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 2025년 7월호

가장 뜨거운 여름, 최대훈

무르익어가는 여름의 한가운데, 최대훈의 올여름은 어쩌면 가장 뜨겁고 맹렬할지 모른다. 데뷔 23년 차, 배우 인생의 전환기를 지나고 있는 그에게 주어진 하루의 휴식. 온몸의 힘을 빼고 느긋하게 흘려보내는 그의 여름날 오후를 함께했다.

EDITOR 이연우 PHOTOGRAPHER 양중산

블루 컬러 셔츠와 니트는 메종 마르지엘라. 팬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요즘의 날들은 어떻습니까? 주변의 공기가 미묘하게 달라졌다거나(웃음) 체감하는 변화가 있습니까?

밖에 나가면 많이들 알아보고 반가워해주십니다. 제 별명이 ‘학씨 아저씨’잖아요. ‘학씨’라는 단어가 아주 작게 말해도 잘 들리거든요. 어디선가 “학씨다”라는 말이 들리면 제가 먼저 그분들께 눈인사를 해요. 사진도 같이 찍자고 하고요. 제 캐릭터를, 저라는 사람을 좋아해주신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이에요. 놀라운 날들이죠. 놀랍다 못해 저로서는 기이하게까지 느껴지는 일도 일어나고 있는데요. 제가 단독으로 광고 촬영을 한다는 거예요. 대학생 때 메인 모델 뒤에 서 있는 무리 중 한 명으로 참여해본 이후 처음 찍는 광고예요. 사실 광고라는 게 제품을 알리고자 하는 목적성이 확실한 일이잖아요. 배우 역시 상품인 존재고요. 어느 정도는 제가 분명한 효용이 있는 사람이라는 인정 같아서 살짝 뿌듯하기도 하고, 신기하고 또 참 감사합니다.


주어진 관심과 기회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누리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벅찬 순간들을 충분히 즐기고 있는지요?

처음에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고 어색했어요. 제가 조금 방어적인 편이랄까, 다소 인색한 성격이에요. 자신에게 부여하는 기준도 높고, 안 될 때의 가정을 더 많이 하기도 하고요. 그런데 이제는 좀 달라지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더 발전적인 방향으로요. 예전엔 누가 저를 칭찬하면 무조건 아니라며 손사래부터 쳤는데 지금은 진심으로 감사하며 더 잘하겠다고 대답해요. 김원석 감독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칭찬해주는 입장도 생각해보라고. 분명 제가 이룬 결과가 있기에 그런 말을 하는데, 무조건 아니라고 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면서요.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조언이었어요. 칭찬을 잘 받아들이고 주어진 것들을 만끽하는 것 또한 내일을 위한 에너지가 되겠더라고요. 더 잘하고 싶고, 더 잘할 수 있을 거란 믿음의 씨앗 같은 거죠.


크게 축하할 일도 있었죠. 백상예술대상에서 조연상을 수상했습니다. 특히 재미와 감동이 적절히 버무려진 수상 소감이 화제가 되었는데요. 혹시 조금이라도 수상을 예상했나요?

전혀요. 수상 소감이 좋았다는 반응에 대해서는 좀 의문이에요. 저는 정말 속으로 ‘망했다’ 그랬거든요. 가끔 시상식을 보면서 만약 내가 저 무대에 올라간다면 무슨 말을 할까 생각해본 적은 있어요. 하지만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 구체적으로 그려본 건 아니고, 최소한 혼자 흥분하고 감정에 취하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 정도만 했죠. 그런데 막상 현실이 되니 제가 딱 그러고 있더라고요. 짧고 굵게, 담백하게 끝내고 싶었는데…. 그래도 다들 좋았다고 해주시니 다행이죠. 여러모로 모든 게 잘 이뤄지는, 운이 좋은 날이었다 싶어요.




“마음에 만선을 이뤘다”는 말이 특히 인상적이었어요.

