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용의 ‘바디스케이프’(2022) 앞에 앉은 이유진 대표.
이유진 미술과 익숙한 환경에서 자랐고 자연스럽게 미술사를 전공했다. 이후 예술교육, 전시 기획, 출판 활동을 하면서 미술계와
연결 고리를 이어가다가 2023년 5월, <비평가 이일과 1970년대 AG그룹>이라는 전시로 갤러리 ‘스페이스21’을 개관했다. 한국 현대미술의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전시를 기획, 출판하고 미술비평을 위한 연구소를 만들 계획을 하고 있다.
여기, 대를 이어 미술계에 족적을 남기고
있는 부녀지간이 있다. 바로 우리나라 1세대 평론가 고故 이일(1932~1997)과
스페이스21 이유진 대표다. 아버지는 한 미술계에 비평이라는 개념을 정립하며
그 가치를 자리 잡게 했고, 딸은 그 유산을
바탕으로 한국 실험 미술의 재조명, 작가
발굴, 그리고 컬렉팅을 통해 미술계에 깊이와 현장감을 더해 눈길을 끈다. 흥미롭도 이러한 온고지신溫故知新의 미학은 이유진 대표의 보금자리에 있는
미술품 컬렉션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평론가였던 아버지 덕분에 어릴 때부터 미술 작품과 함께 생활하셨겠어요.
미술작가와 미술 관계자들이 집 문턱이 닳도록 왕래하는 것을 보며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파리 유학 후 홍익대 교수로 부임해 작가, 이론가와 교류하셨고, 다수의 제자를 배출하셨거든요. 저 역시 이화여대 졸업 후 홍익대 미
술사학과 대학원에서 공부하면서 아버지를 따라 갤러리, 미술관, 작가 작업실을 수없이 방문했죠. 아버지가 운전을 못 하셔서 대학생 때부터 결혼 전까지 제가 아버지 전담 운전기사였던지라.(웃음) 집에 그림과 조각이 있어
서 자연스레 미술품과 친숙해졌지만, 특정 작품을 컬렉팅하겠다는 마음은
들지 않았어요. 그러다 미술 시장이 전례 없는 호황기를 맞았던 2006년,
그 붐을 타고 주목받는 작가 몇 점을 구매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보면서 소
장 품목의 세대교체가 필요함을 깨달았어요. 아무래도 집에 있던 작품들은
아버지와 동시대를 살았던 작가님들의 작품이 주를 이뤘으니까요. 이때부터 컬렉터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김보희의 ‘Leo’(2020). 그림 속 검은 개 레오를 제주도에 있는 작가 작업실에서
직접 만난 에피소드가 있는 작품이다.
현재 갤러리를 운영하고 계시잖아요. 컬렉팅 노하우가 궁금합니다.
저는 작가와의
교류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반드시 작업실을 방문해 작품 세계와 비전을 경청한
뒤 구매를 결정해요. 보통 갤러리를 통해서 구매하는 컬렉터와는 다른 저만의 방식이죠. 더불어 원로 작가와 입지가 다져진 중견 작가뿐 아니라 지속 가능성을 기준으로 30~40대의 젊은 작가를 지원하는
데 중점을 둡니다. 그래서 늘 갤러리와 미술관, 미술 잡지, 아트페어, 인스타그램 등을 통해 눈이 가는 작가들을 팔로우하고 있어요.
컬렉팅할 때 염두에 두는 부분이 있나요?
미술관은 소위 ‘현대미술은 어렵다’고 느껴지는 설치 작업과 미디어 아트 등을 소개하는 반면, 갤러리는 시각적으로 어필하고, 투자 면에서 유망하며, 개인이 편안하게 소장할 수 있는 작품 위주로 전시하잖아요. 미술사를 전공한 컬렉터로서 미술사적 담론을 일으키는 실험적 작품과 대중에게 호응을 얻을 수 있는 작품의 균형을 고려합니다. 이는 오랫동안 아버지와 교류했던 분들이 지금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가 되었다는 점과 일치하죠. 스페이스21 개관전이었던 <비평가 이일과 1970년대 AG그룹>의 출품 작가들 역시 미술사적으로 화업을
인정받고, 미술 시장에서도 환영받는 작가들이었어요.
