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한옥 안에서 커틀러리와 한지가, 금속과 소리가, 일상과 시간이 조용히 어우러진다. 디자인부터 브랜딩, 공간 기획까지 모든 것을 자신의 손끝으로 완성해온 배용희 대표는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고집으로 ‘호랑’의 세계를 구축해왔다. 소리 없는 절제, 밀도 높은 감각, 그리고 한국적인 것에 대한 현대적인 해석. 그는 지금도 일상 속 조각들을 통해 조용한 아름다움을 확장하고 있다.
EDITOR 남정화 GUEST EDITOR 조혜나 PHOTOGRAPHER 이우경
배용희 ‘호랑HORANG’의 대표이자 공간과 제품을 아우르는 총괄 기획자다. 금속 표면 처리 명장인 부친과의 협업을 시작으로, 국내 장인들과 함께 기능과 미감을 겸비한 오브제를 제작해왔다. 1965년 지어진 한옥을 리모델링한 서촌 쇼룸을 통해 깊이 있는 브랜딩을 지속하고 있다.
좋아하는 것을 오래 들여다보고, 그 감각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천천히 완성해가는 일. ‘호랑’을 만들고 있는 배용희 대표의 일과 일상은 조용한 태도로, 그러나 분명한 신념으로 이어진다. 기능과 형태, 전통과 모던, 장인과 디자인. 이질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요소들이 그의 손끝에서는 자연스럽게 하나가 된다.
서촌의 오래된 한옥을 리모델링해 만든 호랑의 쇼룸은 그가 추구해온 모든 감각이 축적된 공간이다. 기둥에 붙은 오래된 신문지부터 한지를 통과해 은은히 떨어지는 빛, 서까래 아래로 흐르는 음악과 발소리마저 브랜드의 일부가 된다. 커틀러리 하나에도 감정과 구조가 있고, 공간 안에 배치된 모든 오브제는 그가 좋아하고 존중해온 가치의 조각이다. 디자인, 브랜딩, 공간 기획까지 전반을 총괄하며 국내 장인들과 협업을 통해 하나씩 만들어낸 오브제들. 그는 오랜 기술에 감각을 덧입히는 방식으로 브랜드의 미감을 완성해왔다. 단순히 예쁜 물건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도 사랑받을 수 있는 ‘생활의 조각’을 만드는 일. 호랑의 철학은 그렇게 그의 삶 속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줄 알고, 들리지 않는 감각에 귀를 기울이는 일. 그가 말하는 ‘조용한 깊이’는 결국 감각과 태도의 문제다. 함께 나눈 대화를 통해, 공간과 오브제를 매개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가는 배용희 대표의 취향과 시선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그의 가방 안에서 나온 건 클래식한 카세트 플레이어와 ‘오래전 그날’을 떠오르게 하는 테이프들, 감성을 담은 아이팟과 유선 이어폰, 그리고 캐릭터를 입은 줄자. 서로 다른 시대를 지나온 오브제들이 한 프레임 안에서 조우한다.
내 스타일의 ‘한 끗’은?
화려한 디테일보다는 소재가 주는 감도에 끌리는 편이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밀도, 시간이 지날수록 드러나는 질감의 깊이. 그런 ‘진짜’가 있는 물건에 마음이 간다. 단단한 금속 표면이나 오랜 세월을 견딘 나무의 결처럼, 마음의 끌림은 손과 시선이 오래 머무는 곳에서 시작된다. 이런 취향은 제품을 만들고 공간을 기획하는 내 일의 태도에도 그대로 반영되는 것 같다.
나를 매료시킨 스타일 아이콘은?
사카모토 류이치. 옷이든 음악이든, 군더더기 없는 절제 속에 고요하고도 단단한 세계관이 담겨 있다. 그의 작품은 언뜻 간결하지만 들을수록, 볼수록 깊은 잔향을 남긴다. 한 음, 한 조각, 한 마디에 담긴 밀도는 머릿속에 오래 머문다. 결국 내가 추구하는 스타일도 그런 조용한 단단함에 가깝다.
