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 2026년 5월호

찰나의 맛 봄의 해산물

바다의 제철이 겨울에만 있다고 생각한다면 절반만 아는 것이다.
봄이 끝나기 직전에만 차오르는 것들이 있다.
서해와 남해, 동해가 모두 맞닿아 있는 한반도 봄 바다는 겨울 못지않게 분주하기 때문이다.

EDITOR 김민지 PHOTOGRAPHER 김잔듸

겨울 바다가 지방의 맛이라면, 봄 바다는 살의 맛이다. 한겨울 차가운 수온을 버텨온 굴과 방어, 대구는 지방을 켜켜이 쌓으며 고소하고 묵직하게 차오른다. 반면 봄의 해산물은 다르다. 산란을 앞두고 근육에 에너지를 비축하면서 살이 탄탄해지고, 단백질과 아미노산이 농축되어 단맛과 감칠맛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소라는 바위틈에서 살을 채우고, 암꽃게의 배 속에는 붉은 알이 가득하며, 멍게는 달고 향긋한 향이 절정에 이른다. 바지락은 이 시기 국물의 단맛이 가장 진해 다른 계절과는 비교가 안 된다. 장마가 오기 전, 바다가 가장 맑은 이 짧은 시간에 해산물의 밀도는 정점에 달한다.

소라는 조선시대에도 귀한 것이었다. 달큼하고 쫄깃한 살로 전복과 함께 왕실에 바치는 진상품 목록에 오르기도 했다. 그 할당량을 채우는 것은 오롯이 해녀들의 몫이었다. 제주 해녀들은 산소통도 없이 수심 10m 아래로 내려갔다. 파도 소리가 잦아드는 잠깐의 고요 속에서 바위틈을 손으로 더듬어 소라를 건져 올렸다. 어느 바위 밑에 소라가 숨는지, 물이 맑아지는 시기가 언제인지, 그 감각은 선배 해녀에게서 후배 해녀에게로 세대를 건너 이어졌고, 지금은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된 제주 해녀 문화로 남아 있다.

꽃게와 바지락을 기다리는 서해 갯벌 어민들도 다르지 않았다. 봄은 연안으로 몰려드는 것이 가장 많은 달, 한 해 중 가장 분주한 계절이다. 갑오징어도 그 계절에 올라온다. 몸통 안에 갑옷처럼 생긴 석회질 뼈를 품고 있어 붙은 이름으로, 예부터 이 뼈는 지혈제와 약재로 쓰였다. 4월부터 연안으로 올라오기 시작해 5월이 되면 씨알이 가장 굵어진다. 일반 오징어와는 결이 다른 두툼하고 쫄깃한 살, 데쳐도 질겨지지 않는 식감. 오징어류 중 가장 맛이 뛰어나다는 평을 받아온 이유다.

5월은 단 한 번 열리는 기회의 달이다. 여름 더위는 신선도마저 앗아간다. 봄 꽃게는 6월이 되면 알을 풀어 몸이 가벼워지며 멍게도, 바지락도 여름을 넘기면 지금의 맛이 아니게 된다. 꽃게는 찜으로, 바지락은 국물로, 소라는 살짝 데쳐 기름장에, 갑오징어는 얇게 썰어 그대로···. 복잡한 조리를 더할수록 이 계절의 맛은 오히려 흐려진다. 겨울 바다가 맛있다는 말은 맞다. 하지만 봄의 바다는 다른 방식으로, 다른 것들로 차오른다. 바다는 매년 이 계절을 돌려주지만 놓치면 다음 해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 그게 제철의 본질이다.



소라와 시금치를 켜켜이 쌓은 뒤 생강과 마늘, 제피 등을 곁들여 봄의 발랄함을 표현한 메뉴.