첫 번째로 컬렉팅한 작품과 가장 최근에 컬렉팅한 작품은 무엇인가요?
첫 번로 컬렉팅한 작품은 1996년 남편과 뉴욕 생활을 마치고 귀국을 준비하 중 뉴욕 현대미술관(MoMA) 전시를 보고 우연히 들른 골동품 가게에서
구매한 아프리카 조각이에요. 나무 위에 눈, 코, 입, 머리카락을 철사로 단순
하게 표현한 것이 인상적이었죠. 제가 쓰고 있던 석사 논문 주제였던 ‘앙리 루소의 프리미티비즘’과도 맞닿아 있었고요. 최근에 컬렉팅한 작품은 고 조묵 작가의 브론즈 조각 ‘메신저’와 고영훈 작가의 ‘스톤 북’입니다. 두 작가
모두 아버지와 가까운 사이였고, 2024년 9월 스페이스21에서 열린 <베니스 비엔날레로의 여정> 전시에 작품을 내주신 인연으로 소장하게 되었죠. 비평가 이일의 레거시를 이어받아 갤러리를 시작하게 된 저로서는 아버지와 함께 화단을 이끌었던 작가의 작품을 소장해 의미가 커요.

이건용 작가가 간직하다가 이유진 대표에게 건네준, 70년 전에 쓴 아버지 이일의 시 원고 뭉치.
이 외에도 작품들에 다양한 이야기가 담겨 있을 것 같습니다.
1994년 3월
결혼을 앞두고 아버지의 친구였던 김창열 작가님이 결혼 선물로 그림을 주셨어요. 캔버스 옆에 “나의 오랜 벗 이일의 맏딸 유진 양의 결혼을 축하하며”라는 문장이 쓰여 있는데, 매우 영광이죠. 또 2020년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이승조: 도열하는 기둥> 전시를 보고, 엄격한 기하학적 형태와
절제된 색감에 매료됐는데요. 알고 지내던 사립미술관 관장님 소장 목록에
작가님 작품이 있어 삼고초려 끝에 제 품으로 데려왔습니다. 이건용 작가님과도 특별한 인연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20대 때 시인으로 등단했는데, 당시 쓴 시 원고 뭉치를 작가님께 건네셨대요. 이를 잘 간직하다가 시간이 흘러 제게 주신 거예요. 70년 전에 쓴 아버지 시를 보니 가슴이 뭉클해지더군요. 그래서 이건용 작가님의 하트 작품을 볼 때마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작가님의 배려가 따뜻하게 다가와요.
(좌) 윤형근의 ‘무제’(1990년대)와 김창희의 ‘여인’(1979).
(우) 김창열 작가가 결혼 선물로 그려준 ‘회귀’(1994). 캔버스 옆에 “나의 오랜 벗 이일의 맏딸 유진 양의 결혼을 축하하며”라고 쓰여 있다.
집을 둘러보니 거실에 있는 이건용 작가의 작품이 따스한 온도를 자아내서
바로 대표님께서 가장 좋아하는 공간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족이 모이는 식탁은 제가 신문을 읽거나 집무를 보는 데스크 역할도 하는데,
앉으면 마주 보이는 이건용 작가의 작품은 늘 저에게 다정한 인사를 해줍니
다. 위로받는다고 할까요? 한편, 현관과 마주하는 복도 긴 벽은 작품을 양쪽에 걸 수 있어 주기적으로 교체하며 감상하고 있습니다. 저는 평면 작품과
조각 작품을 적절하게 배치하는 것을 좋아하는데요. 예로, 윤형근 작가의
그림과 김창희 작가의 인물 조각, 이승조 작가의 그림과 이일호 작가의 청동 조각을 배치하는 식이죠.
난감한 질문을 하나 드릴게요. 갤러리 대표로서 현재 주목하고 있는 작가를 꼽는다면?
