딩기를 쓰는 건 그 표면 아래 묻힌 형태와 색채를 발굴하고 해방하는 방법이에요. 평면성을 배격하고 화면에 깊이를 더하는 의도도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물감을 덜어냄으로써 흔적을 새기는 역방향 공정에 끌렸어요. 이 과정에서 회화가 일종의 웜홀 Wormhole(서로 다른 두 공간을 잇는 가상의 통로 개념)이 되는 듯한 감각을 경험합니다. 작품이 지나온 시간을 정신적으로 거슬러 올라가 여행할 수 있죠. 과거의 어느 지점으로 돌아가 다시 작업을 이어갈 수 있다는 사실이 저에게 특별하고 깊은 울림을 줍니다.


그런 과정과 시간이 쌓이면 작품이 다르게 다가올 것 같아요. 회화를 깊이 알아갈수록 작품을 향한 애착도 깊어져요. 표면을 깎아내는 행위는 또 다른 차원의 친밀감을 만들어냅니다. 회화가 물감을 덜어내는 물리적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게 되고, 제 손과 몸의 움직임과 직결되니까요. 요즘 현대 회화는 지나치게 빠르게 완성되고, 관람객은 더 빠른 속도로 작품을 훑고 지나가잖아요. 그런 경향이 안타까워요. 저는 제 회화 속에서 길을 잃곤 하거든요. 사실 그 안에서 빠져나올 길을 찾는 게 제가 해야 하는 일이죠. 제 작품을 보는 관람객도 화면 속 숨은 비밀을 찾기 위해 작품 앞에 좀 더 오래 머물기를 바랍니다.


관람객들이 그 비밀을 꼭 찾으면 좋겠어요. 저는 제 작품에 모든 비밀을 털어놔요. 작품과 저를 잇는 연결 고리는 지극히 사적이거든요. 작품을 왜, 어떻게 만들었는지 구구절절 설명하는 예술은 지양하고 싶어요. 작품이 스스로 말하게 두는 것, 그게 제가 믿는 방식입니다.


‘Spin Down Sky’, 2024, Performance at Kettle’s Yard in collaboration with Temitope Ajose, Leah Marojević and Tyrone Isaac-Stuart, © Megan Rooney, Courtesy of Kettle’s Yard, Photo: Camilla Greenwell


맞아요. 작품이 스스로 말하게 둬야 하죠. 그래서인지 작품에서 ‘메간 루니’만의 스타일이 보여요. 그림을 그린다는 건 언제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걸 의미해요. 막막한 중압감과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해방감이 공존하죠. 지금까지 쌓은 작업의 궤적과 그걸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바꿀 가능성이 출발선에 함께 놓여 있습니다. 물론 더 나은 방식이 무엇인지 저조차 정의하기 어려워요. 저는 스스로에게 꽤 엄격한 편이고, 제 작업에 만족하는 경우도 드물거든요. 손에 잡히지 않는 이미지의 속성이 본래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화면 위에 ‘나다운’ 이미지를 만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결국 결정권은 제가 아니라 작품 자체가 쥐고 있어요. 구상적인 성격이 짙은 초기 작업을 돌아보면 이질감도 느끼지만 시간에 따른 자연스러운 변화일 뿐이에요. 창작자로 살아가는 한 과거의 흔적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잠시 수면 아래 묻혀 있다가 어느 순간 다른 형태로 다시 나타나죠.


특유의 색채와 톤도 그런 변화 안에서 자리를 잡았겠죠? 작업실은 실험하는 공간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금세 진부해져요. 색채는 저를 새롭게 재구성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고, 그 안에는 창작을 지속하게 하는 근원적인 힘이 담겨 있어요.


색채가 창작의 근원이라면, 그걸 화면으로 옮기는 몸의 역할도 클 텐데요. 제 신체는 색채가 통과해야 하는 하나의 통로입니다. 붓을 쥐고 움직이는 방식에 따라 결과가 완전히 바뀌어요. 수많은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지만, 정적인 자세에서 작업하는 경우는 거의 없죠. 프러시안블루로 캔버스를 거침없이 채워나갈 때와 네이플스 옐로로 화면을 부드럽게 유영할 때의 감각은 서로 다르고, 흔적도 결이 달라요. 고정된 규칙은 없습니다. 오직 매 순간의 결정이 있을 뿐이에요. 특정 색채가 내면에서 불러일으키는 감정은 시간이 흘러 저만의 고유한 경향을 형성했어요. 이제 그 감각을 스스로 인지할 수 있지만, 동시에 제가 구축해온 방법론을 의도적으로 깨뜨리며 나아갑니다.


‘물가를 따라서’, 2026, © Megan Rooney, Courtesy of Thaddaeus Ropac Gallery, London, Paris, Salzburg, Milan, Seoul


방법론을 스스로 깨뜨린다는 태도가 회화 바깥으로도 확장됐네요. 벽화나 퍼포먼스도 선보였죠? 벽화 작업은 건축물과 직접 교감할 수 있는 기회예요. 장소 특정적 프로젝트의 시간 단위는 작업실과는 완전히 달라요. 그 급격한 호흡 변화가 동력이 됩니다. 즉각적인 결단을 요구하거든요. 한정된 시간 때문에 실패 압박이 크지만, 어쩌면 그런 위험 부담이 작업실에서는 결코 끌어낼 수 없는 무언가를 만들어내는지도 모릅니다.


작업 전반에서 회화에 대한 깊은 고민과 교감이 느껴져요. 동시대 아트 신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회화 작가로서 지금 이 시점에 회화의 역할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현대인의 삶 대부분이 온라인과 디지털 기기 안에서 이루어지지만, 저는 최대한 그 흐름과 거리를 두려고 해요. 거창한 신념 때문이 아니라 그저 개인적인 선택이에요. 하지만 누군가 제 회화를 매끄러운 화면으로만 감상한다고 생각하면 솔직히 씁쓸합니다. 제가 믿는 예술의 가치는 작품을 직접 마주할 때 발생하는 물리적 경험에 있고, 저에게 그 경험은 본능적이고 근원적이에요. 회화든 다른 형태의 예술이든, 작품을 직접 대면하는 행위는 내면의 무언가를 일깨웁니다. 세상을 깊이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과정이라고 믿어요. ‘진짜’를 마주하는 경험을 대신할 수 있는 건 세상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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