<폭싹 속았수다>에서 만난 구절이에요. 처음 읽었을 때부터 너무 좋았고 오랫동안 그 말에 담가져 있었나 봐요. 메모장에 써놓고 촬영 내내 떠올렸거든요. 이 작품을 하는 동안 모든 것이 톱니바퀴처럼 착착 맞아떨어진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함께 이 작품을 한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하나씩 쌓아 올린 것들이 결국에 거대한 만선을 이룬 거죠.


상이 결과의 전부는 아니지만, 확실한 인정을 받았다는 점에서 또 하나의 계기이자 전환점이 될 수 있겠지요.

네, 의미를 붙이자면 강력한 부스터를 얻은 것 같아요. 물론 앞으로 무조건 잘나갈 거라는 뜻은 아니고요. 계속 일을 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무너지고 주저앉게 되는 날이 있을 거잖아요. 당연히 만족스럽지 못한 날도 기다리고 있겠고요. 그럴 때 ‘잘할 수 있어, 너 이렇게 상도 받았잖아. 다시 한번 해봐’라는 메시지를 주는? 그런 존재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일종의 주문 같은 거죠. 그래서 일단은 트로피를 집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세워놨습니다. 트로피를 담아온 가방까지도 치우지 못하고 있어요.(웃음)


여러모로 ‘학씨 아저씨’가 가져다준 것이 참 많네요. 인생의 큰 행운이자 기회인 ‘학씨 아저씨’의 첫인상은 어땠습니까?

제가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이건 내 거지’라는 자신이라기보다는 뭘 해야 할지가 정확히 보였거든요. 사실 처음엔 제 역할이 뭔지 모르는 상태에서 제작진을 만났어요. 감독님, 작가님, 그리고 캐스팅된 주요 인물들을 듣고는 어떤 역이든 상관없으니 무조건 함께하고 싶다고 했죠. ‘학씨 아저씨’는 극중에서 해야 할 역할이 명확한 인물이라고 판단했어요. 재미있겠다, 신난다, 잘하고 싶다, 그런 마음으로 그를 만나게 된 거죠.




인물을 입체적으로 살리기 위해 어떤 것들을 부여했나요? 가장 신경 쓴 점은 무엇입니까?

작품 안에서 이야기와 성격이 낙차가 큰 인물이잖아요. 그 대비를 명확하게 잘 살리고자 했어요. 저는 역할을 맡으면 이야기 안에서 그 인물이 어떤 기능을 해야 할지를 가장 우선으로 봐요. 그래야 객관적으로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인물이 되거든요. 대본을 읽을 때 제 대사를 파악한 이후에는 아예 상대 역할 대사를 소리 내 읽으며 전체를 파악하기도 해요. 그렇게 보면 제 인물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가 더 뚜렷하게 다가옵니다. 제가 맡은 인물에 대한 애정과 욕심을 줄이고 극 전체의 유기성을 따라가는 거죠. 거기서부터 살을 붙여 인물을 현실에 세웁니다.


‘학씨 아저씨’로 사는 동안은 즐거웠나요? 한편으로는 이 인물이 당신을 다른 곳으로 데려다 놓았다고도 할 수 있는데요. 그를 떠나보내며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작품이 끝나고 한동안은 참 보내기 싫더라고요. 시상식에서 오랜만에 드라마 스태프분들과 동료 배우들을 만났는데 모두 같은 얘기를 하더군요. “이 작품 다시 하고 싶다”라고요. 촬영하면서 고생도 했지만 좋은 이야기 안에서 ‘부상길’로 살 수 있어서 참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살면서 언제 또 그렇게 큰소리를 떵떵 쳐보겠어요? 물론 부족한 점도, 흠도 많은 인물이지만, 그래도 늦게나마 조금은 사람 마음 헤아리는 ‘인간’이 되었잖아요.(웃음) 부상길이 남은 인생은 좀 더 다른 사람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으로 살았으면 좋겠어요. 마음만 있다고 되는 건 아니니까요. 말로 표현하고 행동으로 옮겨야죠. 가족들, 가까운 사람들한테 잘하는 게 최고라고 생각해요.


