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장고처럼 활용하는 서재 벽면 앞에 선컬렉터 손찬우.
손찬우 태인건설산업㈜ 대표이사이자, 명가종합건설㈜ 부사장으로 재직 중이다. 대구아트페어(DIAF) 운영 위원을 역임했다. ‘소유보다 깊은 나눔’을 지향하며 미술 작품을 컬렉팅하고 있다.
대구미술관에 작품을 기증한 일이 인상적이었어요. 컬렉터가 자신의 작품을 떠나보내는 일이 쉽진 않았을 텐데요. 제 컬렉팅의 지향점은 ‘소유보다 깊은 나눔’입니다. 한 점의 작품을 개인이 품는 것보다 미술관이라는 공적 공간에 기증하는 편이 훨씬 긴 시간 동안 더 많은 사람과 호흡할 수 있는 방식이라고 믿어요. 물론 해외와 비교하면 국내는 아직 기증을 장려하는 제도적 지원이나 문화적 토양이 비옥하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선뜻 기증을 결심할 만한 동력이 생기기 힘든 환경인 것도 사실이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기증을 거시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려 했습니다. 내가 수집한 것들이 궁극적으로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 생각해보면, 나눔 역시 충분히 의미 있는 귀결이니까요. 앞으로도 여건이 허락한다면 해마다 한 점씩은 좋은 기관에 나누고자 합니다. 그런 움직임이 차곡차곡 쌓이면 제 컬렉션과 미술관의 소장 가치가 선순환하는 구조를 만들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기증 문화가 조금씩 변화하는 데에도 밑거름이 될 수 있을 테고요.
대구미술관에 대구 출신 곽훈 작가의 작품을 기증한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서울에서 학업을 마치고 일도 하다가, 패밀리 비즈니스 때문에 다시 고향인 대구로 내려왔습니다. 지역에 머물며 늘 아쉽던 점은 수준 높은 전시를 보려면 서울로 가야 한다는 현실이었어요. 대구미술관은 기획력이 뛰어나고, 규모 있는 전시를 꾸준히 이어온 곳입니다. 그런 곳에 좋은 작품이 더해진다면 지역의 문화적 토대가 단단해질 거라고 판단했습니다. 또 대구아트페어 운영위원으로 활동하던 시절 미술관 관계자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오래도록 가치 있게 남기는 방식은 기증”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그 문장이 뇌리에 남아 있었어요. 어떤 작품을 기증할지 고민하던 끝에 제가 여러 점 소장하고 있던 곽훈 작가가 대구 출신인 까닭에 방향이 정해졌습니다. 제 작은 선택이 하나의 계기가 되었는지 최근 대구미술관이 기증자들을 위한 특별 전시를 준비하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제 곁을 떠난 작품이 더 넓은 시선과 조우한다고 생각하면, 컬렉터로서 이보다 벅찬 보람은 없습니다.

최하늘, ‘조카Nephew’, 2025
마쓰야마 도모카즈Matsuyama Tomokazu의 작품도 미국 산호세 미술관San José Museum of Art에 기증하셨더라고요. 결은 대구미술관 기증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애초에 특정 기관을 목적지로 정해둔 것은 아니었어요. 인연과 시기가 절묘하게 맞물리면서 산호세 미술관으로 향하게 됐습니다. 미술관 기증은 개인의 의사만으로 성사되는 일이 아니더군요. 기관이 작품을 받아들이는 시점, 작가의 조건, 여러 행정적 맥락이 맞물려야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기증은 의지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성격과 기관의 비전이 일치해야 성립되는 과정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처음부터 컬렉팅이 익숙한 일이었나요? 미대생이었던 누나의 영향이 컸습니다. 어릴 때부터 해외여행을 가면 늘 미술관에 들르곤 했어요. 구체적으로 어떤 전시였는지는 잘 생각나지 않지만, 교과서에서만 접하던 반 고흐와 마그리트의 작품을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실제로 본 기억은 지금도 또렷합니다. 돌아보면 저는 미술을 특별히 공부해야 하는 대상이라기보다 생활 속에서 호흡하는 일상 그 자체로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그림과 전시를 보는 일이 익숙했고, 그 감각이 어느새 컬렉팅으로 이어졌습니다.

