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 2026년 3월호

선조가 쌓아 올린 지혜의 축적, 김치

한식은 지금 전 세계에서 새로운 시선으로 읽히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지금의 한식을 이해하기 위해 그 출발점을 다시 살펴보고자 한다.
그 두 번째 이야기는 ‘김치’다.

EDITOR 김민지 PHOTOGRAPHER 김잔듸


2026년 1월, 미국 보건복지부(HHS)와 농무부(USDA)가 공동 발표한 ‘2025~2030 미국인을 위한 식단 지침’은 “진짜 음식Real Food을 먹으라”는 담백하지만 강력한 화두를 던졌다. 가공식품의 범람 속에서 장내 미생물 생태계microbiome를 인류 건강의 새로운 중심축으로 설정한 이번 지침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단연 ‘김치’의 등장. 사우어크라우트sauerkraut, 케피어kefir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고섬유질 식품과 함께 섭취할 것을 권고받은 김치는, 이제 특정 문화권의 솔soul 푸드를 넘어 전 지구적 건강 식단의 보편적 문법으로 편입되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하나의 본질적인 질문과 마주한다. 김치는 언제부터 ‘로컬 발효 음식’이라는 외피를 벗고 ‘보편적인 건강의 언어’로 읽히기 시작했을까. 그 이면에는 단순히 맛의 유행이 아닌, 유구한 시간 동안 묵묵히 쌓아 올린 지혜의 축적이 자리하고 있다. 한국인에게 김치를 담근다는 행위는 단순한 조리를 넘어 계절의 호흡을 읽고 시간을 갈무리하는 고유한 삶의 방식이었다. 밭에서 배추와 무를 길러내는 기다림부터 소금에 절이고 양념을 버무려 발효와 저장에 이르기까지, 김치는 늘 자연의 리듬과 궤를 같이했다. 그것은 결코 서두르는 법이 없는 음식이었으며, 관찰과 반복, 인내를 전제로 하는 정교한 식문화였다. 그 과정에서 익어가는 것은 비단 배추만이 아니었다. 그 안에서는 계절에 대한 예민한 감각과 공동체의 질서가 함께 농익어갔다.



소고기 유자로 속을 채운 오이선 오이소박이에서 영감을 받은 메뉴. 유자와 함께 조린 소고기를 새콤하게 절인 오이에 소처럼 넣고, 동치미와 소고기 육수를 섞어 함께 곁들여 낸다. 달걀노른자는 소금과 설탕을 섞어 큐어링해 수분을 뺀 뒤 갈아 올려 완성한다.


지금의 김치가 있기까지

김치의 뿌리는 삼국시대 이전, 채소를 소금에 절여 저장하던 ‘침채沈菜’의 지혜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는 한반도가 이미 아득한 옛날부터 발효와 저장을 일상의 기술로 체득했음을 증명한다. 조선 전기에 편찬된 <산가요록>과 <수운잡방> 속 기록은 김치의 원형이 어떠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당시의 김치는 무, 순무, 오이, 가지 등을 소금에 절인 백김치 형태였다. 젓갈보다는 소금과 물을 중심으로 한 담백한 맛, 그것은 혹독한 겨울을 나기 위해 채소의 생명력을 보존하려 했던 농경 사회의 치열하고도 정갈한 생존 전략이었다. 김치는 17세기를 기점으로 극적인 변화를 맞이한다. 임진왜란 이후 고추가 한반도에 정착하면서 김치는 비로소 시각과 미각의 화려한 변주를 시작했다. 지역의 풍토와 계절의 리듬에 따라 수만 가지 형태로 분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규합총서>와 <증보산림경제> 등에 기록된 배추김치와 깍두기, 동치미의 상세한 제조법은 오늘날 우리가 즐기는 김치의 원형이 이 시기에 이미 정교하게 완성되었음을 시사한다. 산업화와 도시화의 물결 속에서 김치는 한때 ‘집’이라는 근거지를 떠나 규격화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오늘날 김치는 장내 미생물과 발효, 지속 가능한 식문화라는 현대 과학의 언어로 화려하게 재소환되고 있다. 김치와 김장 문화는 2013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으로 등재되었고 2017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올해 초 미국의 국가 식단 지침에 김치가 이름을 올린 이유는 어쩌면 명확하다. 김치는 아주 오래전부터 자연과 인간, 시간과 공동체가 유기적으로 빚어낸 발효의 정점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 유구한 시간의 기록은 국경을 넘어 인류에게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다. 김치는 박제된 과거의 유산이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전 세계의 식탁 위에서 현재진행형으로 발효 중인 살아 있는 문화다.





“김치는 육수처럼 쓰이고, 소스의 구조가 되며, 질감을 바꾸는 역할을 합니다. 동치미의 산으로 크림을 응고시키고, 나박김치 국물의 발효 산으로 생선을 익혀 세비체처럼 구성하지요. 김치는 하나의 식재료인 동시에 요리의 조화를 이끄는 기능적 열쇠입니다.”



