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왼쪽부터 시계 방향) 달래, 해방풍나물, 참두릅, 원추리나물, 방풍나물, 곰취, 당귀, 돌나물, 세발나물
아직 찬 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이른 봄, 한국인의 밥상에는 해마다 어김없이 돌아오는 것들이 있다. 달래, 냉이, 쑥, 두릅, 고사리, 취나물. 이름만 들어도 서늘한 산바람과 촉촉한 흙냄새가 먼저 느껴지는 것들. 봄나물은 계절이 사람에게 건네는 첫인사였고, 한국인은 수천 년 동안 그 인사에 응답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봄나물의 역사는 문헌보다 훨씬 깊은 곳에서 시작된다. 벼농사와 밭농사가 자리를 잡기 이전,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은 해마다 긴 겨울이 끝날 무렵 들과 산으로 나가 땅이 내미는 첫 싹을 거두었다. 이른바 '채취'의 지혜, 그것은 단순한 생존 기술이 아니라 자연의 리듬을 몸으로 체득하는 일종의 수련이었다. <동의보감東醫寶鑑>에서는 냉이를 “성질이 따뜻하고 독이 없으며, 죽을 쑤어 먹으면 피가 되어 간으로 들어가 눈을 밝게 한다”고 기록했고, 쑥을 “성질이 따뜻하고 독이 없어 온갖 오래된 병을 다스린다”고 분류했다.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에는 두릅과 고사리가 잡채의 재료로 등장하며, 그 조리의 결이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조리법이 수백 년을 건너 거의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세계 대부분의 식문화에서 채집 식물은 약초나 향신료 등 제한적으로 쓰이지만 한국은 달랐다. 데치고 무쳐 밥상 위에 올리는 ‘나물’이라는 조리 체계는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어선 안 되는 것을 수천 년에 걸쳐 가려내며 쌓아 올린 경험의 산물이었다.

더 그린테이블 나물 피클 제철 나물을 깨끗하게 손질해 담근 나물 피클. 냉이, 달래, 돼지감자, 해방풍나물 등을 함께 넣고 담근다.
선조가 기억하는 봄의 맛
봄나물은 종류에 따라 저마다의 시간을 간직하고 있다. 냉이와 달래는 눈이 채 녹기도 전에 얼음 밑에서 뿌리를 키우는 것들이다. 손이 시릴 만큼 차가운 밭에서 캐낸 냉이는 향이 가장 짙고, 달래는 차가운 흙 속에서 매운 기운을 농축시킨다. 쑥은 그보다 조금 늦게, 밟힐수록 더 강하게 올라오며 봄의 한가운데를 알린다. 두릅과 고사리는 산이 본격적으로 깨어나는 시절, 짧고 결정적인 순간에만 채취할 수 있다. 그 타이밍을 놓치면 1년을 기다려야 했다. 봄나물을 안다는 것은 곧 시간을 읽는 감각을 가졌다는 뜻이었고, 그 감각은 마을의 여자들이 함께 광주리를 들고 들로 나가는 풍경 속에서 세대를 건너 전해졌다. 김장이 겨울 공동체의 의례였다면, 봄나물 채취는 봄 공동체의 축제였다. 누가 어느 언덕에서 냉이를 발견했는지, 올해 고사리가 어느 산에 많은지. 그 정보는 마을 안에서 조용하고 자연스럽게 공유되었다. 이러한 공동체의 기억은 정월대보름 밥상에도 새겨져 있다. 음력 정월 열닷새, 사람들은 고사리·도라지·시래기·취나물처럼 전해 가을에 거두어 말려둔 건나물을 오곡밥과 함께 먹었다. 묵은 것을 소진하며 새 생장을 기다리는 이 의례는 봄나물이 본격적으로 땅을 뚫고 오르기 직전의 마지막 인내이자 봄을 향한 조용한 기다림이었다. 두릅을 꺾어 이웃과 나누고, 쑥을 뜯어 떡을 만들어 건네는 행위 안에는 ‘당신의 계절도 잘 시작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봄나물은 자연과 인간 사이의 계약인 동시에, 인간과 인간 사이의 언어였다.
오늘날 봄나물은 마트의 포장 채소 코너에서도 찾을 수 있다. 제철이 아니어도, 산에 가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그렇게 쉽게 손에 넣은 봄나물에는 무언가가 빠져 있다. 기다림이 없기 때문이다. 봄나물이 특별한 이유는 영양 성분표에 있지 않다. 겨울을 견디고 비로소 허락되는 것이라는 사실에 있다. 냉이된장국 한 그릇 앞에서 한국인이 느끼는 감각은 단순한 식욕이 아니라 해마다 돌아오는 봄을 맞이하는 의식에 가깝다. 우리가 그것을 캐고 무치고 나누는 한, 선조가 새겨놓은 봄의 문법은 여전히 유효하다.

