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왕의 시계라 불리는 ‘레인 드 네이플’ 컬렉션 ‘8908BB’ 워치. 에그 셰이프 골드 케이스에
화이트 머더오브펄 다이얼을 매치하고 안쪽 테두리와 베젤에 128개의 다이아몬드를 세팅했다. BREGUET.
브레게, 주머니 속 시계를 손목 위로 옮기다
19세기 초, 브레게 시계의 열렬한 팬이었던 나폴리의 왕비이자 나폴레옹의 여동생 카롤린 뮈라Caroline Murat는 시대를 앞서간 선구자다. 지성과 문학적 소양을 갖춘 그는 예술의 후원자이자 우아한 수집가였다. 또 당시 유럽 왕실 여성들이 상징적 존재에 그쳤던 것과 달리, 정치·행정·문화 전반에 주도적으로 개입하며 사실상 공동 통치자에 가까운 역할을 했다. 나폴레옹 체제 붕괴 속에서도 운명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능력을 활용할 줄 알았던 전략가이자 트렌드를 선도하는 인플루언서이기도 했다. 그런 카롤린 뮈라에게도 ‘왕들의 시계’로 불리던 브레게는 매력적이어서 무려 34점이 넘는 브레게의 시계를 소장했다.
당시 시간 관리는 남성의 영역이라는 인식 때문에 시계라는 물건은 남성적 물건이었고, 시간을 자주 확인하는 여성은 매너가 없거나 조급한 성격으로 취급받았다. 남자들은 회중시계를 주로 사용했고, 여성들은 길게 늘어지는 소투아르 네크리스나 브로치, 반지에 시계를 숨겨 사용하곤 했다. 공적인 자리에서 여성이 시계를 사용하는 것은 품위에 어긋나는 일이라 시계를 장신구로 위장한 것이다. 그래서 카롤린 뮈라가 브레게에 세계 최초의 손목시계를 의뢰한 일은 ‘여성도 시간을 능동적으로 관리한다’는 개혁적 선언이었다.
이는 1810년으로, 세상에 선보인 적 없는 세계 최초의 손목시계 제작에 무려 2년이나 걸린 것이 문서로 기록되어 남아 있다. 이뿐만 아니라 1849년과 1855년에 진행한 해당 시계의 수리 작업 이력과 특징도 확인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실물은 사라졌지만 아카이브에 따르면 이 시계는 길쭉한 장방형의 실버 기요셰 다이얼에 쿼터 리피터, 문페이즈, 온도계 같은 여러 컴플리케이션을 갖췄다고 전해진다. 또 금실로 엮은 형태의 브레이슬릿으로 마무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왕비의 손목 위로 시계가 자리를 옮겨갔음에도 남자들의 시계는 여전히 포켓 안에 있었고, 손목시계는 당시 ‘여자들이나 차는’ 물건으로 치부되기도 했다.
이 도전적인 시계에서 영감받아 탄생한 컬렉션이 바로 우아한 여성 시계의 대명사, ‘레인 드 네이플Reine de Naples’이다. 오늘날 이 컬렉션은 기요셰 장식 위에 머더오브펄 다이얼을 더한 클래식한 모델부터 부드러운 톤과 다채로운 컬러를 입힌 디자인까지 폭넓은 스펙트럼으로 전개한다. 일부 모델은 스노 세팅 기법으로 완성한 눈부신 챕터 링이 눈길을 끌기도 하고, 아브라함-루이 브레게가 고안한 포켓 워치에서 착안한 상징적인 모티프가 블랙 미닛 트랙 위에서 디테일의 깊이를 더하기도 한다. 브레게를 대표하는 오픈 팁 핸즈는 시와 분을 확인하는 시선을 한 번 더 잡아두고 6시 방향에 세팅한 페어 컷 다이아몬드는 타임피스에 한층 시적인 우아함을 부여한다. 이로써 레인 드 네이플 컬렉션은 브레게가 단지 기술의 거장이 아니라 아름다움의 창조자이며, 여성 해방의 아이콘이기도 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최초의 손목시계를 브레게에게 의뢰한 카롤린 뮈라의 초상화.