인터뷰가 있던 날, 매장 한편에 조용히 달려 있어 공간에 활력을 더하던 오브제. 한옥의 창호 문을 고정하기 위한 새 모양의 들쇠다.
옷장에서 가장 오래된 아이템은?
톰 포드의 클래식 슈트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자연스럽게 손이 가는 옷인데, 매번 입을 때마다 여전히 내 옷 같다는 확신이 든다. 절제된 디테일, 잘 잡힌 실루엣, 시간이 지나도 흐려지지 않는 존재감. 결국 이런 옷은 누군가의 손끝에서 오랜 시간 정성스레 다듬어졌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 감도는 결코 빠르게 만들어질 수 없다.
단 한 벌만 챙겨야 한다면?
가장 기본적인 셔츠와 가장 편한 청바지. 지나치게 튀지도, 특별하지도 않지만, 가장 편안한 상태로 나를 표현할 수 있는 조합이다. 단순한 옷이 오히려 많은 가능성을 열어주는 법이다. 옷에도 공예처럼 여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늘 가지고 다니는 가방 속 필수품은?
고미술을 자주 보러 다니다 보니 손 소독제와 핸드크림은 항상 챙긴다. 오래된 물건을 마주할 때는 손의 감각이 더욱 예민해져야 하니 여러모로 신경이 쓰인다. 그 외에 클래식 아이팟, 카세트 플레이어, 선글라스, 지갑, 명함 지갑이 기본이다.
쇼핑할 때의 기준은?
시간이 지나도 낯설지 않을 것. 유행보다는 내가 오래 바라볼 수 있는가를 먼저 따져본다. 결국 공간이든 물건이든, 나의 리듬 안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지가 가장 중요하다. 호랑의 제품을 만들 때도 그런 기준을 우선시하려고 한다. 짧은 순간의 반짝임보다, 오래도록 곁에 두고 싶은 것을 만들고 싶다.
호랑의 커틀러리 중 가장 반응이 뜨거운 ‘블랙’ 컬렉션.
최근에 구입한 것은?
어제, 조선 시대의 찻잔을 한 점 구입했다. 오래된 기물 속엔 누군가의 손이 수없이 닿았던 시간이 고스란히 스며 있다. 그 미세한 흔적들을 보고, 느끼고, 조심스레 손에 올려보는 행위 자체가 일종의 명상이자 공부라고 생각한다. 영감을 얻는 방식도 비슷하다. 오래된 것에 담긴 정성과 결을 통해 오늘의 물건이 탄생된다고 생각한다.
요즘 가장 갖고 싶은 것은?
더 로우의 소프트 로퍼와 18세기 조선 시대 주병. 하나는 현대적인 미니멀리즘의 정점에 선 브랜드의 정제된 결과물이고, 다른 하나는 시간을 건너온 한국의 조형미를 품은 오브제다.
나의 시그너처 향은?
퍼퓨머 H의 ‘인센스 워터’. 향은 공간보다 더 빠르게 기억에 남는다. 이 향은 지나치게 장식적이지 않으면서도 깊은 여운을 남긴다. 고요한 공간, 금속의 차가운 질감, 무채색의 공예품들과도 묘하게 어울리는 향이다.
요즘 즐겨 듣는 음악은?
글렌 굴드가 연주한 바흐 곡들과 사카모토 류이치의 피아노 솔로 곡들. 둘 다 공간에 긴 여운을 남기는 음악이다. 음악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공간의 결을 결정짓는 요소라고 생각한다. 호랑 서촌에서는 그런 음악이 하나의 공기처럼 흐르길 바란다. 너무 잘 들리지는 않지만, 분명히 느껴지는….
근래 가장 인상 깊었던 책은?
이우환 작가의 <여백의 예술>. 작품은 물론이고 그의 언어에도 감탄하게 된다. 보이지 않는 것을 표현하려는 태도, 침묵과 공간을 예술의 본질로 바라보는 시선이 내게 많은 영향을 준다. 제품을 만들 때, 공간을 꾸밀 때 어떻게 여백을 둘 것인가를 늘 고민하게 된다.