(왼쪽부터) 백향목의 ‘Third Wheel’(2023), 허넌 배스Hernan Bas의 ‘Melancholy(the bad review)’(2024), 이근민의 ‘Flesh Construction’이 자리 잡은 공간. 이곳에서 컬렉터 손찬우는 손님들과 다과를 곁들이며 미술 이야기를 나눈다.
집을 살펴보니 침실을 살롱처럼 탈바꿈한 공간, 작품들로 가득한 게스트 룸 등이 눈에 띄더군요. 집에서 제일 좋아하는 공간은 어딘가요? 서재입니다. 그곳은 와인과 위스키, 반듯하게 꽂힌 LP와 수많은 서적 등 저라는 사람의 취향을 이루는 요소들이 응집된 공간이에요. 저만의 ‘프라이빗 뮤지엄’이라고 할까요? 인테리어 면에서 공을 들인 부분은 벽면 구성이었습니다. 저는 서재의 벽을 일종의 수장고처럼 활용하고 있어요. 작품을 고정된 요소로 묶어두는 대신, 기분과 시기에 따라 교체하며 감상할 수 있도록 유동적인 구조를 택했습니다. 벽에는 중견 작가들의 묵직한 작품들을 두어 공간의 중심을 잡고, 중간중간 젊은 작가들의 생기와 긴장이 느껴지는 작품을 세심하게 배치했죠. 제가 ‘영 컬렉터’로서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 중 하나가 바로 신진 작가에 대한 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가능성을 응원하고 성장을 지켜보는 일은 컬렉팅이 안겨주는 커다란 기쁨 가운데 하나예요.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 정보를 얻는 방법 등 컬렉팅하는 과정이 궁금합니다. 첫인상이 주는 압도적인 감동을 우선시해요. 말하자면 운명처럼 끌리는 순간이죠. 인간의 감각 가운데 시각은 특히 쉽게 피로를 느끼지만, 아트페어나 전시장에서 피로를 잊게 할 정도로 1분 이상 시선을 붙드는 작품에는 분명 마음을 울리는 힘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렇게 제 감각망에 포착되면 그때부터 본격적인 디깅 digging을 시작해요. 작가의 전시 이력, 특히 미술관 전시 데이터와 작품의 소장처, 비평가들의 글을 꼼꼼히 살펴봅니다. 원로 작가라면 그가 지나온 작업 세계의 변화와 축적을 더듬어보고, 신진 작가라면 앞으로 펼쳐질 가능성과 궤적을 상상해보죠. 갤러리의 역량도 유심히 보는 편입니다. 좋은 갤러리는 작가가 더 나은 전시를 펼칠 수 있도록 돕는 조력자이자 마케터이기도 하니까요. 오히려 시장에서의 인기나 판매 속도는 후순위로 둡니다. 순간적인 열기에 휩쓸려 ‘핫한 작가’만 좇다 보면, 주관을 잃은 천편일률적인 컬렉션에 머무를 수밖에 없거든요. 요즘에는 AI를 활용해 빠르고 정교하게 정보를 수집하면서 저만의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왼쪽부터) 더스틴 에모리Dustin Emory의 ‘Suns Return’(2025), 정희민의 ‘Judith’(2024).
처음 컬렉팅한 작품이 기억나시나요? 제 컬렉팅은 청년 작가들을 응원하는 데서 출발했습니다. 누나 덕분에 알게 된 ‘아시아프(ASYAAF)’가 첫 무대였는데, 학생 작가나 또래 작가의 풋풋한 에너지를 곁에 두는 즐거움을 그때 배웠지요. 이후 본격적으로 경제활동을 하며 제 취향과 집요한 탐색으로 만나게 된 첫 번째 ‘인생 작가’는 단연 이배 작가입니다. 작가의 철학과 역사를 공부하며 작품을 모으면, 시장에서의 평가 또한 자연스레 따라온다는 저의 소신을 증명해준 분이죠. 지금은 뮤지엄 산Museum SAN의 대규모 전시를 포함해 전 세계가 주목하는 거장이 되셨지만, 제가 작가님을 처음 접했을 때는 시장의 열기보다 작품 자체가 지닌 본질적인 오라에 집중하며 고를 수 있는 여유가 있었습니다.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담긴 작품은요? 얼마 전 제 컬렉션에 합류한 션 스컬리Sean Scully 작가님과의 만남이 떠오릅니다. 타데우스 로팍에서의 개인전과 대구미술관에서 열린 대규모 회고전을 통해 이미 작가가 오랜 시간 쌓아온 철학적 깊이를 여러 경로로 접한 상태였는데요. ‘작가의 세계를 내 삶으로 들여야겠다’는 확신을 준 건 뜻밖에도 프라이빗 디너파티 자리에서 그가 말한 짧은 건배사였습니다. “Something.” 간결한 단어였음에도 삶을 대하는 태도와 예술가로서의 시간이 응축돼 있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순간 영화 <타이타닉>에서 잭(리어나도 디캐프리오)이 외쳤던 “Make it count(순간을 소중히)”란 명대사가 뇌리에 스쳤습니다. 표현은 달랐지만, 션 스컬리의 한마디에 담긴 삶에 대한 태도와 묵직한 울림은 제게 영화와 비슷한 감각으로 다가왔어요. 작품을 선택한다는 것이 단순히 결과물을 선택하는 행위를 넘어, 한 사람이 평생을 밀어온 세계를 받아들이는 일이라는 걸 실감한 순간이었죠. 제게 컬렉팅은 캔버스를 소유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작가가 지나온 시간과 축적된 감각을 일상 안으로 초대하는 일이에요.