배추쌈 돼지고기를 싸 먹는 보쌈에서 착안한 메뉴. 떡갈비와 묵은지를 배추 안에 넣고 말아 부드럽게 익혀낸 메뉴. 녹진한 간장 소스와 함께 곁들여 먹는다. 이곳에서 사용하는 대다수의 기물은 연호경 작가와 협업해 만든 것이다.


김치튀김 김치 양념에 들어가는 소 재료에서 착안해 만든 메뉴. 새우젓 대신 새우에 고춧가루, 마늘, 액젓 등을 버무린 뒤 백김치에 롤처럼 말아 튀겨냈다. 위에는 동치미 사워크림을 국수처럼 올려 완성했다.


색다른 김치의 모색 ‘온 6.5’

파리에서 한식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이정수 셰프의 방향은 이미 정해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르 코르동 블루를 다닐 당시 파리에는 한식당이 200곳가량 있었지만, 한국인 셰프가 주방을 책임지는 곳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외려 그 현실이 한식을 새롭게 보게 만들었다. “외국에서 하는 한식이 너무 재미있었어요.” 설명해주어야 하는 음식, 당연하지 않은 음식이 되었을 때 한식은 전혀 다른 얼굴을 드러냈다. 독일식 절임 채소인 사우어크라우트에 고춧가루를 더해 끓이면 김치찌개와 닮은 맛이 난다는 사실, 서양에도 발효 채소와 산의 언어가 이미 존재한다는 감각. 김치는 배추라는 특정 재료에 갇힌 음식이 아니라 발효와 산, 시간의 축적이라는 방식에 가깝다는 생각이 그때부터 자리 잡았다. 그래서 그는 한식을 하기로 결심했다. 프렌치의 테크닉을 익힌 뒤 다시 한식으로 방향을 튼 것이다.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미쉐린 가이드 서울>에서 별을 획득한 한식 파인다이닝 ‘비채나’에서 헤드 셰프로 경험을 쌓았다. 이후 합류한 곳이 안국동의 ‘온 6.5’다. 김치가 가장 맛있게 발효되는 땅속 온도 6.5℃에서 이름을 따왔다. 김치를 전면에 내세운 레스토랑이지만, 그가 가장 먼저 정한 기준은 ‘김치를 부러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김치가 가진 특성이 강하기 때문에 보이지 않게 작동해야 했다. 산이 되고, 발효의 결이 되고, 요리를 떠받치는 베이스가 되는 방식으로. 온 6.5의 모든 메뉴에는 예외 없이 김치가 들어간다. 크든 작든,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모두 그렇다. 하지만 메뉴판만 봐서는 이를 알아채기 어렵다. “김치는 육수처럼 쓰이고, 소스의 구조가 되며, 질감을 바꾸는 역할을 합니다. 동치미의 산으로 크림을 응고시키고, 나박김치 국물의 발효 산으로 생선을 익혀 세비체처럼 구성하지요. 김치는 하나의 식재료인 동시에 요리의 조화를 이끄는 기능적 열쇠입니다”라고 이정수 셰프는 말한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한식’이라는 틀에 얽매이지 않고, 서양식 메뉴와 테크닉을 넘나든다는 점이다. 이곳에서 사용하는 김치는 매장에서 직접 담근다. 동치미부터 백김치, 갓김치, 바질김치, 멍게 섞박지, 고추장김치, 청양고추 장김치, 마늘종 장김치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김치는 거의 매일 담근다. 숙성 기간이 긴 장김치류는 여름마다 한 번에 20~30kg씩 담가 겨울까지 사용한다. 그에게 김치는 완성품이 아니라, 계속 조정되고 재해석되는 재료다. “주로 제철 채소로 담그긴 하는데, 아스파라거스부터 비트, 콜라비, 허브까지 거의 모든 재료를 시험해봤어요. 그중 살아남은 것만 메뉴로 이어지는 거죠. 무엇보다 가장 힘든 점은 가격이에요. 계절에 따라서 가격 변동 폭이 극심해서 kg당 몇 천 원이던 배추가 20만 원을 넘기기도 하거든요. 김치는 어디서나 흔한 반찬이라는 인식이 너무 강해요. 그런데 사실 김치는 정말 비싼 음식이거든요.” 이정수 셰프는 언젠가 해외에서 김치를 주제로 한식을 선보이고 싶다고 말한다. 아직도 김치가 무엇인지 묻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때는 더 한국적인 형태로, 그러나 외국인이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맛으로 김치를 풀어내고 싶다. 김치는 아직 보여주지 못한 가능성이 많다. 온 6.5는 그 가능성을 실험하는 공간으로서, 김치를 재료가 아닌 방식으로 다루며 다음 단계를 준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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