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 2026년 5월호

EXOTIC JEWELRY

약 100년 전 파리를 뒤흔든 동양의 원색 보석들. 
인도의 신비로운 카빙과 파리의 세공 기술이 만나, 전에 없던 이국적이고 대담한 아르데코의 미학을 완성했다.

EDITOR 이수연 PHOTOGRAPHER 이호현

비잔틴제국의 황실 유물을 연상시키는 대담한 칼라 실루엣의 ‘유니카’ 네크리스. 대지의 에너지를 응축한 듯한 9개의 카보숑 루비 주위로 에메랄드와 사파이어의 푸른 생명력이 일렁인다. BUCCELLATI.


한동안 뉴욕에 도착하면 시차도 풀리기 전에 57번가 FD 갤러리로 향하곤 했다. 에메랄드 위에 꽃을 조각한 브로치, 래커로 산수를 묘사한 배너티 케이스 같은 1920년대 아르데코 주얼리를 이만큼 다루는 곳은 드물기 때문이었다. 이 이국적 색채의 뿌리를 따라가면 100년 전 유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철도와 증기선이 대륙 간 거리를 좁히고, 교역과 만국박람회가 이국의 문물을 유럽에 쏟아내던 시대였다. 유럽인들은 낯선 색채와 문양에 열광했다. 이집트 파라오의 문양, 인도 마하라자의 장신구, 중국의 비취, 일본의 자개, 아프리카의 원시 조각까지. 파리의 주얼러들은 그 모든 것을 자신들의 감각으로 흡수해 아르데코 주얼리로 풀어냈다.
불씨를 댕긴 것은 1909년 파리에 상륙한 세르게이 댜길레프Sergei Diagilev의 러시아 발레단, 발레 뤼스Ballet Russe였다. 이듬해 초연한 ‘셰에라자드’는 짙은 에메랄드그린과 붉은빛, 코발트블루로 객석을 압도했고, 파리의 살롱과 아틀리에는 곧바로 이에 반응했다. 이국적인 것이라면 무엇이든 환영받던 분위기 속에서 방돔 광장의 메종들은 디자이너를 루브르박물관에 보냈다. 이집트, 페르시아, 중국, 일본의 유물을 직접 보고 그리라는 지시였다. 이슬람 건축의 기하학적 패턴은 플래티넘 세팅의 밑그림이 되었고, 페르시아 세밀화 속 꽃과 아라베스크는 에나멜 장식이 되었다. 이전 세대 주얼리와는 확연히 다른 풍경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프랑스 아르데코 스타일의 보석 세팅과 에나멜 골드 및 플래티넘으로 제작한 탁상시계. © Albion Art Jewellery Institute


나일강에서 온 영감

1922년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Howard Carter가 거의 도굴되지 않은 채 그대로 안치돼 있던 투탕카멘의 무덤을 열었다. 3000년 넘게 잠들어 있던 소년 파라오의 황금 마스크와 부장품이 세상에 공개되자 유럽 전역에 ‘이집토마니아Egyptomania’가 번졌다. 당대 한 주얼러가 1923년에 이렇게 적었다. “이 발견은 패션과 주얼리에 대대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예언은 적중했다. 스카라베, 호루스의 눈, 연꽃, 스핑크스 같은 이집트 문양이 19세기 주얼리에도 등장한 적은 있었지만 이번에는 차원이 달랐다. 금빛 입자가 박힌 라피스라줄리의 짙은 푸른빛, 카닐리언의 농밀한 주홍, 튀르쿠아즈의 청록. 유럽 다이아몬드 주얼리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배색이 아르데코 특유의 기하학과 만나면서 전혀 새로운 주얼리가 탄생했다. 파리의 메종들은 파라오의 서사를 수놓은 팔찌, 스카라베 브로치, 스핑크스 문양의 배너티 케이스를 쏟아냈다.이집트에 대한 유럽의 관심은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니다. 1798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이 시작이었고, 1869년에는 수에즈운하가 열렸다. 파리 콩코르드 광장과 런던 템스강변, 뉴욕 센트럴파크에 차례로 이집트의 오벨리스크가 세워졌다. 19세기 내내 쌓여온 관심 위에 투탕카멘의 발굴이 불을 붙인 것이다.


