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 2026년 5월호

발레의 재발견

거울 셀피와 발레코어 룩에서 시작된 관심이 어느새 연습실과 극장으로 이어진다.
발레의 재유행은 단순한 유행을 넘어 몸과 마음의 균형을 되찾고자 하는 오늘의 감각을 드러낸다.

EDITOR 박이현 WRITER 김태희

2019년 파리 국립 오페라 발레단이 올린 루돌프 누레예프Rudolf Nureyev 버전의 <백조의 호수>에서 레오노르 볼라크Léonore Baulac와 제르맹 루베Germain Louvet가 공연 중인 모습. © Julien Benhamou / OnP


피드 위의 발레

하얗고 화사한 연습실에서 찍은 거울 셀피, 꾸민 듯하면서도 무신경하게 흘러내려 어깨를 드러낸 착장, 종류도 색상도 다양한 ‘발레코어’ 룩. 어쩌면 당신의 인스타그램 피드에도 한 번쯤 지나갔을 법한 장면일 것이다. 성장기 아이들의 자세를 바르게 해주고 예술 소양을 키우기 위한 발레 레슨 풍경이 어쩌다 성인 사이에서 유행하게 된 것일까.
골프와 테니스 열풍에 이어 다음 인기의 주인공은 발레일까? 전공자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발레가 고정관념을 깨고, 또 소셜 미디어의 파도를 타고 일상에 스며들고 있다. 연극이나 뮤지컬 같은 예술 장르보다는 다소 생경하고, 어쩐지 다가가기보다는 ‘우와’ 하고 한 발짝 떨어져 감탄사를 외치게 하는 예술. 샹들리에가 반짝이는 오페라극장이나 연습실에만 존재할 것 같은 고고한 이미지가 각종 소셜 미디어 콘텐츠로 재생산되며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한국무용·발레·현대무용 등 세부 장르 무용수들이 출연한 엠넷의 경연 프로그램 <스테이지 파이터>는 클립 영상으로 확산하며 남성이 추는 발레의 우아함과 테크닉을 보여줬고, NCT 마크의 솔로곡 ‘1999’에 맞춰 발레 동작을 담은 챌린지 ‘힙레’(힙합+발레)가 틱톡으로 재생산되며 르세라핌 카즈하·트와이스 미나·트리플에스 지연·엔하이픈 니키 등 몇몇 아이돌이 발레를 전공했다는 사실이 주목받기도 했다. 그간 <백조의 호수> 같은 고루한 클래식 발레로 대표되던 발레의 이미지가 달리 보이기 시작하고, 배우 수지·고민시·박규영 등 연예인의 ‘연습실 인증 샷’을 선망하는 경향이 ‘나도 한번?’ 하는 호기심으로 이어지고 있다.


무용사에서 최초의 발레로 불리는 <왕비의 희극 발레>(1581)를 기록한 그림.


에드가르 드가Edgar Degas의 ‘무대 위 발레 리허설The Rehearsal of the Ballet Onstage’(1874년경).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나를 다잡는 시간
단순히 발레 이미지만 주목받는 것이라면 한때 인기를 끈 샤 스커트나 발레리나 플랫 슈즈 같은 패션 아이템에서 그쳤겠으나, 최근의 유행은 조금 달라 보인다. 외적인 것보다는 자세 교정과 운동 효과, 중심을 단단히 지키면서도 절제하는 태도, 미적 소양 등이 치열한 삶 속에서 결핍을 느끼던 이들에게 강력하게 다가가고 있다. 발레 연습복을 예쁘게 갖춰 입고 거울 앞에 서서 불균형한 자세를 다잡고, 클래식 반주와 함께 호흡하며 미적 감각을 되살린다. 근력과 지구력을 모두 키우는 운동 효과는 덤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잔잔하기만 하지만, 내 몸이 뻗어 나가는 모든 순간에 온 신경을 집중하는 과정은 일종의 명상 효과를 자아내기도 한다. 치열한 일상을 견뎌낸 현대인이 오롯이 나에게 몰입하는 이 시간은 누군가에게는 리추얼이 되기도 한다.

‘취미 발레’로 불리는 발레 레슨을 경험해본 이들은 성취감은 물론 확실한 단계별 성장 과정에 도전 의식을 느끼기도 한다. 스트레칭으로 시작해 바barre 워크와 센터centre 워크를 거치며 기본기를 다진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전공자처럼 작품 속 동작을 배우거나 토슈즈를 신는 푸앵트pointe 워크, 남성 무용수와의 2인무인 파드되pas de deux 클래스까지 도전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짧게는 몇 개월, 길게는 십수 년이 걸릴 정도로 지난한 여정에도 오늘보다 조금 더 성장한 스스로에게 느끼는 보람은 발레를 하는 강력한 원동력이다.