카롤린 뮈라의 브레게 손목시계
주문 제작 기록.

ARCHIVES CARTIER, © CARTIER
알베르토 산토스-뒤몽.

ARCHIVES CARTIER, © CARTIER
(왼쪽부터) 1907년 No.15 비행기와 함께한 산토스-뒤몽의 모습. 1911년의 산토스 뒤몽 워치 스케치.
여성 손목시계 100년 후, 남성의 ‘도구’가 되다
루이-프랑수아 까르띠에Louis-François Cartier의 절친인 알베르토 산토스-뒤몽은 브라질 커피 거상의 아들이자 파일럿이었다. 그는 전 세계 비행 경주에 자주 참가해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고, 언젠가는 모든 이가 비행선으로 여행할 것이라고 말해왔다(실로 그의 말이 현실이 되었다). 게다가 이 모험가는 소형 비행선을 가로등에 묶어놓고 샴페인을 마시거나, 사람들에게 공중을 체험하게 하기 위해 루이의 아파트 천장에 테이블과 의자를 매달아 식사를 제공하려고 하는 등 기발한 면도 있었다. 키가 160cm 정도로 체구가 작고 왜소했다는 산토스-뒤몽에게는 성공적인 실험이었지만 많은 손님이 참석한 저녁 만찬에서는 천장이 무너지고 말았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회자되는 것을 즐기는 타입이었던 산토스-뒤몽 역시 당대의 인플루언서였다. 루이는 이 엉뚱하고 모험심 넘치는 친구가 비행 중 안전하게 시간을 볼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그때 많이 사용하던 회중시계는 조정대를 놓지 않고는 주머니에서 꺼내 보기 어려웠다.
당시 까르띠에의 회중시계는 얇고 균형 잡힌 비율 덕분에 조끼 주머니에 매끄럽게 들어갔고, 손에 쥐었을 때의 묵직한 안정감 또한 뛰어났다. 하지만 루이는 친구의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해법을 구상했다. 그가 떠올린 해답은 ‘손목 위의 시계’였다.
그러나 문제는 인식이었다. 손목시계가 여전히 여성의 전유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물론 보어전쟁 같은 전장에서 군인들이 회중시계에 가죽 스트랩을 연결해 손목에 차는 경우가 있었지만, 루이는 까르띠에만의 우아한 문법을 이 혁신품에 담고 싶었다. 1904년, 그는 완전히 새로운 디자인의 도구를 완성했다. 금 베젤로 둘러싼 정사각형 다이얼을 중심으로 케이스 상하에 러그를 더하고, 짙은 색상의 브레이드 가죽 스트랩을 견고하게 결합했다. 측면에는 사파이어 카보숑을 세팅한 용두 장식으로 보석 세공 하우스로서의 정체성도 놓치지 않았다. 바로 남성용 손목시계의 효시, ‘산토스 드 까르띠에’의 시작이다.
루이는 손목시계를 둘러싼 대중의 인식을 바꿔야 하는 도전에 직면했지만, 다행히도 최고의 홍보대사가 곁에 있었다. 언론과 사교계에 자주 등장하는 산토스-뒤몽의 손목에는 언제나 이 시계가 채워졌을 테니 말이다. 손목시계가 남성들 사이에서 본격적으로 대중화되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했지만, 역설적으로 전쟁이 그 변화를 앞당겼다. 전장에서 즉각적인 시간 확인이 중요해지면서 손목시계는 실용적 도구로 자리 잡았고, 이는 현대 손목시계의 시대를 여는 서막이 되었다.

(왼쪽부터) PHOTO : NICK WELSH,
CARTIER COLLECTION,
© CARTIER 1912년의 산토스 뒤몽 워치.
PHOTO : VINCENT
WULVERYCK, COLLECTION
CARTIER, © CARTIER 1916년의 산토스 뒤몽 워치.
시간이 흘러도 디자인적 코드는
크게 변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오리지널 디자인의 정체성을 이어받은 ‘산토스 드 까르띠에’ 컬렉션의 ‘산토스 뒤몽’ 엑스트라 라지 워치. CARTIER.
COOPERATION 까르띠에(1877-4326), 브레게(6905-3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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