마하라자가 파리를 뒤흔들다

이집트보다 한발 앞서 파리와 인도 사이에 뜻밖의 교류가 시작되었다. 1911년 영국 국왕 조지 5세의 인도 대관식, 이른바 델리 더르바르Delhi Durbar에 참석한 프랑스 주얼러들은 인도에서 전혀 다른 보석 문화를 목격했다. 유럽에서는 보석의 빛을 최대한 살리려 패싯으로 커팅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인도의 장인들은 루비와 에메랄드 위에 꽃과 잎사귀를 조각하고 있었다. 보석에 종교적 의미를 새기는 오랜 전통이었지만 유럽 주얼러들에게는 낯선 발상이었다. 파리로 돌아온 이들은 인도의 카빙된 보석을 플래티넘 세팅과 결합해 투티 프루티Tutti Frutti 스타일을 완성했다. ‘모든 과일’이라는 뜻의 이름 그대로 카빙된 루비, 에메랄드, 사파이어가 과일처럼 탐스럽게 어우러진 디자인이다.

인도의 마하라자들은 거꾸로 유럽의 아르데코 스타일에 빠져들었다. 인도 파티알라 왕국의 마하라자, 부핀데르 싱Bhupinder Singh은 맨살 위에 다이아몬드 흉갑을 걸치고 방문객을 맞이할 정도로 보석에 탐닉한 인물이다. 마하라자들은 대대로 물려받은 보석을 파리의 주얼러에게 보내 최신 아르데코 양식으로 리세팅해달라고 주문했다. 인도의 젬스톤에 파리의 기술이 더해지면서 양쪽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주얼리가 만들어졌다. 세팅 과정에서 유럽 디자이너들이 가장 크게 자극받은 것은 ‘색’이었다. 다이아몬드와 플래티넘의 무채색에 익숙하던 눈앞에 카빙된 에메랄드의 깊은 초록과 루비의 진한 붉은빛이 한꺼번에 펼쳐졌으니 충격은 당연했다. 황금 위에 원색의 보석을 장식하는 인도의 전통은 유럽 주얼리의 색채 감각을 바꿔놓았고, 파리의 주요 메종들은 앞다투어 인도풍 카빙 보석을 자사의 디자인에 녹여냈다.



옐로 골드와 플래티넘에 자개, 말라카이트, 산호 등으로 동양사를 묘사한 ‘드래곤’ 파우더 콤팩트. 1920년. SYMBOLIC & CHASE. 2 파라오의 옆모습이 새겨진 약 11.80캐럿의 루비가 중심을 이루고, 주변을 삼각형 에메랄드와 사파이어를 이용해 아르데코풍으로 완성한 ‘런던’ 링. FD GALLERY.


용, 파고다, 래커의 세계

중국과 일본은 유럽에 없던 소재와 색감으로 주얼러들을 자극했다. 래커 특유의 깊은 먹빛, 비취의 은은한 초록, 자개의 영롱한 광택…. 래커와 비취는 유럽 주얼리에 전례 없던 소재였고, 자개는 유럽에서도 쓰인 적이 있으나 래커와 결합된 동양식 쓰임새는 전혀 다른 영감이 되었다. 방돔 광장 메종의 수장 가운데는 중국 도자기와 오브제를 열렬히 수집하는 이가 있었고, 1909년에는 한 세일즈맨이 중국 출장에서 비취와 연옥, 전통 공예품을 한 아름 안고 돌아오기도 했다. 용과 키메라, 파고다 등의 형상이 다이아몬드와 오닉스 위에 새겨졌고, 자개와 래커로 중국 산수를 묘사한 미스터리 클록과 배너티 케이스가 잇달아 등장했다.

래커 기법이 파리에 들어온 경로가 흥미롭다. 제1차 세계대전 중 비행기 프로펠러에 래커 칠을 하던 중국인 장인들이 전후에 주얼리와 장식 예술 분야로 전향한 것. 장 뒤낭Jean Dunand은 일본 래커 기법을 익혀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고, 라클로슈 프레르Lacloche Frères를 비롯한 주얼러들은 담배 케이스와 콤팩트에 래커, 자개, 달걀 껍데기를 정교하게 상감했다. 당시 남아 있는 배너티 케이스 디자인 도면에는 일본 전통 산수화의 구름 문양이 뚜렷하게 보인다. 연옥은 수천 년간 중국 미학의 핵심이었다. 아르데코 주얼러들은 이 소재를 기하학적으로 재단해 브로치와 펜던트의 중심에 앉혔다. 유명한 ‘랜턴 클록’은 중국 전통 사각 유리 등불의 형태를 빌려 연옥 패널로 본체를 감싸 다이얼에 한자 숫자까지 넣었다. 얼핏 중국 공예품 같지만 안에는 스위스 정밀 기계가 숨어 있었다.