한국 농부의 파인다이닝, 기가스
회현동 피크닉 3층에 자리한 ‘기가스Gigas’의 통창으로는 계절이 바뀌는 풍경이 그대로 들어온다. 창밖의 나무가 푸르러지기 시작하면 주방도 달라진다. 이 공간을 만든 정하완 셰프는 농부이기도 하다. 스페인 ‘무가리츠Mugaritz’와 독일 미쉐린 3스타 ‘라 비에La Vie’ 레스토랑을 거쳐 2021년 기가스를 열었지만, 레스토랑보다 농장을 먼저 일궜다. “유럽에 오래 머물다가 코로나19로 귀국했을 때, 한국 채소의 향과 맛이 과거에 먹었던 기억 속의 맛과 너무 다른 거예요. 원하는 맛을 얻으려면 직접 키우는 수밖에 없었어요.” 씨를 뿌리고 싹이 트는 시기를 기다리고, 수확 시기를 직접 판단하는 진짜 농부의 삶이 시작됐다. 기가스를 오픈한 이후 지금까지도 매주 월요일과 화요일에는 농부의 삶을, 나머지 시간에는 파인다이닝 셰프의 삶을 살고 있다. 레스토랑을 연 지 6년 차를 맞이한 요즘에는 농사 연구에 더 많은 시간을 쏟는다. “어떻게 하면 오랫동안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기가스가 추구하는 가치를 어떻게 더 잘 보여줄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손님을 만족시키는 것에 집중하는 게 맞는다는 결론을 내렸죠.” 땅이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 요즘 군포 와니농장에서는 눈물콩과 딸기, 허브류까지 수십 가지 작물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수익성을 기반으로 하는 일반적인 농장들과는 다르게, 가장 맛있어질 때까지 찬찬히 기다린 뒤에 수확하는 때가 바로 기가스의 제철이다.



기가스는 2023년 미쉐린 그린 스타를 받은 이후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2025년과 2026년에는 미쉐린 1스타를 획득했다.


(왼쪽) 통창 너머로계절의 변화를 체감할 수 있는 기가스 전경. (오른쪽) 농부이면서 기가스를 함께 이끌어가는 정하완 셰프.


“어떻게 하면 오랫동안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기가스가 추구하는 가치를 어떻게 더 잘 보여줄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손님을 만족시키는 것에 집중하는 게 맞는다는 결론을 내렸죠.” 기가스 정하완 셰프


제철을 맞은 화이트 아스파라거스와 갑오징어를 곁들인 메뉴. 오징어 먹물 소스로 감칠맛을 더했다.


바다가 채소를 만날 때

지중해 퀴진을 기반으로 하는 기가스의 메뉴는 육류에 비해 해산물이 차지하는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 양념을 최소화하고 채소와 오일, 해산물이 지닌 재료 자체의 맛을 끌어올리는 식이다. 그래서 밭에서 직접 키운 채소가 언제 절정에 이르는지, 바다의 해산물이 언제 맛이 가장 좋은지를 동시에 읽어내는 감각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농부이자 셰프인 그가 제철을 가장 잘 알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번 촬영을 위해 셰프는 제철의 감각을 2개의 접시에 담았다. 화이트 아스파라거스를 곁들인 갑오징어는 오징어 먹물 소스로 감칠맛을 쌓은 뒤 파르메산 치즈를 더한 딜 크림으로 풍미를 한층 끌어올렸다. 두 번째 디시는 경쾌한 봄의 인상을 담는다. 담백한 소라와 부드러운 시금치를 바탕으로 생강과 마늘, 제피 등 향신 재료를 적극적으로 사용해 입안에서 발랄하게 퍼지는 계절의 리듬을 완성했다. 바다와 땅이 동시에 가장 좋은 것들을 내놓는 5월의 기가스는 특별하다. 봄 해산물이 절정에 오르는 때와 제철 채소가 가장 풍성해지는 때가 겹치는 이 짧은 달, 셰프는 두 가지 모두를 한 접시에 담는다. 자연이 주는 것을 가장 좋은 순간에 쓰는 것, 그것이 기가스의 요리다.


COOPERATION 기가스(0507-1392-9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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