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 2026년 4월호

신뢰로 잇는 독일과 한국

주한독일상공회의소 마리 안토니아 폰 쉔부르크 대표가 반복해온 일은 단순히 기업과 기업을 연결하는 것보다 그 연결이 지속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에 가깝다. 신뢰는 개방적인 태도와 상호 존중, 그리고 장기적인 헌신 속에서 차곡차곡 쌓인다는 것이 그녀의 변하지 않는 전제다.

EDITOR 김민지 PHOTOGRAPHER 이경옥

스페인 카탈루냐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마르타 후반테니 콜렐Marta Juvanteny Colell의 작품. 수많은 작은 점으로 완성된 표면 위로 미묘하게 변화하는 색채가 특징이다. 그가 처음 구입한 예술품으로서 의미가 크다.


마리 안토니아 폰 쉔부르크 주한독일상공회의소 대표. 스페인과 스리랑카의 독일상공회의소를 거쳐 2024년 4월 한국에 부임했다. 에너지 전환, 인재 육성, 여성 리더십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한독 경제협력을 이끌고 있다.


마리 안토니아 폰 쉔부르크 대표는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국제 협력은 더 중요해지지만 그와 동시에 더 섬세하고 전략적인 접근이 요구된다”고 말한다. 국제 비즈니스는 정해진 해법을 적용하는 일이 아니라, 상대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상황에 맞게 조율하면서 시간을 들여 신뢰를 쌓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유럽의 성숙한 시장과 신흥 경제국, 빠르게 변화하는 아시아를 넘나들며 그가 거듭 확인한 것도 바로 그 사실이었다. 어떠한 시장도 동일한 방식으로 움직이지 않으며, 규제 환경이나 비즈니스 문화가 다르더라도 그 차이를 인정하고 그 안에서 현실적인 해법을 찾아갈 때 비로소 지속 가능한 파트너십이 만들어진다는 것. 이러한 시각은 일찍부터 형성되었다. 학생 시절 미국과 아일랜드에서의 생활은 다양한 사고방식과 일하는 문화, 리더십 스타일을 자연스럽게 접하게 했다. 스페인 독일상공회의소에서 커리어를 시작한 그녀는 국제 비즈니스와 경제협력의 기본을 익히며 단기적 성과보다 ‘지속 가능성’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처음으로 깊이 이해했다. 이후 스리랑카 독일상공회의소로 자리를 옮겼을 때는 마침 경제 위기의 한복판이었다. 위기 속에서 유연함이 얼마나 중요한지, 문화적 차이를 존중하는 태도가 조직 운영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몸으로 익힌 시간이었다. 리더십은 결국 사람 중심이어야 한다는 확신도 그때 생겼다.

2024년 4월, 주한독일상공회의소 대표로 부임한 그가 이끄는 일은 단순한 기업 지원을 훨씬 넘어선다. 해상 풍력과 전력망 현대화 같은 에너지 전환 분야에서 독일 기업과 한국 파트너를 연결하고, 독일식 이원 직업훈련 프로그램 ‘아우스빌둥Ausbildung’으로 첨단 제조와 모빌리티 분야 인재를 함께 키우기도 한다. 2018년부터는 여성 리더십 플랫폼 ‘우먼 인 코리아Women in KoRea(WIR)’를 통해 포용적 리더십 문화를 확산시키고 있다. 오는 10월 서울에서 개최될 아시아·태평양 독일 비즈니스 콘퍼런스(APK)도 그가 준비하는 무대. 기업과 정부, 연구기관을 한자리에 모아 전략적 목표를 현실의 협력으로 연결하는 것이 그의 주된 업무다. 그가 강조하는 문화에 대한 이해, 그리고 장기적 관점을 바탕으로 만들어나갈 독일과 한국 사이의 단단한 가교가 더욱 기다려지는 이유다.


WHERE TRUST BECOMES PARTNERSHIP

빠른 실행력의 한국과 철저한 준비의 독일, 서로 다른 두 나라의 강점을 잇는 일을 업으로 삼은 주한독일상공회의소 대표 마리 안토니아 폰 쉔부르크. 그가 애정하는 브랜드와 소장품에는 화려함보다 깊이를 택해온 가치관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밀레Miele 1899년 설립된 독일 프리미엄 가전 브랜드로 세탁기, 식기세척기, 오븐 등 하이엔드 가전 분야에서 높은 내구성과 정밀한 기술력으로 잘 알려져 있다. ‘Immer Besser(항상 더 나은)’라는 철학 아래 수명이 길고 품질이 뛰어난 제품을 선보이고 있다.