젬스톤의 강렬한 채도로 날갯짓의 리듬감을 만든 ‘버드 인 플라이트’ 브레이슬릿. OSCAR HEYMAN.


아프리카의 리듬, 주얼리의 리듬
재즈가 파리를 사로잡고 조세핀 베이커Josephine Baker가 폴리 베르제르Folies Bergère 극장의 무대 위에서 온몸으로 리듬을 타던 시절, 아프리카도 주얼러들의 시야에 들어왔다. 피카소는 친구 앙드레 드랭 André Derain이 수집한 가봉산 가면에서 날것의 조형미에 눈을 떴다. 흑단 위에 새겨진 과감한 기하학, 상아가 빚어낸 추상적 형태…. 유럽의 고전 조각과는 전혀 다른 문법이었고, 그 충격은 큐비즘을 거쳐 주얼리 디자인까지 전해졌다. 장 뒤낭의 ‘기린’ 목걸이는 아프리카 부족의 넥 링에서 형태를 빌리고 래커로 붉은색과 검은색의 기하학적 무늬를 입힌 걸작이다. 조세핀 베이커가 이 목걸이를 즐겨 착용했다.

이집트의 스카라베에서 인도의 카빙, 중국의 래커, 아프리카의 기하학까지. 파리의 주얼러들은 네 대륙의 미감을 받아들이되 파리 아틀리에 고유의 기술과 감각으로 전혀 다르게 빚어냈다. 그 주얼리가 100년이 지난 지금도 경매장에서 최고가를 경신하고 있다.



루이 까르띠에가 아프리카 여행 중 마주친 팬더의 모습에 매료되어 탄생시킨 ‘팬더 드 까르띠에’ 링. 팬더 형상의 화이트 골드 위로 블랙 래커와 오닉스의 강렬한 패턴, 차보라이트 가닛의 눈빛이 어우러져 있다. CARTIER. 붉은 점박이 무늬가 강렬한 서양란 톨룸니아 4T.


이탈리아어로 ‘유혹하는 사람’을 뜻하는 세두토리Seduttóre에서 이름을 딴 메종의 상징, ‘세르펜티 세두토리’ 네크리스. 로즈 골드 위로 관능적인 눈빛을 드리운 블루 사파이어와 뱀의 비늘을 조각한 말라카이트가 어우러져 이국적인 무드를 완성한다. BVLGARI.


이글거리는 태양을 형상화한 듯, 18K 옐로 골드가 중심을 감싸며 역동적인 곡선을 그리는 ‘쟌 슐럼버제 바이 티파니 아폴로’ 브로치. 돔 형태의 플래티넘 위로 라운드 브릴리언트 컷 다이아몬드를 촘촘히 세공해 찬란한 생명력을 더했다. TIFFANY & CO.


어벤추린 위에 18K 핑크 골드로 황소자리를 입체감 있게 조각한 ‘조디악 타우루스’ 롱 네크리스, 블루 쿼츠 바탕에 18K 로즈 골드로 게자리를 양각해 묘사한 ‘조디악 켄서’ 롱 네크리스. 대자연과 천문학의 경이로운 조화를 예찬한다. VAN CLEEF & ARPELS.



직관과 깊은 지식을 상징하는 나방의 날갯짓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빠삐용 드 뉘’ 링. 머더오브펄을 조각한 날개에 블랙 래커와 다이아몬드를 더해 재생의 상징을 섬세하게 표현했다. BOUCHERON. 담쟁이덩굴을 닮은 잎들이 모여 있는 아이비제라늄 4T.



WRITER 윤성원 주얼리 히스토리언이자 한양대 공학대학원 보석학과 겸임교수. <나 는 금 대신 보석을 산다>, <젬스톤 매혹의 컬 러>, <세계를 매혹한 돌> 등을 집필했으며 주 얼리의 역사, 보석학적 정보 등 모든 분야를 융합적으로 다루고, 나아가 보석업계의 인재 양성에 기여하고 있다.


COOPERATION 까르띠에(1877-4326), 반클리프 아펠(1877-4128), 불가리(6105-2120), 부쉐론(080-822-0250), 부첼라티(6905-3490), 오스카 헤이만(@oscarheyman), 티파니(1670-1837), 4T(@4t___offic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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