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AE JINHO
배진호 복합 예술 단체 ‘전복된 해부학적 풍경(SAL)’을 이끄는
무용가이자 안무가. 무용의 장르를 넘어 다양한 예술 분야와 협
업하며 동시대의 감각과 이슈를 탐구해왔다. 한국무용에서 출
발해 현대무용으로 영역을 넓힌 그는, 2025년 공연예술창작산
실로부터 ‘올해의 신작’ 최연소 선정자로 뽑혀 주목받았다.
기계의 리듬
무용의 장르 경계를 넘어 다양한 예술 분야와 협업하며 동시대 이슈를 예리하게 파고드는 복합 예술 단체 ‘전복된 해부학적 풍경Subverted Anatomical Landscape’(이하 SAL)의 는 2025년 공연예술창작산실의 ‘올해의 신작’ 선정작이다. 인간과 기계가 뒤섞여가는 과정을 따라가는 작품은 유한한 몸과 기계적 속성이 맞닿는 지점에서 존재의 본질을 되묻는 것이 핵심. 그런데 지난 3월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무용가 배진호가 연출한 를 보고 난 뒤 오래 남는 것은 기계와는 거리가 먼 인간의 잔상이었다. 금속과 신체가 얽히고, 생명과 무생물의 경계가 흐려지는 동안 작품이 데려가는 곳은 막연한 미래의 환상이 아닌 이미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변화의 징후였다.
“사람들은 점점 기계처럼 움직이고 타인을 대하는 반면, 기계는 오히려 인간다워지기 위해 발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기계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은 지금 인간의 상태를 말하고 싶었던 것이죠. 더 효율적이고 더 빠르게 움직이려 할수록 우리가 무엇을 잃고 있는지를 묻고자 했습니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 출연진은 객석에 앉은 관객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걸었다. 누가 관객이고 누가 무대 위 인물인지 잠시 헷갈릴 만큼 낯선 친밀감이 퍼졌고, 그 기묘한 공기는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흐리며 작품 전체를 감싸는 불안을 예고했다. 인간의 감정을 배우려는 기계가 심장을 움켜쥔 채 고통과 절망을 표현하는 장면 또한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인간을 닮아가려는 존재가 아름다움에 앞서 고통을 먼저 마주한다는 사실이 선명하게 다가와서다. 후반부의 군무도 마찬가지였다. 과열된 리듬으로 몰아치는 움직임은 기계의 소진을 보여주는 동시에 인간이 기계의 속도와 질서에 맞춰갈수록 끝내 무엇이 남을 수 있는지를 묻는 듯했다.

해체되는 몸
배진호의 움직임은 몸을 자주 끊고, 꺾고, 흩뜨린다. 유기적으로 이어지던 선은 관절에서 걸리고, 살결은 금속처럼 차갑고 단단한 표면으로 바뀐다. 그가 집요하게 밀어붙이는 것은 새로운 동작을 덧붙이는 작업에서 나아가 몸을 어디까지 해체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끝에서 어떤 낯선 경험을 하게 되는지를 시험하는 일이다. SAL이 ‘전복된 해부학적 풍경’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도 그 연장선에 있다. 익숙한 동작을 덜어내고 전이적 움직임을 취하며, 매끄러운 연결을 뒤로한 채 어긋나는 리듬을 택하는 이유도 몸을 하나의 완결된 형상에서 벗어나 끊임없이 분해되고 다시 조합할 수 있는 구조로 바라보기 때문.
“단체의 이름을 정하는 데만 1년 가까이 걸렸습니다. 한국 사람인 만큼 한글 이름을 붙이고 싶었고, 영어로도 제가 지향하는 바가 담기길 원했거든요. 무대 위의 우리는 일상적인 몸짓을 반복하기보다, 그 질서에서 벗어난 움직임을 행하는 존재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전복’이라는 단어를 선택했고, 저희는 뼈로 춤을 춘다고 느끼기에 ‘해부학적’이라는 말을 붙였죠. 그렇게 만들어진 움직임이 어느 공간에 놓이든 하나의 풍경이 되길 바라요.”

2025년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 신작’ 선정작인

인간 내면에 자리 잡은 어둡고 복잡한 감정과 충동을 드러낸 SAL의 <죽여버리기>(배진호 연출)는 우리가 어떻게 서로 인정하고 함께 살아갈 수 있는지 공존의 길을 모색하는 작품이다. ⓒ 최랄라.
검정의 방향
배진호의 작품에는 짙은 어둠이 깔려 있다. 이는 개인의 취향과는 거리가 있다. 그보다는 작업을 대하는 상태다. “작품의 평이 좋든 나쁘든, 칭찬을 받거나 상을 받아도 그것을 오래 즐기지 못했어요”라는 그의 말처럼, 배진호는 언제나 곧바로 다음 작업을 향해 밀려간다. 더욱이 스스로 보기에 아쉬운 점이 항상 남았기에, 그렇게 쌓인 긴장과 압박이 그의 색을 검정에 가까워지게 했다.
인간 내면의 어두운 충동을 밀어 올린 <죽여버리기>, 신체 접촉이 남기는 흔적과 관계의 진동을 탐색한 <2122.21222> 역시 같은 결을 공유한다. 작품이 매끄럽게 설명되는 대신 날것의 감각으로 먼저 다가온다는 사실에서 그가 어떤 방식으로 어둠을 무대 위로 끌어오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가 기꺼이 호불호를 감수하는 태도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호불호가 없는 작품은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요. 그렇다고 매번 호와 불호를 설정하는 건 아닙니다.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 자체가 호불호가 갈릴 수밖에 없는데, 그냥 내 색깔이구나 생각해요.” 좋은 반응조차 안주에 머물지 않고, 다음 작업의 압박으로 되돌아오는 사람. 긴장과 불만족, 밀어붙이는 에너지가 배진호의 검정을 만든다.
그러나 그 검정이 냉소나 허무를 상징하진 않는다. 그는 염세적인 감정이 짙어질 때도 있지만, 끝내 자신의 결론은 사랑이라고 말한다. 그의 작업에서 검정은 모든 것이 꺼진 뒤 남는 색이 아니라 불안과 분노, 회의와 애정이 한데 뒤엉켜 농밀해진 상태를 가리킨다. 배진호의 무대가 어두울수록 그 아래에서 더 선명해지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을 향한 미련과 애정일지도 모른다.

무대 밖으로 번지는 장면
SAL의 작업은 막이 내려도 멈추지 않는다. 배진호는 무용이 찰나의 예술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무대 위에서 피어났다가 사라지는 인상을 다른 형식으로 붙잡아두는 일에도 꾸준히 마음을 기울여왔다. 책자와 굿즈를 직접 구상하고, 의상 디자인까지 세심하게 살피며 작품의 분위기와 정서를 공연 바깥으로 확장해나간 것이 대표적. 몸에서 비롯된 움직임이 인쇄물과 오브제, 시각적 장치 안에서 또 다른 생명을 얻는 셈이다. 덕분에 그의 작업은 무대 위에서만 소진되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접할 수 있게 된다.
이는 단순한 부가 작업과는 다르다. 휘발되는 시간을 어떻게 붙들 것인가, 사라질 수밖에 없는 장면을 어떤 방식으로 축적할 것인가에 대한 배진호 나름의 응답이다. 그래서 SAL이 만드는 풍경은 무대 안에서만 끝나지 않는다. 공연이 끝난 뒤에도 기록과 이미지, 물성의 층위 속에서 읽히고, 그 결과 한 차례 스쳐간 움직임은 그 자리 바깥에서 긴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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