갤러리를 이끄는 입장에서 신진 작가 발굴과 중진 작가 지원에
책임감을 가져요. 동화적이고 초현실적인 세계관을 그려내는 모녀 듀오 작가 팀비비Team BeeBee, 회화의 본연을 클래식하게 풀어내는 김성국, 17세기 북유럽 정물화 이미지를 세련된 CG와 결합하는 김시종 작가를 눈여겨보고 있습니다. 과거 남성 중심의 화단에서 치열하게 작업을 이어갔지만,
주목받지 못했던 여류 작가에게도 큰 관심이 있고요.
그렇다면, 컬렉팅을 위해 갤러리를 찾는 분들께는 어떤 팁을 드리나요?
교과서 같은 말이겠지만, 전시를 자주 보러 다니면서 자신의 취향을 쌓는 것이 중요해요. 미술관과 갤러리가 개최하는 전시에 관해서도 공부해야 하고요. 현대미술의 난해함을 두려워하지 말고, 작가의 의도와 작품을 이해하려는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도 필수죠. 컬렉팅이란 분야는 경험이 필요
합니다. 아트페어나 전시를 감상하다가, 내 눈을 사로잡아 소유욕을 발동시키는 작품을 만났던 경험 누구나 있지 않나요? 처음에는 소품 구매로 시작해 점차 범위를 넓혀가는 것이 부담이 덜합니다. 이때 갤러리 관계자나 작가와 직접 작품에 관해 대화하는 것이 도움이 될 거예요. 그러다 보면, 곁에
오래 두고 즐기는 반려 그림을 만나게 될 겁니다. 개인적으로는 소장 이력에 이야기가 쌓이는 걸 보면서 미술과 함께하는 내 인생이 운명이자 행운이고 축복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사담이지만, 남편이 갤러리와 미술관 투어하는 제 취미가 처음엔 돈이 안 들어 다행이라고 반겼는데, 결국 컬렉팅이라는 세계에 발을 들이니 비싼 취미로 변모했다고 하더라고요.(웃음)
현관에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이세현의 ‘붉은 산수’(2017).
오랜 시간 한국 미술 시장을 지켜보셨는데, 최근의 분위기는 어떤가요?
앞
서 말씀드렸듯이 제가 2006년 컬렉팅을 시작한 것은 미술계의 전례 없는
호황에 편승한 것이었어요. 2020년 팬데믹을 기점으로 또다시 미술 시장의 활황을 목도했는데, 고무적인 점은 미술을 향유하는 인구가 확실히 늘어
났다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의 갤러리, 미술관 방문이 예전에 영화관을 드나드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트렌드가 되었죠. 다시 말해, 미술이 더는 소수 향유자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의미예요. 이런 경향은 점점 미술계 전반에 힘을
실어 시장에 활력을 주리라 기대합니다. 다만 현재 미술 시장이 좋지 않아
갤러리들이 고전하고 있지만, 이는 시기를 지나 숨 고르기를 하는 과정이라
고 봐요. 우려스러운 점도 있습니다. 미술 시장이 너무 회화라는 장르에만
치우쳐 있어요. 멋진 조각, 공예 작품도 있으니 살펴보셨으면 해요. 그리고
컬렉터가 반짝 유행하는 작가군을 좇아 소장하는 일도 지양해야 합니다. 여기에 과감한 도전 의식이 뒷받침되면 금상첨화고요.
마지막으로, 대표님에게 영감을 준, 나아가 활동에 도움이 된 아버지 이일 평론가의 말씀 혹은 문장이 있다면?
<비평가, 이일 앤솔로지> 상권에 있는 아버지의 글로 대답할게요. “비평의 기본자세, 그것은 곧 비평의 대상이 되는
작품과의 대결 의식, 더 나아가서는 동참 의식이라 할 것이다. 평론가도 모름지기 작가가 자신의 작품과 대결하듯이 작가의 작품과 대결해야 할 것이며, 또한 작가의 제작 행위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하는 것이다.”
스페이스21 사무실에 있는 고영훈의 ‘스톤 북’(2023).