주한독일상공회의소 대표로 부임하면서 느낀 한국의 첫인상은 어땠나요? 기술이나 비즈니스, 일상 전반에서 놀라울 만큼 빠르게 움직이면서도 역사와 문화, 공동체에 대한 존중이 매우 강한 나라라고 느꼈어요. 또한 미래지향적인 모습과 전통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는 점이 정말 독특했습니다. 특히 비즈니스 현장에서 만난 분들의 높은 전문성과 회복력, 그리고 큰 포부가 인상 깊었습니다. 디지털 전환이나 에너지 전환 같은 복잡한 과제들을 함께 해결해나가려는 강한 의지를 느꼈어요. 개인적으로는 일상에서 마주치는 따뜻한 환대가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한국어를 배우면서 동료들과 더 가까워질 수 있었고, 대화 속에 담긴 미묘한 뉘앙스를 이해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됐어요.


주한독일상공회의소가 단순한 기업 지원 이상의 기관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역할을 어떻게 정의하시나요? 기업과 기업을 잇는 가교이자 정책 결정자이면서 산업계, 더 나아가 사회를 연결하는 플랫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희는 단순히 개별 기업을 지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독일과 한국의 이해관계자들이 신뢰를 바탕으로 편안하게 대화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왔습니다. 기후 전환, 디지털화, 공급망 안정성, 인구구조 변화 같은 글로벌 과제에 공동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연결하는 역할이죠. 특히 에너지 전환 분야에서는 해상 풍력, 수소, 전력망 현대화 같은 영역에서 독일 기술 기업들과 한국 파트너를 연결해왔습니다. 기업과 정부, 연구기관을 한자리에 모아 전략적 목표를 실제 프로젝트와 투자로 이어주는 것이 저희의 중요한 역할입니다.


(왼쪽부터) 버디 베어Buddy Bear 베를린을 상징하는 대표적 조형물이다. 두 팔을 벌린 곰의 형상은 친근함과 낙관주의를 의미하며 좋은 에너지를 전해준다. 전 세계 호텔 로비와 오피스 공간, 독일대사관 앞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디른들Dirndl 구조적인 실루엣과 섬세한 디테일의 우아한 매력을 지닌 독일 전통 의상. 뮌헨에서 구입한 것으로 스페인 독일상공회의소 100주년 기념 만찬을 위해 마련한 것이다. 만찬 장소에 스페인 국왕 펠리페 6세가 참석해 더욱 뜻깊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왼쪽부터) 빌레로이앤보흐Villeroy & Boch 1748년에 설립된 브랜드로 테이블웨어와 욕실 세라믹 분야에서 오랜 전통을 이어왔다. 클래식한 디자인과 현대적 감각을 조화롭게 결합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사진 속 제품은 지인이 직접 디자인에 참여해 개인적인 의미 또한 크다. 바이에른 전통 수공예 원목 상자 전통 바이에른 플로럴 모티프로 채색한 둥근 원목 상자. 남부 독일 특유의 따뜻함과 장인 정신을 담고 있다. 지역 정체성을 지켜가는 가치를 의미하는 존재다.


독일 기업들이 한국 시장 진출 시 마주하는 현실적인 장벽은 무엇인가요? 한국은 혁신 수용도가 높고 산업 생태계도 잘 구축되어 있어 장기적으로 매우 중요한 시장입니다. 다만 초기 진출 단계에서는 여러 과제에 직면합니다. 한국은 안전과 품질, 소비자 보호 기준이 매우 높아 유럽에서 이미 인증을 받은 제품이라 하더라도 별도의 등록이나 인증이 필요한 경우가 많아요. 규제 대상 품목이나 소비재의 경우 표시 기준과 서류 요건도 매우 구체적이어서 초기 단계부터 관계 당국과 긴밀히 소통하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독일 기업들의 철저한 준비와 장기 계획, 한국 파트너들의 빠른 실행력과 유연성 같은 서로 다른 강점을 잘 결합할 때 가장 큰 시너지가 만들어지지요.


WIR는 여성 리더십 플랫폼인데, 상공회의소에서 이를 운영한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한독 비즈니스 커뮤니티 안에서 여성 대표와 임직원들과 오랫동안 교류하면서, 리더십의 과제가 개인의 노력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이 점점 분명해졌습니다. 조직 문화와 커리어 구조 같은 요소들이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이 들었죠. 그래서 2018년에 단발성 프로젝트가 아닌 장기 플랫폼으로 Women In KoRea(WIR)를 출범했습니다. ‘위어’라고 읽으며 독일어로 ‘우리’를 뜻해요. 성별, 세대, 지리라는 세 축을 중심으로 여성 최고 중역들과 경력 2~10년의 주니어 임직원들을 함께 묶어 1년 단위로 멘토십을 진행합니다. 글로벌 기업과 한국 기업, 스타트업, 학계, 공공기관의 여성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국제적 커뮤니티이기도 해요. 멘토링과 대화, 문화 간 교류가 생각보다 훨씬 큰 변화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현장에서 직접 체감하고 있습니다.