발레를 가볍게 소비하지 않고 진지하게 경험한 이들이라면 천천히, 그리고 묵직하게 일어나는 내면의 변화에 공감할 것이다. 과거 잘 가꾼 외모, 근사한 옷과 시계, 화려한 언변이 누군가의 첫인상을 결정하는 중요한 조건이었다면, 이제 우리는 상대의 자세와 비언어적 태도야말로 진정한 우아함과 존재감을 드러내는 방법이라는 것을 안다. 과장 없이 자신감을 드러내고, 정중하면서도 강렬하게 자신의 존재를 각인하는 태도. 상대를 마주했을 때 보여주는 이 같은 자세는 입을 떼기도 전에 건네는 또 하나의 언어인 셈이다.


배우 박규영의 ‘발레 연습실 인증 샷’, 사진: @lavieenbluu.


이후 시와 음악 아카데미가 생기면서 육체를 바라보는 관점이 욕망의 대상이 아닌 천상에 닿고자 하는 욕구로 해석되기 시작했고, 점차 시와 음악을 찬양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초기의 발레는 사교적 유희나 기하학적 대형 중심의 단순한 춤에 머물렀으나, 1581년 <왕비의 희극 발레Ballet Comique de la Reine>가 공연된 후 ‘발레’는 춤이 포함되면서 장대하고 호사로운 의상과 장치가 어우러진 공연 양식으로 의미가 확장되었다. 춤은 점차 프랑스의 학문적이고 정치적인 생활에 빠질 수 없는 존재로 자리했다. 궁정에서 발레의 중요성은 점점 더 높아졌고, 공연의 수가 늘어나면서 당시 국왕이자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아들인 루이 13세가 무용수로 직접 무대에 서는 일도 잦았다. 국방 강화를 명목으로 절대 권력을 꿈꾸던 시절은 발레의 의미와 성격까지 바꿔버렸다. 궁정에서 펼쳐지는 무대가 왕의 위엄을 찬미하는 수단이 된 것이다. 화려한 스펙터클로 치장한 발레의 인기와 영향력은 나날이 커져갔고, 그 무대의 중앙에는 언제나 왕이 있었다. 왕을 둘러싼 극적이고 마법적인 무대효과는 그를 신적인 존재로 추앙하기에 이르렀고, 당당하게 선 자세와 완벽하게 테크닉을 소화해내는 퍼포먼스가 그 권위를 뒷받침했다.


NCT 마크의 솔로곡 ‘1999’에 맞춰 발레 동작을 담은 챌린지 ‘힙레’, 사진: @nct.


후대인 루이 14세는 프랑스 역사상 가장 춤을 사랑했고 춤추는 자신 또한 깊이 애정한 통치자였다. 발레가 극예술로서 정교하게 발전한 시기 절대왕정 역시 정점에 달했고, 루이 14세는 춤을 궁정의 삶에서 필수 요소이자 귀족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13시간에 걸쳐 공연된 <밤의 발레Le Ballet de la Nuit> 마지막에 이르러 날이 밝으며 태양으로 등장하는 루이 14세의 모습은 그 자체가 궁정의 질서와 권위를 상징했다. 왕과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알현하느냐가 곧 신분이던 시절, 귀족들은 왕의 ‘코르드발레corps de ballet(군무)’가 되기를 자청했다. 루이 14세는 1661년 왕립 무용 아카데미를 설립했고, 아카데미 사람들은 곧 왕의 사람이 되었다. 이곳에서 정립되는 예법과 발레는 궁정 생활의 기준이 되었으며, 이는 훗날 프랑스 문화가 유럽의 핵심이 되는 데 기여했다.

내적으로는 끝없이 인내하면서도 누구보다 화려하고 당당하게 동작을 표현하는 일은 예술적 언어로서 발레가 관객에게 이야기를 전달하고 존재감을 드러내온 본질적인 방식이다. 단순히 척추를 곧게 세우고 어깨를 젖혀 바르게 서는 것만이 아니라, 발레라는 춤을 추는 과정 자체가 정교하게 다듬어진 자세로 예를 다하는 일이 된다. 발레는 자연스러움을 거스르기에, 순수하게 인위적인 예술이다. 닿을 수 없는 정수를 꿈꾸며 자연스럽지 못한 과정을 수행한다. 그러나 이토록 이상화된, 동시에 덧없는 현재의 예술이라는 점이 오늘날 오히려 매력으로 다가온다. 태생적으로 발레는 권위를 드러내는 몸의 언어이니 말이다.


(왼쪽) 시몬 로샤의 2025년 S/S 발레코어 룩. (오른쪽) 미우미우의 2022년 F/W 발레코어룩. ©LAUNCHMETRICS/SPOTLIGHT


우아함의 기원

발레의 역사는 1533년 프랑스 국왕 앙리 2세와 이탈리아 피렌체의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결혼에서 출발한다. 르네상스 시대 예술 후원자로 공헌한 인물로 기록되는 바로 그 왕비다. 어원은 이탈리아에서 즐기던 간단한 양식의 사교춤 ‘발리bali’와 ‘발레티balletti’가 프랑스로 옮겨오면서 ‘발레 ballet’로 불리게 된 데서 비롯한다.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 실질적으로 프랑스 궁정을 지배하면서 가장무도회를 포함한 의례적이면서도 극적인 행사를 다수 열었다. 종교 갈등을 비롯한 사회적 불안에 시달리던 16세기 프랑스는 사치스럽고 다소 경박해 보이기까지 하는 이러한 스펙터클을 폭력성을 진정시키는 방편으로 삼았다. 이른바 ‘도파민 터지는’ 시각적 이벤트를 이용해 정치적 갈등으로 팽팽해진 사회의 긴장을 누그러뜨리고자 한 것이다.