술을 따를 때 쓰는 백자병. 장인의 손맛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주병이다.
근래 가장 인상 깊었던 영화는?
고레다 히로카즈 감독의 <괴물>. 이야기의 구조보다, 인물들의 감정이 어떻게 축적되고 균열되는지를 섬세하게 그려낸 연출에 집중하게 되었다. 그의 영화는 언제나 무언가를 ‘설명하지 않음’으로써 더 많은 이야기를 한다. 브랜드의 철학을 설명하는 대신, 공간과 물건이 자연스럽게 말하게 하고 싶은 내 마음과 비슷하달까.
작품을 소장하고 싶은 아티스트가 있다면?
정상화 선생님과 구본창 선생님의 작품. 단순한 표현 속에서도 깊은 사유가 느껴진다. 시간을 견뎌낸 그들의 작업에서는 고요 속의 힘이 느껴진다. 호랑이 지향하는 ‘조용한 감동’과 가장 닮은 미감을 지닌 아티스트들이라 생각한다.
내 인생의 스타를 꼽는다면?
아버지. 말로 설명하기보단 매일의 삶으로 장인의 길을 보여주신 분이다.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일은 아버지께 배운 것에서 시작되었다. 손으로 공을 들여 물건을 완성하는 자세, 무언가에 묵묵히 몰두하는 태도. 모든 것이 그분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일어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창문을 연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매번 길냥이와 눈이 마주치는데, 이런 의식과도 같은 조용한 눈 맞춤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매번 감각을 깨워주는 작은 장면 같다고 느껴진다.
잠들기 전 하는 일은?
하루를 소리로 정리한다. 불을 끄기 전, 음악을 튼다. 말로 정리하기엔 부족한 날에도 피아노 선율이나 현의 떨림은 하루를 다정하게 마무리해준다. 말보다 소리가 더 진심에 가까울 때가 있다. 조용한 음악이 공간에 잔잔히 스며드는 것이 느껴지면 긴장이 풀어진다.
각기 다른 모양으로 만들어진 조선 시대의 백자 물잔들. 그리고 고려 시대에 약을 먹을 때 쓰던 청동 약 수저와 젓가락. 짝이 맞지 않는 게 더 재미있다.
절대 빼먹지 않는 자기 관리법은?
비가 내리지 않는 한 고집하고 있는 러닝이다. 복잡한 머릿속을 비우고 감각에 집중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기도 하다. 집에서 한강까지 달리는 1시간 동안 생각은 정돈되고, 마음은 다시 단단해진다. 규칙적으로, 꾸준히, 흐르듯 이어지는 리듬이 작업에도 영향을 미친다.
냉장고 속 필수품은?
물과 탄산수.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입안을 깨우는 물의 감각을 좋아한다. 맛있는 음식도 좋지만, 가장 기본이 되는 맛과 향, 그리고 깨끗한 상태를 오래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평생 하나의 음식만 먹는다면?
감자로 만든 모든 요리. 튀기고, 삶고, 굽고, 으깨도 늘 다채롭다. 익숙하지만 지루하지 않고, 소박하지만 충만한 재료. 감자는 내가 좋아하는 물건들과도 닮아 있다. 군더더기 없고, 쓰임에 따라 다양한 얼굴을 가질 수 있는 소재라는 점에서.
나만의 의미 있는 장소는?
서촌의 호랑. 단순히 브랜드의 쇼룸이 아닌, 나의 삶과 시간, 철학이 스며 있는 곳이다. 한옥을 해체하고 다시 짓는 동안 드러난 구조물들, 함께 작업했던 장인들의 숨결, 커틀러리를 올려놓은 전시대의 온도까지 모든 것이 나를 증명한다. 매일 조금씩 달라지는 빛과 소리, 냄새가 공간을 살아 있게 만든다.