2002년에 데뷔해 올해로 배우 인생 23년 차를 맞습니다. 얼굴이 알려진 건 비교적 최근이지만 사실 연기를 시작한 이후 한 번도 쉬지 않고 일해왔다고요. 어떻게 그렇게 열심히 달릴 수 있었나요?

재미있었어요. 특별한 이유는 없어요. 솔직히 시간이 이렇게 흘렀는지도 몰랐고요. 물 흐르듯 즐겁게 진행한 오늘의 이 화보 촬영처럼 그간의 세월도 기쁘게 통과해왔습니다. 물론 순간순간 힘들고 어려운 일이 왜 없었겠어요. 모든 삶이 그렇죠. 하지만 재미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신나게 연기를 해온 것 같아요. 친구들이 부러워해요. 그래도 너는 좋아하는 일 하며 살고 있지 않느냐고요. 맞아요. 저는 이 일이 재미있고, 이 삶이 좋아요.




연극과 뮤지컬 무대에서 활동하다가 2017년 무렵 본격적인 매체 연기를 시작했습니다. 뒤늦게 매체로 발을 내디뎠네요.

배우로서 저는 드라마에 부적합하다고 생각했어요. 연극학과에 들어갔을 때 정말 잘생기고, 예쁘고, 목소리도 좋은 분들이 많더군요. 실제로 그런 분들이 활발히 활동하셨고요. 피해의식일 수도 있겠지만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었던 것 같아요. 무대에 서면서도 즐거움 뒤에는 ‘내가 이 일을 해도 되나’란 의구심이 있었고요. 그래서 좀 더 희극적인 연기를 탐닉하지 않았나 싶어요. 우스꽝스러운 인물, 쓰임이 확실한 인물을 찾아다녔죠.


그런 상황에서 스스로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자신을 찾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기보다 자연스럽게 발전한 것 같아요. 운좋게 여러 기회를 얻기도 했고, 시대의 흐름이 변하기도 했고요. 또 언젠가부터는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떤 작품에서든 당당히 제 몫을 할 수 있으려면 그만큼 늠름한 배우가 되어야겠다고요. 함께 연기하는 훌륭한 배우들을 보면 오롯이 자기 자신으로 카메라 앞에 서더군요. 자존감 넘치는 태도로, 맑은 눈빛을 빛내면서요. 그들을 보며 저 역시 대본 뒤에 숨어만 있어선 안 되겠단 다짐을 했어요. 자신을 믿고 아끼며, 내실이 탄탄한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배우는 어쨌든 많은 이들이 알아봐주고, 작품을 통해 선택받아야만 하는 직업이죠. 그렇지 않을 때는 많이 힘들기도 했을 겁니다. 그간 어떻게 버텼나요?

글쎄요, ‘버텼다’라…. 저는 버티며 살아오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버틴다는 건 괴롭고 싫은 것을 견뎌내는 거잖아요. 저는 되레 굉장히 즐기며 살았어요.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최고의 자질 같은데, 크게 조급해하거나 불안해하지 않는 성격이에요. 어차피 죽기 전까지 평생 연기 할 건데 지금 당장 빨리 잘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어요. 가끔 다른 이들을 보며 부러워한 적은 있지만 이 삶이 힘들다 느낀 적은 없었어요.




그래도 배우로 산다는 건 불확실성 속에서 나름의 답을 찾아나가야 하는 일 같습니다. 그나마 연기가 ‘내 일’이라는 확신이 들었던 때가 있습니까?