<KOREA>, 사라 헨케Sarah Henke 한국의 문화적 정신과 예술적 유산, 현대적 정체성을 시각적으로 담아낸 책이다. 사진 작업에 참여한 얀 브레트슈나이더Jan Brettschneider에게 선물받은 것. 한국의 풍경과 디자인, 전통과 사람들의 역동성을 예술적 시선으로 보여준다.


성공적인 국제 협력의 가장 중요한 전제 조건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국제 협력의 출발점은 결국 상호 신뢰입니다. 신뢰는 하루아침에 형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개방적인 태도와 서로에 대한 존중, 그리고 장기적인 파트너십에 대한 꾸준한 헌신을 통해 쌓여가는 것이죠. 특히 불확실한 시기에도 일관된 태도를 유지할 때 협력 관계는 더욱 굳건해집니다. 많은 독일 기업이 아시아 금융 위기와 같은 어려운 시기에도 한국 시장에 대한 투자를 유지해온 것이 좋은 예입니다. 단기적인 철수보다 지속적인 파트너십을 중시하는 그 연속성이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긴밀한 협력 관계의 토대가 되었어요. 여러 나라와 이해관계자가 얽힌 환경에서는 다양한 주체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솔직하게 의견을 나누며 현실적인 타협점을 찾는 과정이 결국 가장 효과적인 지름길임을 느꼈습니다.


한국에서 인상 깊었던 문화적 경험을 꼽아주신다면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민진 작가의 <파친코>가 오래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정체성과 회복력, 재외 한인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국제적인 맥락에서도 깊이 공명했습니다. 드라마 <미생>은 직장 문화를 이해하는 데 교과서 같은 작품이었고요. BTS는 예술적 혁신성과 사회적 메시지를 함께 담아낸다는 점에서 인상적입니다. 한국의 소프트 파워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해요. 무엇보다 한국어를 배우기로 한 결정이 제게 가장 보람 있는 선택이었습니다. 언어는 문화와 사람을 향해 열리는 문이니까요. 이런 경험들은 양국 간 신뢰와 공감을 쌓아가는 데 꼭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메르세데스-벤츠Mercedes-Benz 1886년 카를 벤츠의 자동차 발명에서 시작된 브랜드로 럭셔리 자동차의 역사와 함께 발전해왔다. 정교한 엔지니어링과 혁신 기술을 바탕으로 프리미엄 자동차 시장을 대표하는 글로벌 브랜드로 평가된다.


대표님께서 생각하시는 진정한 럭셔리란 무엇인가요? 오늘날의 진정한 럭셔리는 더 이상 희소성이나 물질적인 가치만으로 정의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그보다는 시간과 진정성, 그리고 다양성에 더 가까워진다고 느껴요. 잠시 속도를 늦추고 사람과 문화와 깊이 있게 교류하며, 자신의 가치관을 반영한 선택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진정한 럭셔리지요. 직업적인 관점에서도 럭셔리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열린 대화가 가능하고 다양성이 존중되며 국경을 넘는 협업이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환경에서 일할 수 있다는 것, 장기적인 비전을 공유하는 파트너들과 함께한다는 것 또한 저에게는 의미 있는 럭셔리입니다.


한국의 리더와 젊은 세대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요? 자신감과 개방성, 그리고 장기적인 시각을 갖고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세상은 더 촘촘히 연결되고 있으며, 동시에 훨씬 복잡해지고 있어요. 국제 무대에서 오래 살아남는 분들은 업무 능력을 넘어 문화적 감수성과 전략적 인내심, 신뢰를 쌓으려는 진정성을 함께 갖춘 경우가 많습니다. 젊은 세대에게는 커리어 초반부터 다양한 해외 경험을 해보길 권합니다. 아우스빌둥이나 기업 교환 프로그램, 다국적 프로젝트 등을 통해 서로 다른 제도와 문화를 직접 경험하는 것이 어떤 스펙보다 큰 자산이 됩니다. 한국의 눈부신 산업 성장은 국제 협력에 대한 개방성 위에서 이뤄졌고, 앞으로의 경쟁력도 그 파트너십을 더 깊게 만드는 데 달려 있습니다. 신뢰할 수 있는 글로벌 파트너들과 함께 지속 가능한 세계경제를 만들어가는 주역이 되시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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