한쪽 벽은 일본 작가 가미소에Kamisoe가 호랑의 쇼룸을 위해 드로잉한 작품들이 7mm 간격의 이시가키 공법으로 연결되어 있다. 오랜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한옥 기둥과의 조화가 흥미롭다.
최고의 여행 기념품은?
일본 교토에서 장인들을 직접 만나 구매했던 오브제들. 현장에서 손으로 물건을 만든다는 것이 무엇인지 체험한 그 순간들이 물건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물건은 결국 그 안에 담긴 이야기로 완성된다고 믿는다.
내가 받은 최고의 선물은?
아버지와 함께 처음으로 만든 커틀러리 완성품. 기능도 디자인도 중요했지만, 무엇보다 우리 둘의 시간이 집약된 물건이라는 점에서 더없이 의미 있다. 손끝으로 다듬고, 눈으로 검토하고, 마음으로 완성한 그 하나의 결과물은 지금도 가장 소중한 물건이다.
요즘 가장 집중하며 빠져 있는 것은?
커틀러리 다음 시리즈를 준비 중이다. 호랑이 ‘일상을 위한 조각’이라는 철학을 지닌 브랜드인 만큼, 커틀러리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태도와 감각을 담는 오브제라고 생각한다. 다음 세대에게도 남을 수 있는 물건을 만들고 싶다.
인생에서 포기할 수 없는 즐거움은?
사람의 손으로 공들여 만든 물건을 만지는 일. 누군가가 시간과 정성을 들여 만든 물건을 손에 쥐는 순간 느껴지는 울림은 특별하다. 쓰임을 전제로 한 아름다움, 실용 안에 감춰진 섬세한 배려. 그런 것을 마주하는 일이야말로 내게 가장 깊은 기쁨이다.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었던 조언은?
“돈은 잃으면 벌 수 있지만, 사람은 잃으면 다시는 없다.” 아버지께서 늘 하시던 말씀이다. 장인의 삶을 옆에서 지켜보며, 기술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관계와 마음이라는 걸 배웠다. 물건을 만드는 일은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로 완성된다. 지금도 그 말을 생각하면 내가 어떤 선택 앞에서, 어디에 중심을 두고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그의 주머니 속에서 나온 것들. 계절의 향을 직관적으로 담은 영국 브랜드 퍼퓨머 H의 향수들과 고미술품을 자주 만지는 손을 보호할 어퍼서케리 핸드크림, 선글라스와 카메라 그리고 명함 지갑과 지갑.
만약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면 되고 싶은 것은?
음악가. 장르나 스타일에 상관없이, 감정을 소리로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음악이라는 세계를 동경한다. 조용히 앉아 악보를 쓰는 일도, 홀로 연주하는 순간도 내게는 낭만적인 상상이다. 브랜드를 만들며 느낀 감정들을 음악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또 다른 형태의 호랑이 될 것 같다.
내가 가장 편안함을 느낄 때는?
햇살이 스며든 조용한 공간에서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있는 순간. 그 안에서 무언가를 쓰거나 생각하거나, 혹은 그냥 멍하니 있는 시간이 좋다. 외부의 자극에서 잠시 멀어져, 나의 리듬과 감각만으로 공간을 채울 수 있는 시간. 그럴 때 가장 편안함을 느낀다.
나의 영감의 원천은?
오래된 물건, 특히 누군가의 손을 거쳐 만들어져 오랜 시간 써온 것들. 그런 것들에는 겸손함과 깊이가 있다. 흠 없이 반짝이는 새 제품보다 시간의 흔적이 남은 물건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발견하게 된다. 그 조용한 울림에서 큰 영감을 얻는 편이다.
내가 생각하는 ‘럭셔리’란?
속도와 무관하게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과 물건. 단순히 비싼 것이 아니라, 나를 더 나답게 만들어주는 것. 시간이 흐를수록 가치가 깊어지고, 오래 두었을 때 더 좋아지는 것. 그게 진짜 럭셔리라고 생각한다.
Related articl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