확신까지는 아니지만 요즘 비로소 일말의 믿음이 생기고 있습니다. ‘나쁘지 않다, 괜찮은 것 같다’ 정도요. 사실 이제껏 어떤 작품에서도, 어떤 역할에서도, 한 번도 안심해본 적은 없어요. 늘 만족스럽지가 않죠. 하지만 아마 앞으로도 완벽히 만족할 수는 없을 거예요. 그래서도 안 되고요. 그나마 제 연기를, 제가 출연한 작품을 보신 분들의 진심 어린 말 한마디 한마디에 보람과 믿음을 얻고, 계속해서 나아가는 거예요. 이번 작품이 끝나고 “‘학씨 아저씨’ 보면서 우리 아빠 생각이 많이 났어요”란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그런 공감이 정말로 큰 힘이 되었어요. 최소한 제가 엉망은 아니라는 확실한 인정 같아서요.


이번 달도 촬영 스케줄이 뺴곡하더군요. 요즘은 촬영장 가는 길에 어떤 생각을 합니까?

최대한 지금을 잊으려 해요. 쏟아진 관심과 호응, 축하, 행운 같은 것들요. 여기까지는 하늘에서 준 보너스 같은 거라고 생각하고 저는 다시 이제껏 제가 해왔던 대로 일을 해야죠. 때로는 실수도 하고, 망하기도 하고, 애쓴 걸 아무도 몰라주기도 하고, 뭐 그렇겠죠? 들뜨거나 괜히 부담에 사로잡히지 않으려 마음을 다잡는 중이에요.


더 나이가 들어 필모그래피를 마무리할 때쯤에는 어떤 배우로 기억되고 싶습니까?

‘배우’라는 수식어가 어색하지 않은 사람이고 싶어요. 사실 스스로 ‘배우’라고 칭할 수 있게 된 것도 최근 일이에요. 카메라 앞에 선다고 해서 다 ‘배우’라 할 수는 없잖아요. 제 이름 앞에 ‘배우’란 단어가 붙었을 때 이질감 없이 잘 녹아드는, 좋은 배우로 남으면 좋겠어요. 거기서 좀 더 욕심을 낸다면 80세, 90세가 되어도 오래오래 대중이 필요로 하는 연기를 하고 싶고요. 배우를 평생의 직업으로 삼고, 배우로 마무리할 수 있길 바라요.




여전히 연기가 즐겁습니까?

물론입니다. 좋은 작품은 사람들에게 희로애락을 경험하게 하죠. 저는 “나 그 작품 보고 이런 거 했잖아”라는 말을 들을 때가 그렇게나 벅차고 기분이 좋더라고요. 그게 제 직업이 존재하는 이유라고도 생각하고요. 좋은 연기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조금은 영향을 미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기에 연기하는 것이 기쁘고, 즐겁고, 감사합니다. 비록 정답이 없고,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결과도 종종 나타나지만 그래서 더욱 재미있어요. 인생을 걸고 싶은, 인생을 걸 충분한 가치가 있는, 흥미로운 도박 같은 거죠.


날이 무덥습니다. 즐겁게 연기하고 있는 최대훈의 올여름은 어떻게 흘러갈까요?

아주 뜨겁게 타올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최근에 수영을 배웠어요. 40년 이상 ‘못하던’ 일을 이제 할 수 있게 된 거죠. 앞으로도 도망치고 싶고 포기하고 싶은 것들과 맞서 이겨내는 삶을 살고자 합니다. 새까맣게 그을리더라도 당당히 나서면서요. 올여름이 바탕이 되어 더 많은 것을 수확하는 계절을 맞을 수 있으면 좋겠네요. 제 삶의 순간순간, 빛이 되고 힘이 되어준 분들이 많거든요. 지금 안팎으로 더 타오르고 깊어져서 다음 계절에는 그들에게 뭔가를 돌려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죠. 그 어느 때보다도 기대되는 여름입니다.



HAIR  제레미(아도르 청담)  MAKEUP  지수(아도르 청담)  STYLIST  전진오 

COOPERATION  렉토(6911-0874), 메종 마르지엘라(7127-1621), 아워레가시(6911-0823), 질샌더(9241-3549), 펜디(2056-6067)

목록으로

Related articl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