파리 국립 오페라 발레단의 에투알 박세은이 공연하는<지젤>. (장 코랄리Jean Coralli와 쥘 페로Jules Perrot의 공동 안무작). © Maria-Helena Buckley / OnP


몬테카를로 발레단의 <백조의 호수> 공연 장면. © Alice Blangero


다시, 동시대의 발레

궁정의 규범, 예절로 시작된 발레는 500년 가까운 세월을 지나 오늘날 ‘클래식’으로, 또 다른 예술에 영향을 미치는 ‘전통’으로 우리 곁에 존재하고 있다. 동시대의 예술이 끊임없이 그 양태를 변화하며 새로운 예술로 부상할 때도, 발레는 오페라와 함께 프로덕션 개념의 전막 무대예술로서 본래의 가치를 전해왔다.
현대인이 왕정 시절의 예술에 여전히 감동하는 것은, 시대 흐름에 맞게 다양한 작품이 등장하는 가운데서도 그 뿌리만큼은 단단하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서사를 띤 장대한 예술이라는 점은 오페라극장에서 발레를 관람해야 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사랑 이야기는 익숙하지만 닳지 않는 정서적 울림이 있고, 언어가 소거된 서사는 온전한 신체 예술로 치환된다. <백조의 호수>의 시대는 저물었지만, 고전 텍스트를 대본으로 삼은 발레 작품이 여전히 아날로그 감성을 깨운다. 푸시킨의 잘 알려진 원전을 토대로 존 크랭코가 안무한 ‘오네긴’은 사랑과 애증으로 뒤엉킨 감정선을 무용수의 연기와 차이콥스키의 음악으로 극대화했다. ‘드라마 발레의 거장’으로 불리는 케네스 맥밀런은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프로코피예프의 표제음악을 오선지 삼아 다채로운 움직임을 음표로 찍어냈고, 이어 발표한 <마농>에서 금지된 사랑이라는 주제, 탈진할 정도로 내달리는 테크닉, 거침없는 애정 표현으로 관객을 무대에 몰입하게 했다.

한편으로 오늘날의 발레는 클래식 발레 시절의 거추장스러운 외형을 탈피하고 내밀한 본질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다. 결국 춤의 본질인 몸이 만들어내는 움직임에 집중하며, 음악적 아름다움과 좀 더 밀착되는 추세다. 서사를 걷어내고 추상성을 지향하며 선율과 무용수의 몸을 탐닉했던 게오르게 발란친은 클래식 음악의 구조적 아름다움에 집중했는데, 고전발레 형식에 대한 오마주를 담은 <주제와 변주>, 음악 형식에서 모티프를 얻은 <세레나데>, <알레그로 브릴란테> 등이 대표적이다. 사랑과 죽음이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긴 이르지 킬리안은 발레라는 전통적인 예술 양식을 유산으로 삼아 때로는 서사를, 때로는 음악을, 때로는 그림을 무대 위에 그려냈다. 한편 미국을 근거지로 활동하는 트와일라 사프는 동시대 관객의 취향에 꼭 맞는 안무작을 선보이고 있는데, 필립 글래스의 음악을 택한 <다락방에서>나 프랭크 시내트라의 명곡으로 구성한 <시내트라 모음곡>은 음악과 춤 어느 한쪽에 종속되지 않고 상호작용하며 현대의 정서를 발레 언어로 유려하게 그려낸다.

오는 5월 내한하는 몬테카를로 발레단의 <백조의 호수>는 클래식 발레의 형식미를 갖춘 채 컨템퍼러리 발레의 세련된 미감을 선보이는 작품이다. 이 발레단의 예술감독이자 안무가인 장 크리스토프 마요는 <신데렐라>, <라 벨르(잠자는 숲속의 미녀)>, <로미오와 줄리엣> 등 전통적인 내러티브를 계승하면서도 동시대적 발레 움직임을 탐구하며 시각 요소와 뛰어난 음악성을 강조한 다수의 전막 발레를 발표해왔다. 현대인의 취향에 맞춰 속도감을 높인 움직임, 익살스럽고 흥미로운 유머, 과감하게 드러낸 섹슈얼리티 등은 발레가 더는 옛 궁정 춤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는 사실을 여실히 증명한다. 생동하는 한국 창작 발레의 현장이 궁금하다면 5월과 6월에 걸쳐 진행되는 대한민국발레축제를 살펴보자. 패션 디자이너이자 춤 공연을 다수 연출한 정구호의 신작 <정구호의 Tale of Tales>, 방송으로 대중에 이름을 알린 최수진·이루다의 <발레아리랑>, 주목받는 안무가 강효형과 거문고 연주자 박다울의 서울시발레단 신작 등 생동하는 한국 창작 발레의 현장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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