시오타 치하루Shiota Chiharu의 작품으로 가득한 게스트 룸.
컬렉팅할 때 중요시하는 부분을 말씀해주세요. 결코 타협할 수 없는 두 가지 기준이 있습니다. 하나는 직관적인 감동, 다른 하나는 미술사적 가치와 위치입니다. 우선 작품 앞에 섰을 때 내 안에서 어떤 반응이 일어나는지 봅니다. 아무리 명성이 높아도 정서적인 교감이 생기지 않으면 오래 곁에 둘 수 없거든요. 동시에 작가가 미술사 안에서 어떤 페이지를 기록할 수 있는지도 면밀하게 봅니다. 당장의 화제성보다는 시간이 흐른 뒤에도 한 페이지를 차지할 수 있는 존재인지를 진중하게, 또 치열하게 들여다보는 편이에요. 서도호, 양혜규, 이불 작가처럼 세계 무대에서 한국 미술의 위상을 높이며 미술사적 맥락 안에서 대체 불가능한 존재감을 증명한 이들은 세월이 흘러도 가치를 잃지 않습니다. 좋은 미술관이 꾸준히 조명하고, 많은 사람이 반복해서 호명하는 작가를 지지하는 일은 컬렉터가 맡아야 할 역할 중 하나라고 확신합니다. 미술사라는 큰 흐름 안에서 작가의 자리가 단단해질수록 제가 소장한 작품 역시 긴 생명력을 갖게 되니까요.

(위에서부터) 션 스컬리Sean Scully의 ‘Wall Blue Orange Dark(ss4616)’(2025), 우고 론디노네Ugo Rondinone의 ‘Small Pink Violet Mountain’(2024).
지금까지의 말씀을 바탕으로, 컬렉팅을 시작하려는 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컬렉팅은 벽을 장식할 그림 한 점을 사는 일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나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작품을 집에 들여 매일 마주한다는 것은 작가가 평생에 걸쳐 일궈온 역사와 철학을 내 삶의 공간으로 초대하는 일과 같습니다. 그 과정에서 얻는 위로와 감동은 길고 진한 여운을 남깁니다.
컬렉팅은 삶을 놀라울 정도로 풍요롭게 바꿔놓습니다. 여행을 예로 들어볼까요? 컬렉팅이라는 취미가 생기는 순간, 여행의 목적지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유명 맛집이나 관광 명소를 훑는 것에 그치지 않고, 파리의 루브르미술관이나 퐁피두 센터 같은 세계적인 기관에서 거장들의 숨결을 느끼는 지적인 여정으로 확장되죠. 세상은 아는 만큼 보이고, 예술은 그 세상을 바라보는 매우 섬세하고 아름다운 창이 되어줍니다.
마지막으로 꼭 말하고 싶은 것은 컬렉팅이 선물하는 인연의 소중함이에요. 그림이 아니었다면 결코 닿지 못했을 다양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깨달은 점이 하나 있어요. 예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들은 대체로 순수하고 맑은 영혼을 지니고 있다는 거죠. 취향을 공유하며 맺어진 이 고결한 유대감이야말로 제 삶을 더욱 풍성하고 값지게 하는 최고의 자산입니다. 그러니 망설이지 말고 자신의 마음을 움직이는 첫 번째 작품을 만나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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