봄나물 구절판 (하얀색부터 시계 방향) 삼채, 땅두릅, 돌나물, 취나물, 전호나물, 원추리나물, 참두릅, 세발나물, 방풍나물을 각 특성에 맞게 손질하거나 데친 뒤 한 입 크기로 잘라 접시에 담아낸 봄 메뉴. 밀전병을 부쳐 간장 양념장과 함께 곁들인다.
“제 요리는 프렌치를 했던 사람이 한국 식재료를 계속 접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음식이라고 생각해요. 그걸 알아봐주시는 손님이 있으면 정말 행복하죠.”
더 그린테이블 김은희 셰프

관자를 곁들인 곰취 주꾸미말이 살짝 데쳐 들기름과 간장으로 버무린 원추리나물과 주꾸미를 데친 곰취 위에 올려 김밥처럼 말아낸 메뉴. 팬 프라이한 관자와 버터 소스를 곁들이고 쑥갓 오일로 마무리한다.
김은희의 요리, 더 그린테이블
서울 원서동에 자리한 더 그린테이블은 한국의 제철 식재료를 요리의 출발점으로 삼는 곳이다. 2009년 방배동에서 처음 문을 열고 압구정동을 거쳐 지금의 원서동에 자리를 잡기까지 17년째 이 원칙을 지켜온 김은희 셰프. 미국 CIA에서 요리를 배우고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프렌치의 테크닉 위에 한국 식재료의 결을 얹은 자신만의 요리를 만들어가고 있다. “저도 제 요리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프렌치도 아니고 한식도 아닌데, 그렇다고 ‘김은희의 요리’라고 말하기도 아직은 조금 부끄럽고요. 그냥 프렌치를 했던 사람이 한국 식재료를 계속 접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음식이라고 생각해요. 그걸 알아봐주시는 손님이 있으면 정말 행복하죠.”
그가 2006년 한국에 돌아와 가장 먼저 한계에 부딪친 것은 외국에서 쓰던 식재료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스스로가 너무 재수 없게 느껴지더라고요. ‘이럴 거면 외국에서 요리하지 뭐 하러 한국에 왔지?’ 싶고요. 그때부터 농장을 찾아다니기 시작했어요. 농부들을 만나보니까 자기 인생을 걸고 농사짓는 모습이 정말 멋있는 거예요. 이 식재료들로 음식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소개해야겠다고 결심했죠. 지금 제가 로컬 식재료를 많이 사용하는 것도 그렇게 시작된 것입니다.”
한식의 기본이 되는 궁중 음식과 사찰 음식을 익힌 지 어언 10년째. 작년에는 처음으로 장을 담갔다. 천진암의 장독대에서 간장과 된장을 숙성시키며 보낸 그 시간은 단순히 장을 배우는 것을 넘어 식재료를 시간으로 이해하는 과정이었다. 올해는 다도를 시작할 예정이다. “요리에 대한 생각이나 태도는 계속 변화하는 것 같아요. 매일 가게에 있으면서 요리를 하다 보면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밖에 안 하게 됩니다. 그래서 명상을 하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하고, 또 무언가를 배우러 다니기도 해요. 그런 것들이 결국은 모두 요리를 잘하기 위한 과정이죠. 화가가 그림을 위해 사색하는 시간이 있듯이 요리사도 그런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믿어요.” 그 배움은 나물을 만났을 때 더욱 자유롭게 펼쳐졌다. 한식 요리사가 아니었기에 더욱 가능했던 일. 간장과 고추장 대신 올리브유에 버무리거나 버터 소스에 넣어 살짝 익히는 것만으로도 나물은 전혀 다른 얼굴을 드러냈다. “대부분의 나물에는 약한 독성이 있습니다. 복어를 다루는 요리사가 독을 합당하게 손질하듯 나물도 그래요. 사찰 음식을 배우면서 스님들한테 자연스럽게 익힌 거예요. 겨울 땅을 뚫고 나와 생명력이 강한 만큼 손질이 잘못되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거든요.” 어떤 것은 생으로 먹어도 되지만 어떤 것은 반드시 데쳐야 하며, 단오가 지나면 독성이 강해져서 봄나물은 더 이상 먹지 않는 게 좋다고.
나물을 깊이 알수록 다룰 수 있는 방식도 넓어졌다. 더 그린테이블 지하 냉장고에는 사계절 피클 통이 가득 쌓여 있다. 그 계절에 가장 맛있는 채소로 담근 것들이 차곡차곡 층을 이루며, 봄이면 어김없이 봄나물 피클이 그 자리를 채운다. 냉이와 달래, 고들빼기까지 피클로 담근다. 나물 특유의 향은 살리면서 쓴맛은 부드럽게 가라앉는다. 절이고 발효시키는 방식은 그의 요리 안에서 한식과 프렌치의 경계를 가장 조용히 허무는 지점이었다. 이번 촬영을 위해 준비한 요리도 그 연장선이었다. “봄나물과 주꾸미, 관자를 곁들인 봄 애피타이저인데요. 살짝 데친 주꾸미를 곰취로 감싸 돌돌 만 다음 구운 관자와 바지락 육수로 만든 버터 소스를 곁들였어요. 마무리는 쑥갓 오일로 했고요. 그동안 틈틈이 배우고 익힌 것을 이제는 좀 더 자신 있게 손님께 보여드리고 싶어요.” 17년이 쌓인 자리에서 계절마다 땅이 내미는 것들을 가장 솔직하게 담아내는 방식으로 김은희의 요리는 계속되고 있었다.

COOPERATION 더 그린테이블(591-26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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